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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바람, 여자의 섬

제주도의 독립운동사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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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들판의 돌 사이에 지천으로 핀 수선화
 

제주도는 삼다도(三多 島). 돌, 바람, 여자가 많다. 돌과 바람이 많아서 척박한 땅이다. 오죽땅이 척박했으면, 여성들이 바다에서 물질하며 삶을 개척해야 했을까. 제주의 독립운동사도 돌, 바람, 여자의 키워드로 풀어볼 수 있다. 필자는 불과 십년 전에 처음 제주도에 갔는데, 그때 조천의 제주돌문화공원에 가보고는 깜짝 놀랐다. 육지에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다양한 생활용구, 건축부재들에 돌을 사용하여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돌문화공원을 보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제주의 생활문화가 육지보다 훨씬 더 발달 되었다!”

제주를 보는 눈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육지 사람들이 나처럼 제주도를 생각해 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육지는 빠르고 섬은 늦고, 육지는 발전되었고, 섬은 낙후되었다’ 는 식으로. 그 선입견을 제주 돌문화공원이 한번에 깨어 주었다. 제주는 돌 ‘문명’을 갖고 있었다.

유배지 제주의 문화 : 돌밭에 핀 수선화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돌밭 섬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되고 척박한 환경의 이 섬은 정치권력 변동, 권력쟁탈 격화기에 정적의 유배지로 선호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당파싸움이 격해지고, 정치권력 변동이 잦아지면서 제주 유배지는 더욱 그러했다. 인조반정(쿠데타)으로 쫓겨난 광해군,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세 아들과 손자 임창군과 임성군 등의 왕족과 김정, 보우, 정온, 홍유손, 김춘택, 임징하, 조관빈, 임관주, 조정철, 김정희, 이익, 송시열, 장희재, 최익현, 백낙관, 이근택 등이 제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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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의 박영효(군천향대학교 양상현 교수 사진)
 

구한말에도 이러한 유배가 이어졌다. 김윤식과 박영효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경술국치 후 1911년 일제에 의해 오산학교 설립자이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 이승훈도 한때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척박한 돌섬이라는 고생스러운 환경으로 인해 오히려 중앙의 정계, 문화계, 독립운동계의 거물들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지방에서 받을 수 없는 문화적·정신적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게 되었다. 이러한 인물들과 이들이 남긴 영향은 한겨울 제주도 돌밭의 돌틈 사이에 지천으로 핀 야생 수선화와 같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수선화를 그렇게 좋아했다 한다.

박영효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친일 내각으로부터 강제 양위 압박에 처했을 때 양위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서 박영효는 유림들과 교유하며, 사립 의신학교 설립에 거금을 기부하여 신교육을 도왔으며, 제주도에 개신교가 전파되는 것을 적극 후원하여 성내교회가 설립되게 했다. 또한 천주교에서 제주도 최초의 여학교인 신성여학교를 설립할 때도 큰 역할을 하여 여성교육에도 기여했다. 또한 일본에서 밀감을 들여와 제주 구남천에 심음으로써 제주 밀감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1)

남강 이승훈은(李昇薰, 1864~1930) 1911년 5월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안악사건이란 만주 독립군기지 창설을 위해 안명근 등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이다. 그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곳은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473-1의 김시황 집으로 알려져 있다.2) 이승훈은 제주에서 그해 10월까지 6개월가량 유배생활을 하다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을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
암살음모사건(일명 105인사건) 관련자로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승훈의 제주 유배는 6개월 만에 끝났지만, 남강이 제주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 있다.

“남강이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손수 비를들어 안팎을 쓸고 동네 청년들과 우물을 치우는 등 솔선수범하는 생활을 하여 그가 이 동네에 온 이후로 주위가 깨끗해졌고 인심도 후해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수효도 늘었다. 제주도 식자들 사이에 이러한 남강이 소식이 그의 과거 경력과 더불어 알져지자 그를 찾는 이가 많았다. 남강은 새 백성으로 깨어 일어나 교육과 사업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일밖에 없다고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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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진건,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 문학과 지성사, 1999, pp. 228~230
2. 김시황도 후에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다.
3. 전재현, <남강 선생의 인격과일화>,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 1988,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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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6개월 동안 유배생활 한 남강 이승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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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이승훈 선생이 제주에서 유배생활하던 조천의 김시황 집
 

남강이 솔선수범으로 가르치면서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동네는 깨끗해졌고, 싸움이 없어졌다고 한다. 남강은 제주도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제주도는 한반도의 본이고, 한라산은 산의 본이다. 그러므로 제주도 사람들은 한국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여기에 교회와 학교와 공장을 많이 세워야 한다. 그리고 섬 안에는 목장과 약초 재배와 특수농작이 적당하고, 해안과 바다에는 어항과 어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곳에 새로운 교육기관을 많이 만들어 힘써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면 겨레의 영광을 회복하는 놀라운 광명이 여기로부터 본토에 비칠 것이라고 믿는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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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재현, 위 글, pp 368~369. (밑줄표시는 필자 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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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조약이 체결된 뒤 영주권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국적선택의 문제가 발생했다. 민단은 한국 국적취득을 권고했고
총련은 한국 국적 취득을 반대하고 ‘조선’으로 남아야 한다고 선전했다. ⓒ조지현
 

9살에 고아가 되어 남의 집 사환으로 시작하여 거만의 부를 일군 실업가, 국권회복을 위하여 안창호의 동지가 되어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키운 민족운동가, 솔선수범의 실천가, 애민사상이 깊었던 남강이 “겨레의 영광을 회복하는 놀라운 광명이 제주도로부터 본토에 비칠 것”이라고 한 혜안이 놀랍다. 남강 선생은 외딴 돌밭섬 제주도가 가진 반전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돌밭 : 자작농 중심의 하나 된 공동체
화산섬인 제주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돌과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온통 섬이 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공중에서 제주도를 보면 검은 현무암으로 작은 밭 주위에 담을 쌓아 들판이 마치 조각보같이 보인다. 육지의 김해평야나 김제평야, 김포평야에 농장지가 널려있는데, 이런 제주의 척박한 땅에 누가 대규모 투자를 하여 농장을 할 것인가! 그래서 제주에서는 대지주의 농장 같은 것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육지와 같이 지주-소작의 계급관계가 발달하지 못했다. 다음 표의 전국 평균과 제주도의 토지소유 관계 비교표를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즉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계급이 제주도에서는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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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전국-<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43; 제주-<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1), p.50(<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4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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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자국을 위한 식량공급기지로 만들었다. 1910년대 10년 동안 쌀을 가져가고 자국 공산품인 면직물을 한국에 파는 미면교환체제를 구축했다. 1918년 일본의 미곡투기로 인한 쌀값 폭등으로 ‘미소동(米騷動)’이 일어나 내각이 붕괴되는 등의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 정부는 조선미 비밀 매집을 통해 자국 쌀값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 여파로 조선의 쌀값이 폭등했다. 민생이 벼랑 끝에 몰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쌀을 수탈할 수 있었던 것은 고율의 소작료를 거두는 지주제가 발달하여 미곡상을 통해 쌀을 매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5) 그러나 제주도는 쌀 농사지대가 아니다.

주 생산물은 보리와 잡곡이며, 자급자곡을 위한 생산이었다. 따라서 상품화되는 비율이 매우 작았다. 그런 까닭에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발달될 수 없었다.6) 제주의 독립운동과 근대 민족운동 특성이 이 토양 위에서 나왔다. 제주도의 특성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지적된다.

첫째, 제주도 내부의 계급갈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자본적, 반지주적 계급투쟁이 별로 없었다. 3·1운동 후 1920년대 육지에서는 소작쟁의가 격화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소작쟁의가 거의 없었다. 제주도 특유의 토지소유관계 때문이었다.

둘째,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1920년대 제주도 항일독립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육지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파벌투쟁이 심했으나, 제주도에서는 파벌투쟁이 없었다. 돌밭 제주도의 공동체적 일체감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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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보 같은 제주도 들판. 서귀포 지역(구글위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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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이노를 가로질러 흐르는 히라노가와에는 목재를 만들기 위해 채벌한 원목들이 가득차 있다. ⓒ조지현
 


돌밭을 떠나 : 제주인의 해외진출
척박했기 때문에 일찍이 제주 사람들은 일찍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본 오사카는 신라시대 당나라 땅의 신라방과 같이 제주 사람들의 집결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일본은 거의 희생을 치루는 일 없이 대전의 특수경기로 큰 호황을 맞았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지자 값싼 한국인 노동자들이 환영받았다. 그 시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많이 취업했다. 돌밭 척박한 경제의 제주 주민들도 일본 공업지대의 노동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1923년 오사카-제주 간정기항로가 개설되면서 이 경향을 더욱 심화되었다. 오사카는 제주도민 노동자들의 집결지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후 오사카 지역 재일 한국인 노동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에서 제주도 출신들이 지도적 역할을 했다.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에서 뚜렷하게 특색을 드러내는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 또한 이런 배경에서 일본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전반의 오사카 재일 한국인 노동운동 지도자 김문준(金文準), 1930년대 전반 오사카 중심의 일본 공산당 지도자 현호경(玄好景) 등이 제주도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