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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생명이요”

만해 한용운의 자유에 대한 생각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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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 기록화(정면 중앙의 왼쪽이 한용운)
 


만해 한용운
한용운은 불교 승려이고, 불교개혁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어릴 때 이름(아명)은 유천(裕天)이었다. 만해와 용운은 불교 이름인데 용운(龍雲)은 불교에 귀의한 제자들이 받는 불교 이름이며, 만해(卍海)는 승려의 아호이다.

그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던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동리 서당에서 공부했는데 고향 홍성은 조선 후기 유학의 한 중심지여서 착실하게 한학의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9살 때 문리가 터서 신동이란 말을 들었다.

1892년 13살에 천안 전씨 정숙과 결혼했다. 곧 격동의 세월이 닥쳐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의 발발, 일본의 조선의 왕비 민씨 참살(1895), 단발령 강요 등이 잇달았다. 왕비의 참살에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홍주 선비들이 들고 일어났다.

제1차 홍주의병이었다.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계략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하는 의문을 갖는 것을 당연했을 것이다. 서당 훈장을 하던 만해는 문득 집을 나서 보은의 속리산으로, 오대산 월장사로, 설악산 백담사로 전전했다. 출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6년 하산했다. 더 큰 세상 구경을 위해 세계 일주를 나섰다. 시베리아에서 일본 첩자로 의심받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머리 깎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일본인이나 친일파 일진회 회원이거나 했던 때였기 때문에 한인 청년들이 그에게 보자기를 씌워 바다에 집어 던지려 했다. 1897년 귀향하여 집이 없어 처가에 2년간 얹혀살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홍성에서 제2차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만해는 다시 집을 떠났다. 백담사에서 김연곡을 스승으로 모시고 마침내 승려가 되었다.

1908년 만해는 전국 사찰 52인 대표의 한 사람이 되었다. 원종 총무원 설립에 참여하였고, 1909년 5월 6개월간의 일본 각지를 시찰하였다. 이때 나중에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함께 하는 천도교 최린을 알게 되었다. 1909년 12월 귀국하여 조선 불교의 개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고 불경의 우리말 번역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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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독립선언서
 


1910년 8월 나라가 망했다. 만주, 몽골, 시베리아들 두루 다니며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신흥강습소 등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불교계는 유교국가 조선 500년 동안 차별을 받아 4대문 안 출입도 할 수 없었다가 일제가 들어오자 조선 불교를 일본의 조동종(曹洞宗) 밑에 붙이려는 이회광 일파가 나타났다. 만해는 불교 친일화에 반대하여 승려궐기 대회를 개최하고 민족불교 임제종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불교의 혁신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이후 그는 불교 대중화와 불교 청년운동에 주력하며 청년세대를 키우고, 산간의 불교에서 시중의 불교로 불교를 개혁하는 일에 노력했다.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을 주장했던 것도 경전에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관심이 1918년 불교잡지 <유심(唯心)> 창간으로 나타났다. 만해는 논설과 시, 수필을 발표하여 불교의 홍보와 포교, 대중 계몽과 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세계는 이전과 다른 시대를 열어갔다. 이미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국의 황제체제가 무너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전쟁 도발국이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의 군국주의적 군주국가들이었다. 이들에 대항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민주국가들이 싸워 이겼다. 대전 중 차르(황제)의 나라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화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미국 대통
령 윌슨은 약소국의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런 거대한 시대 전환을 읽고 3・1운동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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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앞 만세시위 군중(1919. 3. 1)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한용운도 백용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일원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인사동 태화관의 민족대표 독립선언식이 있었다. 만해는 여기에 참여하고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 안에서 만해는 3가지 원칙을 고집했다. 변호사를 거부한다. 사식을 거부한다. 보석을 거부한다는 세 가지였다. 법정에서도 일체의 자기변호를 거부했다.


자유에 대한 한용운의 생각
옥중에서 왜 독립운동을 했는가를 집요하게 묻자 만해는 필기구를 달라고 했다. 만해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었다. 제목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 개요’라 했다. 그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그리고 다음으로 평화가 있어야 함을 말했다.“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만해는 자유가 없는 인간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가 없는 삶은 가장 고통스럽고, 그 주변의 공기는 묘지로 변하고, 뺏고 뺏기는 것을 일로 삼는 자의 삶은 지옥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우주의 최고 이상적, 최고 행복의 실재는 자유와 평화이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같이 여겨야 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유와 평화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단언했다.

만해는 그 글에서 조선이 독립선언을 한 이유로 다음의 4가지를 들었다.

첫째, 민족 자존성
벌과 개미가 자기들끼리 사회를 이루는 것처럼 민족 간에도 자존성이 있다. 한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와 만물에 내재된 공통의 본성이다. 이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고, 스스로도 억제하지 못한다.

둘째, 조국사상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은 천성이며 미덕이다. 비록 총포의 수적 열세로 나라를 잃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조상의 통곡과 천지신명의 질책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셋째, 자유주의
인간 생활의 목적은 참된 자유에 있다. 자유가 없는 생활은 아무 취미도 즐거움도 없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아까워할 것이 없으니 곧 생명을 바쳐도 좋을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넷째, 세계에 대한 의무
민족 자결은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민족 자결주의가 성립되지 못하면 언제라도 전쟁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 민족의 독립 자결은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요, 조선의 독립은 곧 동양의 평화가 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출옥 후
1922년 5월 출옥했다. 출옥 후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며, 1922~1923년 동안 대학이 없는 조선에 (전문학교만 있었다) 민간의 힘으로 대학을 세우고자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였으며, 민족 경제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감시가 항상 따라붙는 속에서 강연, 조선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 활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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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안에서 쓴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감상 개요 친필 초안

 


그는 불교 승려의 결혼 합법화를 주장하였으며,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 다시 총재로 선임되어 불교청년운동을 이끌었다. 그 즈음인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했다.

시 <님의 침묵〉은 님이라는 대상을 노래함으로써 님이 조선의 독립, 혹은 부처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게 하여 총독부의 검열을 피했다.
1927년 2월 좌파와 우파 인사들이 함께 참여한 신간회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를 전 민족적 민중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좌절되었다.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 홍보에 힘을 기울였다. 그해 김법린·최범술·만공 등이 조직한 불교청년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52세 때 주변의 권유로 21살 연하의 간호사 유숙원과 재혼하고, 이태 뒤인 1933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지었다. 심우장은 총독부를 거부하는 의미로 북향으로 지었으며, 그곳에서 시와 소설을 집필했다.

1937년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사망한 김동삼이 서대문 감옥에서 서거했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이 없자 만해는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일제 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징용, 징병 등 강제동원이 이루어지고 지식인들에게 전쟁, 징용,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도록 강요했으나 만해는 일절 그런 글을 쓰지 않았고, 강연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도, 창씨개명도 거부할 뿐 아니라 창씨개명과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만년에는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7년 탑골공원에는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 고향인 홍성에 동상과 생가 복원이 이루어지고,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수년 전 집중 호우로 한강 하류가 범람하여 고양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하늘도 물, 땅도 물, 사방이 물 천지에서 가장 아쉽고 갈급했던 것이 물이었다. 자유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자유는 안전한가, 평화는 확고한가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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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님의 침묵>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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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생가(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1990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