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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 이동녕 선생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의 구심점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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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에서의 김구 이동녕 엄항섭(1933)
 

거인에 대한 기억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선생이 중국 땅 기강에서 71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1919.4.10~4.25)으로서 임시정부 출범의 산파역할을 했고, 그 후에도 제12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령과 주석 등 수반을 여러 차례 지냈다. 그와 오래 고락을 함께 한 동지인 조완구는 그의 장례 후에 쓴 글(<한민>, 1940년 4월)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선생은 마음과 뜻이 굳고 바르시고, 두뇌가 명철하시며, 품행이 반듯하시고, 일 처리가 공정하셨다.”

오랜 고락을 함께했던 동지이자 후배가 쓴 이 한 줄에서 그의 인품과 의로운 지도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락을 함께했던 백범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30여 년 전이다. 을사늑약 때 경성의 상동예수교당에서 진사 이석으로 행세할 때 상봉하여 같이 상소운동에 참가하였다. 합병 후 경성 양기탁의 사랑에서 다시 밀회하여 장래의 독립운동을 위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에 관한 일체 사무를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그 후 기미년 상해에서 또다시 상봉하여 20여 년 고초도 같이 겪고 사업도 함께해 오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지냈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 김구, <백범일지> 中


이동녕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겸손히 섬기는 그런 지도자였다. 분열과 다툼이 많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도중에 파탄이 나지 않았던 것, 윤봉길 의거 이후 8년간 부평초처럼 떠돌았던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어 결국 좌우통합의 중경시기를 맞을 수 있게했던 데에는 이동녕과 같은 온유하고 겸손한 지도자의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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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헌장(1919. 4. 11)
 


근대적 의식을 가진 지사로 성장
이동녕은 1869년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 독립기념관 근처 마을에서 부친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안 이씨, 호는 석오(石吾)이다. 부친은 경북 의성군수와 영해군수를 지낸 양반 관료였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익혔고 부친을 따라 1885년 서울 봉익동으로, 다시 경북 영해로 가서 살았다.

그는 1892년 23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자신의 특권에 안주하며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으나, 사회개혁 의식을 품었다. 그는 이듬해 부친을 따라 원산으로 가서 부친을 도와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1896년 7월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조직할 때 간사원으로서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 운동에 깊숙이 참여하게 됐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왕비 민씨의 참살과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신변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던 격동의 시기였다. 국정 혼란과 외세 침탈 속에서 국가의 각종 이권은 외국에 넘어가고 있었다. 이에 국민모금으로 1897년 독립문을 세워 자주의식을 일깨우고, 이듬해인 1898년에는 광범한 민중들의 만민 공동회운동을 통해 이권양여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의회설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종래의 중추원을 의회로 개조하여 내우외한의 위기 앞에 무력한 1인 전제정치의 한계를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독립협회가 이런 활동으로 황제권과 충돌하여 탄압받을 때 이동녕은 이승만과 함께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이동녕은 <제국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옥파(沃波) 이종일(李鍾一)의 권유로 제국신문 논설위원이 돼 “무능부패에 빠진 나라를 개화 혁신하여 시급히 자강을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강대국에게 침략당하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며 개화 자강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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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 피난시기의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동녕)
 


만주와 연해주 독립운동
독립협회 해산 후 국권회복운동가들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동녕은 이상재·전덕기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하면서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인도로 감리교 신자가 됐다. 그는 상동교회에 청년학원을설립하여 근대 민족의식과 신식교육을 실시하고, 그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의 역군으로 키워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선언하고 백방으로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열강 어느 나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대한제국은 원치 않는 러일전쟁에 끌려 들어가 인력과 물자를 공출당하는 등 굴욕과 피해를 입었고 일본이 승리하자 1905년 11월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동녕은 상동교회 동지들과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불법적인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매국노 처단을 계획하다 다시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탄압을 피해 국외에 독립운동기지 건설할 것을 계획하고 이상설과 함께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주의 교육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다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자 여준 등에게 학교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1907년 이동녕은 안창호·양기탁·이회영·이동휘·전덕기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다했으며, 새 단체에 의한 새 국민을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국민주권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전국의 지사들을 결집시켰다. 이동녕은 그 총서기로서 살림을 맡았으며, 신민회 사업의 일환으로 국외 독립군기지 개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동녕은 이회영과 함께 만주 남부의 독립운동 기지 대상 지역을 답사하고 돌아와 이회영 일가 등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1910년 11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경학사는 황무지를 개척하여 자급자족의 생활기반을 마련하는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며, 신흥강습소는 장차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무관학교였다. 이동녕은 신흥강습소장으로서 그 운영의 중심에 있었고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대첩 등 항일무장투쟁과 의열단 등 의열 투쟁의 주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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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요원 신년축하회 기념사진(둘째줄 왼쪽에서 아홉 번째 이동녕, 1920. 1. 1 상해)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의 해에 이상설 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만주·연해주 독립운동 단체의 역량을 총결집하여 조국해방전쟁을 준비했다.

이 야심찬 계획은 성사를 눈앞에 두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좌절됐다. 유럽에서 존망이 달린 전쟁을 치러야 했던 러시아가 일본과 비밀협약을 하고 한인 독립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대한광복군정부와 후원조직인 권업회는 해체되고 지도자들은 투옥되거나 원격지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기까지 연해주와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이동녕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대종교를 민족의식의 구심점으로 삼아 연해주와 만주 동포들의 항일독립운동 역량을 결집하며 결전의 때를 위해 준비했다.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주석 국무령 국무총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은 상해로 왔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독립운동지사 29인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회의체를 ‘임시의정원’이라 이름하고 이동녕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오늘날 국회의장 격이다. 이렇게 시작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10시까지 꼬박 12시간동안 밤을 새며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 새나라의 체제, 국민 기본권과 국가 사회의 운영원칙, 임시정부의 기구 등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격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정부 수반과 각료의 선출을 통해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도록 합의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쉽겠는가? 거기 모인 사람들은 출신 지역과 배경, 교육과 사상적 경향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이광수가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1919년 4월 10일) 한위건(韓偉健)이라는 청년이 며칠 전에 서울서 왔다. 그는 경성의 학전문학교 학생으로서 학생운동의 간부로 있다가 나온 열렬한 청년이었다. 그는 백남칠과 같이 문에 지켜 서서 마치 문지기 모양으로 가만히 있더니 모인 이들의 의견이 동일이 되지 못하여 어떤 분 하나가 ‘나는 가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것을 보고 한위건이 문을 막고 발을 구르며 ‘못 나가십니다. 정부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한 걸음도 이 방에서 못 나가십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수많은 남녀 동포들이 피를 흘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밤이 아홉이라도 이 자리에서 정부를 조직하시고야 말 것입니다’하고 눈물을 뿌리며 외쳤다. 한군의 이 말은 일동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 이광수, <이광수전집13(삼중당, 1962)>, ‘己未年과 나’

의정원 의장 이동녕의 지도력과 청년들의 열성이 함께하여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었고 가까운 시일 안에 상해에 올 가능성이 없었다.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의장을 손정도 목사에게 맡기고 임시 국무총리로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갔다. 이동녕 국무총리, 안창호 내무총장, 손정도 임시의정원 의장이 합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와 통합을 추진하여 9월 17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 임시정부 출범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타협과 통합의 역사는 매우 진귀한 것으로서 그 중심에 석오 이동녕과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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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명의로 발급된 이승만 박사의 임시정부 국무총리 임명장
(1919.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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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치장에 있었던 이동녕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