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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한강에서
화성을 바라보며
정조를 생각하노라

글, 사진. 김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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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박물관
 

서울시가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이른바 공중보행교인 ‘백년다리’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우선 노량진에서 노들섬 구간을 2021년 6월까지 준공하고, 노들섬에서 이촌동 구간은 2022년까지 완료한다는 것이다. 약3년 뒤에는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된다. 물론 지금도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한강 인도교인 한강대교(漢江大橋)는 1917년에 ‘용산 한강인도교’라는 이름으로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왕복 4차로였는데 2차로는 차가 다니고 2차로는 사람이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한강대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일이 되던 1950년 6월 28일 새벽에,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남한 육군에게 폭파를 당했고 그렇게 철골이 드러난 험한 몰골로 선량한 국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비극을 목도해야만 했다. 이후 1958년에 다리를 복구했고, 1981년 말에는 기존 다리와 대칭 형태인 4차선 ‘쌍둥이 다리’를 건설하고 ‘한강 인도교’나 ‘제1한강교’로 불리던 이름을 ‘한강대교’로 통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용하는 주체도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들어질 백년다리는 실제적인 인도교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건설될 백년다리가 가진 의미는 단지 서울시가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와 같은 관광 명소를 얻는다는 것 이상이다. 그 이유는 서울시에서 백년다리를 효심과 애민정신이 가득했던 정조대왕의 ‘배다리’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서 건설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陵寢)을 1789년에 서울(한양) 전농동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으로 불리던 경기도 화성(華城)의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기고 한양에서 현륭원까지 능행을 간다. 이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을 동안 어가를 멈추고 쉬던 곳이 동작구에는 용왕봉저정(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관련 자료를 보면 이곳에 오르면 한강은 물론이고 남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서울시와 동작구청 등 관련 행정기관에서는 이런 훌륭한 관광 자원을 개발하고 또 그곳이 지닌 의의를 국내외의 방문객들에게 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이야기를 다시 정조 때로 돌려보면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옮긴 후 약 2년 반(1794년 1월~1796년 9월) 동안 수원 화성(水原華城,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됨)을 건설한다. 정조 25(180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일종의 ‘화성 준공 보고서’인데, 여기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만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정조는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임금이다.

기록을 꼼꼼하게 해놓는 정조의 습관이 잘 나타난 것 중 하나가 <주교지남(舟橋指南)>인데 이 책에는 정조가 수원 화성에 갈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해 설치했던 부교(浮橋)인 배다리를 건설한 공법을 자세하게 정리해 놓았다. 앞서 16세기 초 연산군 때도 배다리가 건설된 바가 있지만, 연산군은 사냥을 가기 위해 배다리를 설치한데다가 공법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로 낭비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래서 정조는 기존 배다리가 가진 비효율성을 개선하고자 공법을 정리하여 <주교지남(舟橋指南)>을 펴낸 것이다.

정조 때 건설된 배다리는 무려 6000명이 이용했기에 매우 튼튼해야 했다. 그래서 그 하부 구조는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칭형의 구조물로 설계했는데, 몸체가 가장 크고 뱃전이 가장 높은 배를 골라 강 한복판에 정박시켜 기준으로 삼고 양쪽으로 크기에 따라 나열하여 무지개 모양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배와배를 연결할 때는 결합과 분해가 용이하도록하고, 일부 선박을 교체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칡 묶음 공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과 관련이 있는 유적 중 다른 하나는 화성(華城) 용주사(龍珠寺)이다. 용주사는 신라 말기인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되었는데 당시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고 한다. 이후 청정한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시대 때 크게 성장했는데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조가 즉위 13년이 되던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용주사를 일으켜서 현릉원의 능사(陵寺)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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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박물관
 


사도세자(장헌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과 어울리게 용주사(龍珠寺)에는 효행박물관이 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은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을 비롯하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6호인 청동시루에 이르기까지 무려23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기자는 지난 7월 하순에 부자 화가(父子畫家,박구홍·길호 화백)와 함께 용주사와 효행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박구홍 화백은 ‘수사반장’을 비롯한 수많은 드라마와 소설을 쓴 유명 작가다. 그런데 요즘은 작가보다는 화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들 박길호 화백 때문인데, 박길호 화백은 자폐 1급으로 25세의 나이지만 정신 연령은 3세로 순진무구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박 화백 내외는 그런 아들을 위해 국내외를 포함해 17곳을 넘게 이사를 했고, 50가지가 넘는 것을 가르쳐 봤는데 그중 아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고 두각을 나타낸 것이 그림이었다고 한다(실제로 박길호 화백의 그림은 외국에까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워낙 외향적인 성격이라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기에(만약 실종 신고된 사람의 빈도수 누계를 내본다면 당연히 1위를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잠시도 아들에게서 눈을 뗄수 없다고 말하는 박구홍 화백. 그래서 글쓰기를 비롯한 활동을 접다시피 하면서 아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있는데, 매일 아들의 그림 준비를 돕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도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그렇게 그림을 그린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나라 3대 미술제의 하나인 남농 미술제에서 입상해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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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농미술제 입상작 앞에 선 부자 화가(父子 畫家)
 


아바님 날 낳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살아시랴
하날 같은 은덕을 어디 다혀 갚사올고
-송강 정철, <훈민가(訓民歌)> 중 1수 부의
모자(父義母慈)


약 4시간 동안 박구홍·길호 부자(父子)와 함께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값없는 사랑을 느꼈고, 비록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 눈빛에서 부모를 한없이 믿고 따르는 순수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자녀는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효를 한다는 것 또한 새삼 느낄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 나서 옳지 곧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송강 정철, <훈민가(訓民歌)> 중 8수 향려유례(鄕閭有禮)

사람이 해야 할 옳은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우선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알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뿌리가 얕은 나무가 오래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람 역시 현재의 자신이 어디에서 비롯 되었는지를 알아야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바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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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호+박구홍, 2painters,2019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는 이유는 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후일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가?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중 제일이 바로 효(孝)일 것이다. 효를 실천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소학언해>에서는 몸을 잘 보전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이름을 높이는 것이 효의 마침이라고 했다. 자녀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이 박히니(그 대못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크게 자라며 부모의 마음에 점점 더 큰 구멍을 뚫는다) 자녀는 부모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잘 보전해야 한다. 그리고 부단히 노력해서 이름을 높여야 한다. 이름을 높인다는 것이 단순히 크게 출세하라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어떻게 살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이름을 짓는다. 그러니 자녀는 자신에 대한 부모의 바람을 잘 알고 그에 부응하력 노력해야 할 것이다.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하나이다.

이달 13일은 한가위다. 민족 최대의 명절을 맞아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고향을 찾을 것이다. 경우나 사정에 따라서는 고향이나 부모님을 직접 뵙지는 못할 지라도 그 마음만큼은 그럴 것이다. 이번에는 특히 한강에 ‘백년다리’가 건설된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이니 이번 한가위에는 가족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젖줄이 되는 한강에 서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수원 화성 쪽을 바라보면 어떨까 싶다.

이는 수원 화성과 인연이 깊은 정조가 합리적인 사람인데다가, 왕으로 있던 24년간 66회(연평균 2.7회)나 성 밖을 나와 백성의 생활을 직접 살피고 격쟁(擊錚,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국왕에게 자신의 일을 직접 호소하는 것)을 적극 허용하는 등 애민정신을 가진 성군(聖君)이었다는 것 외에도, 그가 인간의 근본인 효를 실천한 인간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약 3년 뒤에 우리가 걸을 수 있게 될 ‘백년다리’는 정조의 효심(孝心)을 100년 아니 1000년 후대까지 전할 좋은 교육 자료가 될 것이다. 이것이 104년 만에 부활하는 인도교에 대해 큰 기대를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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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