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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과

충칭임시정부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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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임시의정원 회의가 끝난 후의 임시정부 요인(1945. 9)
 


중일전쟁의 전세는 점점 중국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한커우와 광저우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조선의 용대를 창설했는데 일제의 세력이 남하해 옴에 따라 궤이린(桂林)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수세에 몰린 중국 국민당은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중국의 항일전에 동원하고자 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위원장이 1938년 11월에는 김구를, 1939년 1월 6일에는 궤이린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용대의 김원봉을 충칭에 초치하여 각각 중일전쟁 참여 동의를 받았다. 김구나 김원봉이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조국 해방과 민족 독립을 위한 길이었다.

두 사람은 1939년 5월 10일 공동으로 <동지·동포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서 과거 수십년간 파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을 반성하고, 조선 민족해방의 대업을 위하여 동심살력(同心戮力)할 것을 동지동포들 앞에 고백하며 자주독립국가, 민주공화제 건설, 일제 및 친일파 재산 몰수, 산업의 국유화 및 농민에 토지분배, 남녀평등, 국비교육 등 10개조의 공동강령을 발표하면서 좌우의 정당 및 단체들의 통일된 단일조직을 수립하는 데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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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임시의정원 의원 당선증
 


1940년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충칭으로 옮겨왔다. 처음 2개 구대 116명의 대원으로 출발한 조선의용대는 1년 뒤인 1940년 2월에는 본부요원 94명, 제1지대(지대장 박효삼) 98명, 제2지대(지대장 이익성) 75명, 제3지대(지대장 김세일) 63명으로 모두 498명의 대원을 거느린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그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8년간의 부평초와 같은 이동시대를 끝내고 충칭에 정착하였다. 충칭에서 김원봉과 김구 등 임시정부가 만나 협력과 대립의 애증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충칭에 정착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젊은 대원들은 불만이 많았다. 실전에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를 열망했으나 주어지는 임무는 일본군에 대한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등 보조임무에 국한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1939년 1월 들어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는 반공노선을 강화하고 대일항전에 소극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한 것도 불만이었다.

당시 조선의용대원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배낭에 언제나 책 두세 권과 양초 두 자루를 넣어 다녔다. 틈틈이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의 회고에 의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머리에 배면 밸수록, 붉어지면 붉어질수록 그와 정비례해 공산군에 대한 동경과 흠모의 정도가 더욱 가중이 되어 전선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북상병을 앓기 시작했다”고 했다. 북상병은 북부 지방의 전선으로 가고자 하는 열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 1지대와 2지대가 1940년 여름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병력을 뤼양(洛陽)에 집결시킨 다음, 1941년 봄부터 여름 사이에 황하를 건너 4개 그룹으로 나누어 충칭에서 멀리 떨어지고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전방 총사령부가 있는 타이항산(太行山)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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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통신
 

김원봉은 충칭에 남았다. 그가 조선의용대 주력과 함께 북쪽의 전선으로 함께 가지 않은 것에는 중국 공산당의 공작도 작용했다. 당시 충칭 중국 공산당 판사처의 책임자로 주재하고 있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김원봉의 북상을 말렸다. 그 이면에는 조선의용대와 김원봉 사이를 떼어 놓아 그를 배제시키고 중국 공산당이 직접 조선의용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그를 떠남으로써 김원봉의 지도력은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그가 잔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수백 명의 망명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칭에서 김원봉은 그를 따르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과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다. ‘뜨거운 사람’ 김원봉은 이를 위해 맹렬하게 움직였다. 그 때문에 김원봉은 김구 등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매사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각인됐다.

임시정부 측은 김구 주석과 송병조, 박찬익 등이 먼저 충칭에 도착하여 화평로 오사야항 1호의 9칸짜리 2층집에 임시정부 ‘청사’라는 이음의 사무실을 정했다. 기강에 남아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을 데려 오기 위해 박찬익이 주선하여 중국진재위원회(中國振災委員會)와 교섭해 6만 원(元)의 지원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충칭 외곽 토교(土橋)라는 곳에 대지를 얻어 주택 3동을 지어 기강의 가족들을 이사시키고 동네 이름을 신한촌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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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타이치(郭泰祺). 중국의 외교관,
외무부장관, 유엔대표
 


김원봉이 이 정보를 들었다. 임시정부의 증인 중 한 사람인 민필호의 기록에 의하면 김원봉은 이 소식을 듣자 급히 중국진재위원회에 가서 “한국 독립당에는 6만 원이나 주면서 왜 우리 당(민족혁명당)에는 한 푼도 안주느냐”고 항의하고, 김구와 박찬익을 찾아가 진재위원회 자금을 반씩 나누기를 요구했다. 김구와 박찬익은 김원봉의 요구를 괘심하게 생각했지만, 이 일로 외국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외국 사람에게까지 창피하고 미안하여 6만원에서 인구비례로 1만 5000원을 김원봉에게 주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은 해방의 그날까지 임시정부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 큰 숙제였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있던 중국 또한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던 까닭에 미국의 눈치를 보며 임시정부 승인을 하지 않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호전되었고 임시정부를 승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미국의 이승만이 워싱턴 주재 중국 외교관 궈타이치(郭泰祺, 1888~1952, 1941년 중국 외무부장관이 됨)와 의논하여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에게 편지를 보냈다. “충칭에서도 임시정부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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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1941년 2월 25일자로 보낸 편지
 


중국 정부는 이때 “한국 임시정부에는 노인들만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한국청년들의 동향을 알아보도록 중국 고시원장 짜이찌타오(載季陶, 傳賢, 1891-1949)를 보내 만나보게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엄항섭, 이범석, 김의한, 김관오, 나태섭 등 청년 그룹이 짜이찌타오를 만나게 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호응과 광복군의 활동, 임시정부의 현황, 한국 청년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옹호와 활동을 설명하였다. 이에 짜이(載)는 만족했고, 그후 중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암시를 받게 되었다. 민필호는 그 이전에 장인이기도 한 신규식 선생을 모시고 광동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 쑨원(孫文) 대통령을 방문하여 상해 임시정부 승인을 받았던 일에 직접 참여했던지라, 그 경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중한외교사화>를 저술하고, 소책자 형태로 5000부를 인쇄하여 중국 조야 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이 정보를 탐지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승인을 방해하기 위해 사천성 성도(省都) 청두(成都)에서 발행하는 <화서일보(華西日報)>에 “임정은 한국독립당의 정부요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충칭에 있는 교민들도 승인하지 않으며, 불과 몇몇 노인들의 양로기구밖에 안 된다”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이 미국 정보기관을 통해 미 본국에 보고되어 미국의 임정승인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주자화(朱家驊)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김원봉을 불러 “너는 역적 이완용과 같은 놈”이라고 크게 책망하였다.(민필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나>, 김준엽, <석린 민필호전>, 나남출판, 1995, pp. 98-99) 김원봉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은 전당대회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5월 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이 제1지대장을 겸하게 되었다.

1943년 10월에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으며, 1944년 5월에는 김원봉이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군과 의회, 정부에 모두 참여하여 좌우합작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김원봉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야당이었고 소수파였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놓고도 김구 측과 대립하며 자파 세력을 확대하고, 김구의 지도력을 무너뜨리고자 여러 수단을 쓰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 좌우합작 정부의 성립과 의회와 정부에서의 일정 지분의 확보에는 김원봉이 중국 측을 통해 임시정부에 가한 압력이 상당히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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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중앙) 판공실장 시절 민필호(우)와 비서 김은충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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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사진에 대한 임시의정원 제34회 의원 일동(1942. 10. 25) 사진 속 인물표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김구 주석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요청으로 제2지대 훈련반 졸업식에 훈화를 하기 위해 시안(西安)에 가고 없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 각원들이 하루바삐 귀국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는 “김구 주석은 무능하고 독립당은 무력하여 우리가 본국에 돌아갈 희망이 없으니 임시의회를 소집하여 주석을 갈고 정부를 개조해서 중국이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 속히 귀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김구 주석을 갈고 당신을 주석으로 추대할 테니 빨리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하여 김구 주석을 파면시키고 정부를 개조하여 귀국하자”고 하면서 임시의회를 소집하게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민필호는 김구 주석에게 전보하여 이 상황을 알리고 빨리 충칭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가능한 한 회의를 저지시킬 방책을 세웠다. 임시의정원 회의는 열렸으나 논의는 지지부진하였고, 그런 가운데 김구 주석이 시안에서 돌아왔다. 김구 주석은 민필호의 조언을 듣고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귀국과 관련된 중국 당국과의 협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그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것이니 조급히 굴지 말고 나를 믿으면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취지를 힘 있게 말하여 회의를 무사히 폐회시켰다.
충칭시기 김원봉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이처
럼 첨예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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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통합을 이룬 제34회 임시의정원 희원 일동 기념사진(1942. 10, 앞줄 오른쪽 끝이 김원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