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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남단

보루 흔적 완연

신라 진흥왕이 빼앗아 단양적성비 세워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태교,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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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4 죽령의 신화 적성
 

붉은 새, 삼족오가 지킨 ‘적성’인가
동쪽 국토의 끝에 위치한 신라가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개척한 길은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이었다. 두 고개가 모두 충북 땅이다. 죽령은 지금의 충북 단양 대강면 용부원리이고 조령은 충주 상모면 하늘재다. 단양은 경상도 풍기와 접하고 충주는 문경과 접한다.

신라는 일찍이 2세기 중반에 서둘러 죽령을 개척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158)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다.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2세기 중반이면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지 못하고 주변에 여러 소국들과 각축하던 시기다. 그런데도 신라는 죽령, 조령을 개척했다. 이 고개의 중요성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죽령은 소백산맥(小白山脈)의 도솔봉(兜率峰,1314 )과 제2 연화봉(1357 )사이에 위치한 중요 교통로로 해발 689 의 고개다. 지금은 5번 국도,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인 중앙고속도가 죽령터널로 뚫려있다.

그런데 신라는 5세기 고구려의 남방공략으로 죽령을 잃게 된다. 장수왕~문자왕 대 충주지역인 국원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고구려는 파죽지세로 죽령까지 영역을 넓히며 신라국경을 넘본 것이다. 죽령과 인접한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에 소재한 적성(赤城)은 죽령을 지켰던 고구려의 거점이 된다.

고구려는 왜 적성이라고 부른 것일까. 이 이름 속에 고구려의 비밀이 숨겨진 것은 아닐까. ‘적(赤)’은 빨강색이다. 글자를 풀이하면 대(大)와 불(火)을 조합한 것으로 바로 태양을 상징한다. 중국의 한자자전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보면 적(赤)은 ‘남방의 색이다’라고 했다. 회남자(淮男子) 천문훈은 하늘의 오성을 설명하면서 ‘남방은 불이며, 그 왕은 염제(炎帝) … 그 짐승은 주조(朱鳥)’라고 했다.

이 기록을 봐도 ‘赤’은 태양을 상징하며 그 안에 사는 짐승을 주조(朱鳥)라고 한 것이다. 주조는 바로 태양에 산다는 전설의 새 삼족오(三足烏)가 되는 것이다. 붉은 색은 고구려인이 사랑한 색이며 삼족오는 천제의 아들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앰블럼이다. 고구려인들은 이곳을 통해 한반도 최남단 소백산 주요 교통로를 장악・경영하려 했던 강력한 의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죽령을 신라로부터 지키려 했던 고구려. 그러나 신라는 진흥왕 대 군사력을 총 동원하여 이 길을 다시 찾으면서 운명은 반전된다. 7세기 초반 고구려 영양왕은 사위 온달과 평강공주를 출전시켜 이 일대의 실지회복에 나섰지만 끝내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은 고구려가 100여 년을 점거하면서 신라와 대치했던 남단 보루 적성을 여행해 본다. 과연 여기에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을까. 적성에서 발견된 국보 신라 척경비 1978년 1월 8일 필자는 단국대 정영호 박사가 내려와 조사 중인 단양을 찾았다. 정 박사는 약 5일간 일정으로 단양지역의 고적을 조사중이었다. 당시는 비포장길이어서 청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교통편도 좋지 않을 때였다. 저녁나절이 돼서야 필자는 단국대 조사단이 있는 구 단양 여인숙(지금은 수몰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여인숙에 도착했을 때 정 박사와 단국대학 고 차문섭 박사 그리고 고 이종석 중앙일보 문화부장(나중에 호암미술관장)이 나를 반겨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내일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정 박사도 매우 중요한 것이 찾아졌다고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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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대동여지도에 나온 죽령과 단양 연결 옛길
 

아침 9시 쯤 조사단은 적성을 올라갔다. 1월이라고 해도 날씨는 따뜻했으며 백설이 군데 군데 쌓인 적성은 매우 질척거렸다. 등산화에는 흙이 많이 묻었다. 산성 중턱쯤 올랐을 때 나뭇가지로 가려 놓은 널찍한 암반을 볼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멈춰선 정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평평한 암반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각자되어 있었다. 정 박사는 상기된 얼굴로 “이 비석은 신라 진흥왕 척경비 즉 순수비”라고 말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그제야 파안 대소하며 또 하나의 국보급 진흥왕 순수비가 찾아진 것이라고 거들었다.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정 박사는 글자를 짚어가며 비문에 대한 해석을 해 주었다. 신라 진흥왕 대 적성을 탈환하면서 기념으로 이 비를 세운 것이며 당시 전쟁에 나섰던 신라 장군 이사부, 무력들의 이름이 나온다고 했다.

국보 제198호 단양적성비가 찾아지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수년 동안 충북산하를 답사하며 고생한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사의 큰 업적이었다. 당시 이 조사에 참여했던 젊은 학생들이었던 조사단 장준식, 박경식 씨는 이제 한국불교사학회 원로가 되었다. 장준식 교수는 충북문화재연구원장으로 박경식 교수는 단국대석주선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한학자 고 임창순 선생은 중앙일보에 비의 성격과 가치를 설명하면서 ‘정영호 박사의 위공(偉功)’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지금은 당시 비를 발견했던 정 박사는 물론 호탕하며 애주가였던 차문섭 박사, 유머가 많았던 이종석 부장도 모두 고인이 되었다. 40년이 넘은 세월이 되었으니 한 분 두 분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단양 적성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리운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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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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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적성비
 

조유전 박사(고고학자. 전 문화재연구소장)는 적성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단양 신라 적성비(이하 적성비)’의 발견 소식에 학계는 흥분했다. 그럴 만했다. 금석문(金石文)이란 당대 사람들이 직접 쇠(金)나 돌(石)에 새긴 글(文). 그러니 1차 사료로서의 가치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당대의 문화 및 사회상을 생생한 필치로 읽을 수 있으니…. 특히 후대의 자료일 수밖에 없는 역사서(삼국사기 등)를 보충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 2월 25일 김원룡·김석하·남풍현·이기백·임창순·변태섭·황수영·이희승·이병도·진홍섭·최순우·권오순·최영희·김정기·김동욱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총출동, 학술좌담회를 열었다. 금석학자인 임창순 당시 태동고전연구소장은 ‘비문은 가장 난해한 문장’이라면서 ‘향찰식(鄕札式)도, 한문식도 아니어서 해독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진흥왕이 이사부와 비차부, 무력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의 척경(拓境)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이차의 공을 표창했고, 후에도 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 정신의 최초의 표현이다(변태섭 당시 서울대교수). 즉 신라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 땅이던 적성(赤城, 단양)을 점령한 뒤, 즉 충청문화권에 진입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민심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신라의 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라는 것이다(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008. 9.19 경향신문).”

단양적성비는 현존 높이 93 , 폭 1 7㎝의 크기로 원반 모양의 화강암에 글을 새긴 것이 다. 전체 22행, 각행 20자로 전체 450자 내외의 글자 중 288자가 판독 되고 있다.

지금까지 학계가 판독한 적성비문은 다음과 같다.

□ □ □ □ □ □ □ □ □ □ □ □ □ □ □ □
□ 阿 城 □ □ □ 1
□ □ □ □ □ □ □ □ □ □ □ □ □ □ □ □
□ 干 在 □ □ □ 2
□ □ □ □ □ □ □ □ □ □ □ □ □ □ □ □
□ 支 軍 □ □ □ 3
□ □ □ □ □ □ □ □ □ □ □ □ □ □ □ □
喙 鄒 主 夫 □ □ 4
□ □ □ □ □ □ □ □ □ □ □ □ □ □ □ 中
部 文 等 智 豆 月 5
□ □ □ □ □ □ □ 合 弗 □ □ □ □ □ □ 作
助 村 喙 大   中 6
□ □ □ □ □ □ 懷 五 兮 □ □ □ □ □ □ 善
黑 幢 部 阿 智 王 7
□ □ □ □ □ 兄 懃 人 女 □ □ □ □ □ □ 庸
夫 主 比 干   敎 8
智 □ □ □ □ 弟 力 之 道 使 □ □ □ □ □ 懷
智 沙 次 支   事 9
大 人 人 勿 部 耶 使 別 豆 法 子 異 者 公 □ 懃
及 喙 夫 內 干 大 10
烏 石 勿 思 奈 如 人 敎 只 赤 刀 葉 更 兄 □ 力
干 部 智   支 衆 11
之 書 支 伐 弗 此 事 自 又 城 只 耶 赤 鄒 許 使
支   阿 夫 喙 等 12
立 次 城 耽 白 若 此 悅 佃 小 國 城 文 利 死 節
設 干 智 部 喙 13
人 阿 幢   者 其 後 利 舍 女 法 烟 村 之 人 敎
智 支 大 西 部 14
非 尺 主 失 大 生 國   法 烏 中 去   四 是 事
及 沙 阿 夫 伊 15
今 書 使 利 人 子 中 小 爲   分 使   年 以 赤
干 喙 干 叱 史 16
皆 人 人 大 耶 女 如 子 之 兮   之 婁 小 後 城
支 部 支 智 夫 17
里 喙 那 舍 小 子 也 刀 別 撰 雖 後 下 女 其 也
勿 武 高 大 智 18
村 部 利 鄒 人 年   羅 官 干 然 者 干 師 妻  
思 力 頭 阿 伊 19
村 文 耶 少 次 兮 賜 支 伊 公 支 文 三 次 伐 智
林 干 干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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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적성에서 발견한 와편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豆□智) 피진간지(□□干支),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부지(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군주(軍主)들인 훼부(喙部) 출신의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 사훼부(沙喙部)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 당주(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이때에 적성(赤城) 출신의 야이차(也□次)에게 교(敎)하시기를 중에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을 쓰다가 죽게 되었으므로, 이 까닭으로 이후 그의 처(妻)인 삼(三)에게는 이(利)를 허(許)하였다. 사년(四年) 소녀(小女), 사문(思文) 공형(公兄)인 추문촌(鄒文村) 출신의 파진루(巴□婁) 하간지(下干支) 전(前) 자(者)는 다시 적성연(赤城烟)으로 가게 하고 후자(後者) 공형(公兄)은 이엽(異葉)이건 국법(國法)에는 분여(分與)하지만 비록 그러하나 이(伊) 자(子),도지(刀只) 소녀(小女) 오례혜(烏□兮) 찬간지(撰干支) 법(法)을 적성연사법(赤城佃舍法)으로 만들었다.

별도로 관(官)은 불혜(弗兮) 여(女), 도두지우 열리파(道豆只又悅利巴) 소자(小子), 도나혜(刀羅兮) 합하여 5인에게 내렸다. 별도로 교(敎)하기를 이후로부터 나라 가운데에 야이차(也□次)와 같이 옳은 일을 하여 힘을 쓰고 남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면 만약 그가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나이가 적건 형제이건 이와 같이 아뢰는 자가 대인(大人)인가 소인(小人)인가 부(部) 출신의 나불탐사실리(奈弗耽□失利) 대사(大舍), 추문(鄒文)[촌(村)] 물사벌성당주사인(勿思伐城幢主使人)은 니리촌(那利村) 인(人)은 물지차(勿支次) 아척(阿尺), 서인(書人)은 탁부(喙部) 출신의 인(人), 석서립인(石書立人)은 비금개리촌(非今皆里村)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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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적성비
 


신라의 적성 공략에 참여한 장군들은 경주 귀족세력과 가야 망명세력인 무력(武力) 등이었다. 문헌이 아닌 금석문에서 신라 장군 무력(武力)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적성비가 유일하다. 무력은 진흥왕대 중용되어 적성을 장악하고 충주를 공략하였으며 한강을 점령하여 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무력이 등장하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본기 4 진흥왕조>에 ‘5년 가을 7월…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伽耶)과 더불어 관산성을 공격하므로,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마주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자,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교전함에 이르러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이었다. 이에 제군이 승기를 잡고 크게 쳐 이기고, 좌평 4인과 사졸 2만 9600인을 베어 죽이니 말 한 필도 살아돌아간 것이 없었다(十五年秋七月…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 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 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諸軍乘勝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 百人 匹馬無反者).’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1 김유신조>에는 ‘김유신은 왕경 사람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4인을 잡고,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祖武力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 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여기에 나오는 인물 이사부(異斯夫)는 어떤 인물일까. <삼국사기>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 내물왕 4대손으로 지증왕, 진흥왕 때 군주·병부령 등을 지냈으며 신라 영토를 확장의 일등 공신이다. 이사부는 지증왕 6년 하슬라주(현재의 강릉)의 군주로 임명된 7년 후인 지증왕 13년(512)에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그는 우산국 해안까지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가서 우산국 사람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모두 죽게 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순순히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이사부는 진흥왕 2년(541)에는 신라의 관직 중 2번째 등급인 이찬이 되었고, 545년에는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사부는 군직은 물론 내정에도 크게 기여한 특출했던 인물이었다.

무력과 이사부 등 당대 제일의 무장들이 총 출동하다시피 하여 적성의 전역을 친 것은 이 성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도 이 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완강히 저항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두 성이 점령되자 진흥왕은 교서를 발표하고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적성비를 세운 것이다.

고구려 테메식 산성 ‘적성’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보면 ‘적산현 본 고구려현 경덕왕인지 금단산현(赤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丹山縣)’이라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양군의 건치 연혁조>를 보면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인데 혹은 적성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내제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本高句麗赤山縣一云 赤城 新羅時 爲奈堤郡領縣云云)’고 나와 있다.

또 이와는 별개로 ‘죽령현 본고구려 죽현현 경덕왕 개명 금 미상(竹嶺縣 本高句麗縣 景德王改名 今 未詳)’이라 나와 죽령에도 고구려현을 두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죽령현의 소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적성에 대한 <여지승람>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둘레가 1768척이고 안에는 큰 우물 1개소가 있는데 지금은 폐해졌다’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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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사지에서 출토된 적색 고구려 와편
 

<조선고적조사자료(朝鮮古蹟調査資料)>에는 주민들이 민보성(民堡城), 농성(農城)이라 불렀다고 전한다고 돼있다. 적성 조사 보고서를 보면 ‘적성은 해발 323.7 되는 성재의 정상부를 에워싼 마안형(馬鞍形)에 가까운 테메식산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벽 길이는 922 로 크지 않으며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으나 부분적으로 축성수법을 살필 수 있는 곳이 남아 있다. 전체 성벽은 기초부를 토석(土石)으로 다진 후 외벽을 정연히 석축했다. 내측에는 잡석과 흙을 채운 다음, 어느 정도 높이에서 내외벽을 모두 석축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축성에 이용된 돌은 주변에서 많이 찾을 수 있는 석회암과 화강암이다. 성벽 가운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곳은 북동 벽이다. 높이는 바깥높이(外高) 4 , 안쪽높이(內高) 3 정도이며, 서벽은 성벽의 폭이 6.4 나 된다. 석축은 현재 12~13단의 층급에 높이 2.3 를 나타내고 있다. 남서벽은 3단의 석축 위에 체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체성의 폭은 6.3 이고 성벽의 높이는 4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 하부에서 확인된 보축시설은 1.3~1.4 의 높이로 2단으로구축되었는데 각 단마다 성석을 7~9켜씩 축조하였다. 따라서 기단보축부를 포함한 성벽의 높이는 6.5 이상으로 산출된다. 성문지(城門址)는 3개소가 있으나 모두 무너져서 그 크기나 형태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물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건물지 또한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은 없다’고 되어 있다.

6월 초 30도를 넘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글마루 취재반은 적성을 답사했다. 해가 구름 속에 숨었어도 땀이 온몸을 다 적신다. 한눈에 수몰된 단양 구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적성은 많이 보수되었으며 일부 구간은 장대하게 보축했다.

답사하는 과정에서 적성비 부근 공터에서 고구려 적색 기와가 수집되었다. 신라 기와토기들도 산견된다. 과거에는 이 기와들이 화적을 맞은 신라기와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기와들은 대부분 평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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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사지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죽령고개 호국유적 보국사 터의 비밀
보국사(輔國寺) 터라고 불린다. 이 절터는 죽령 고개마루에 있다. 마을 이름은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다. 필자는 40여 년 전에 이 절터를 조사한바 있다. 당시 이 절터에 있던 석조 장륙불(丈六佛)은 쓰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세워져 있다. 4 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조각 수법이 예사스럽지 않다.

일반적으로 장육상이란 사람 키 크기인 8척의 배수, 즉 16척의 불상을 지칭한다. 기록에 보이는 신라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였던 경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유명하다.

그런데 이 석불은 목이 잘려 나갔다. 얼굴이 없어 상호를 알 수 없다. 가슴의 무늬도 마모가 되어 파악할 수 없다. 옷의 문양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두드러지며 양쪽 무릎까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루고 있다. 끝부분에서 뾰족하게 마무리되었는데 이는 북위(北魏) 석불에도 나타나는 양식으로 통일신라 금동불상의 양식에도 계승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금동여래상을 최근 조사한 적이 있는데 통불주조(通佛鑄造) 방식으로 장육상의 모습을 닮고 있다. 이 금동불도 삼국시대 신라 불상으로 해석된다.

보국사 터에서는 장육불 조성시의 부재인 석조 유물들이 산견된다. 불상 주변으로 원형 돌기둥, 죽절문양 돌기둥, 연화문 좌대 기둥머리돌(柱頭石), 옥개형(屋蓋形) 석재 등이 산재해 있다. 보국사를 석굴사원의 유형으로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불상을 조성할 당시 보호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되며 주변에서는 많은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혹 고구려 적색 기와조각은 없는 것일까. 취재반은 열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글마루 취재반은 기와 더미 속에서 사격자문이 선명한 고구려 와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사찰의 초축은 고구려 영역이던 5세기 후반이며 신라가 뺏은 후에는 대대적 신라가람으로 조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거대한 장륙상을 세워 다시는 고구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신라인의 염원을 이 불상은 말해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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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경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