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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忽’이란

고구려 명문와편 발견


고구려의 남하 거점 백제성 뺏아 완벽하게 보축
포천 청성산 ‛반월성’을 가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태교,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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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난 1979년도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탑평리(현 충주시) 입석마을에서 고비(古碑)가 발견됐다. 충주지역에서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보호운동을 벌여온 예성동호회 회원들이 찾은 비석이었다. 이 비석은 우물가에서 빨래판으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예성동회회원들이 전면에 나타난 글씨를 확인한 것이었다.

당시 이 조사에 참가했던 장준식(충북도문화재연구원장) 박사는 모교 은사인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물관장에게 비 발견 소식을 전하고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며칠 후 정 박사는 조사단원을 데리고 현장에 도착했다. 정 박사는 평소 충청북도 지역에 대한 조사를 열심히 해온 분으로 서둘러 내려온 것이다. 정 박사는 이보다 한 해 전인 1978년 이른 봄 단양군에서 진흥왕 척경비인 적성비를 찾아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바 있다. 입석마을에서 고비를 보는 순간 정 박사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고졸한 예서로 쓰인 비문은 쉽게 판독이 되지 않았지만 한눈에 고대 비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장 보존조치를 한 정 박사는 며칠 후 국내 금석, 역사학회를 대표할 조사단을 구성, 현장에 내려왔다. 이때 필자도 취재기자로 현장을 찾았다. 서지학계를 대표하는 고 임창순 선생과 저명한 고대사연구 석학 분들이 팀을 이뤘다. 이들은 고비를 탁본하여 글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몇 시간 토론 끝에 고비에 나타나는 고려왕과 신라 매금, 전부대사자 등 고구려식 관직과 지명을 확인하여 역사적인 발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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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
 
"고구려 문자왕
신라 척경비입니다."

놀라운 발표였다. 현장에 있던 언론사 기자들은 본사로 급히 송고하기에 바빴다. 만주 지안에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비가 남한강변 중원가금면에서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왜 고구려비가 이 마을에 세워진 것일까.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충주는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미을성(未乙省 혹은 未訖城)으로 기록되고 있다. 충주가 남방 공략의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 비석이 발견된 인근에는 탑평리 절터가 있다. 이 절터에서도 1970년대 후반 정영호 박사가 붉은 색의 연화문와당을 발견, 고구려 절터로 해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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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의 비문
 


고구려비는 그 후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장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게 되었다. 이비의 발견으로 남한 지역에서의 고구려유적조사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필자도 정영호 박사와 함께 약 20년간 여러 성을 답사했다. 주로 충북도 내 유적을 찾아 나섰다. 제천 장락사지, 청주 비중리사지, 구녀성, 천안 고려산성, 음성 망이산성, 괴산 청천도원리 사지, 금강 개소문 산성 등 이곳에서 고구려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 박사는 2017년 4월 갑자기 고인이되고 말았다.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전국을 찾아 문화유적을 조사하고 평가하던 열정은 아쉽게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적성비 발견후 고 임창순 선생은 중앙일보 기고 글에 ‘정영호 박사의 위공(偉功)’이란 표현을 쓴바 있다. 몸소 발로 뛰어 많은 유적을 찾은 공은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기 부족함이 없었다. 전국 자치 단체에서 향토사에 대한 붐을 일으키고, 왕도 중심이 아닌 변방의 유적 중요성을 일깨운 분이다. 3년 전 필자는 강원도 양구 비봉산에서 고구려 지명을 알려주는 요은홀차(要隱忽次) 명문와편을 찾았다. 요은홀차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윤노성(閏奴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아! 여기에서도 고구려 역사와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유적을 찾는 데 가장 기초적인 것은 기와 조각이었다. 고구려 기와는 다른 나라 유물보다 특별하다. 우선 붉은 색을 띠고 있으며 기와등 무늬도 다양하다. 백제, 신라 기와가 단조로운 데 비해 고구려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무늬를 찍어냈다. 지금은 중국 땅인 고구려 국내성, 오녀성, 평양성 유적에서 찾아지는 무늬의 평와편이 남한지역 여러 곳에서 다수 발견되는 것이다. 학계의 남한지역 고구려유적 발굴 조사는 서울 지역과 임진강, 남한강 유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유적이 아차산성, 연천 고모루성 등이다. 이 곳에서도 다수의 고구려 식 와편이 찾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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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 안 전경


 
이제 역사의 그늘에 묻혀 알아볼 수 없었던 고구려 유적을 찾아본다. 남한지역에서 지금까지 필자가 확인한 것은 약 30군데에 이른다. 제일 먼저 답사지로 선택한 것은 포천시 청성산에 있는 반월성(마홀성)이다. 이 성에서 고구려 와당인 ‘마홀(馬忽)’이란 명문이 찾아졌으며 고식의 백제성을 보축하여 고구려식의 방어 구조를 구축한 가장 주목되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마홀이란 지명의 역사적 비밀
<삼국사기> 권35 잡지에 포천의 지명이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이었는데 경덕왕 16년(757)에 이름을 고쳐 견성군(堅城郡)이라 하였다(堅城郡 本 高句麗 馬忽郡. 景德王 改名 今 抱州)’.‘마홀’은 큰 성이란 뜻이다. 이 지명은 만주일대에서 곧잘 확인되는 지명이다. 언어학자들
의 견해를 빌리면 고구려말로 성, 읍, 동을 홀(忽; Khor), 골(Kor), 구루(溝婁; Kuru)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순 우리말인 ‘골’ ‘고을’과통하는 말이다. 고구려의 국호인 ‘구려’ 역시 ‘최고의 고을, 최고의 골짜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일부 어문학자들은 마홀이 ‘물골’을 음차한 것으로 ‘물이 많은 골짜기’ ‘물이 많은 고을’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포천에는 다수의 하천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포천의 독특한 지형과 경관을 형성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포천시는 분지 지형으로 주위에 높은 산지가 옹립되어 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물길을 모으고 있다. 고대 물길은 중요 교통로이며 군대의 진주 이동에 가장 필수적이다. 물길을 따라 군대가 옮겨가고 물길을 확보하기 위해 성을 구축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남방 공략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즉위와 더불어 단행되었다. 막강한 기병 수만 명이 주축인 고구려군은 파죽지세로 임진, 북한강변을 장악했다. 이 정벌전쟁에서 백제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이 고구려 지배 하에 들어갔다.

광개토왕의 남진 명분은 왜의 침공을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왜(倭)의 침공에 국가적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지원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왕은 수군과 기병 5만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 시기 포천의 반월성(청성산성)과 고모리 산성도 고구려 지배 하에 들어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반월성을 점령한 고구려군은 이 성의 이름을 ‘마홀’로 불렀다. 이 성을 중요시하게 된 것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백제·신라군을 제어할 수 있으며 북에서 대규모 군사들의 남하를 도울 수 있는 요충이기 때문이다. 또 인근에 위치한 대규모성인 고모리 산성(古毛里山城, 당초 백제 구축)에
서의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모리 산성은 백제 초기의 대성(大城)이다. 성지 연구가들은 성동리 산성(城東里山城)이나 고소성(姑蘇城) 등과 함께 고구려 군이 남양주(南楊州)를 거쳐 아차산성(阿且山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성하였을 것으로 상정한다. 반월성은 백제 초기에는 북방 세력 들을 막는 관방 역할을 했으나 고구려가 차지하고는 아단성(阿旦城)의 배후이며 백제 신라의 전진을 방어하는 성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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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에서 발견한 고구려 와편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못할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에 ‘비성군(臂城郡) 일운 마홀(一云 馬忽) 금 포천(今 抱川)’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비성’은 동국여지승람에 청주로 되어 있으며 김유신 장군의 고구려와 접전을 벌여 퇴치한 낭비성(娘臂城)으로 비정되어 온 것이다(<삼국사기> 권 제 41 열전 제1 김유신 상에 ...(전략)..王遣 伊湌任永里 波珍飡 龍春 白龍 蘇判 大人 舒玄等 率兵 攻 高句麗 娘臂城 云云). 일부 성지 전문가 사이에는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 군사를 대파한 낭비성 전투(629)를 청주가 아닌 포천의 마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는 향후 더 깊은 연구가 따라야 할
곳으로 사료된다.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와 강력함을 자랑했던 고구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한다. 주몽은 성은 고씨(高氏)이며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구려본기>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본래 백두산(압록강) 근처에 살던 부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유화는 이 부족을 이끌던 여촌장이었으며 부여 금와왕의 세력이 침공하자 주몽을 임신한 상태에서 인질이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주몽을 금와왕 아들들의 위해(危害)에 대비, 남쪽으로 피신시킨 데서 알 수 있다.

주몽은 졸본(卒本)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BC 37년 비류수(沸流水) 위에 궁전을 신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 주몽은 BC 36년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BC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이어 BC 28년에는 북옥저를 병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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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포천 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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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지에서 출토된 백제수막새와 암막새
 


부여국을 탈출한 주몽이 갑자기 급속히 강대해진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그것은 압록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부족과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니고 있던 말갈을 복속시켰기 때문이다. 천변이나 들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말 갈족은 말을 잘 타며 용맹이 있었다. 주몽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철기를 구입, 무장시킨 것이다. 중국기록에 말갈을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고 한 것은 같은 부류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초 수천 명이었던 고구려 기병이 1만~3만명으로 늘어난 것은 이에 합류한 말갈족들이 늘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말갈은 고구려를 부모의 나라 혹은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멸망 때까지 충성스러움과 군사적 응원을 다했다. 말갈의 후손들인 여진은 만주지역에 혼거하면서 고려 후기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 왔다. 그리고 개경을 찾아가 신민으로 삼아줄 것을 간청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광개토대왕 시기 군사력은 기병만 5만 명에 이르렀다. 대왕은 서쪽으로 후연을 제압하여 요동을 장악했고, 동부여를 정복하여 남만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파죽지세로 백제와 신라를 공벌하여 제후국으로 삼은 것이며 후에 문자왕의 중원 고구려비로 남게 된 것이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본격적인 남진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중부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숙원관계인 백제가 북위(北魏)에 상응하여 모함하고 조롱하자
직접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남하, 위례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한다. 한성공격이 용이했던 것은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포천 마홀 행로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군은 평소 전방에 말갈군을 앞세워 전쟁했다. 지배민족은 항상 피지배민족을 앞세워 다른 국가의 군사력을 공격했다. 신라가 용감한 망명 가야 군사력을 앞세워 한강변을 공략한 것과 비슷하다. 말갈은 어떤 부족이었을까. <수서(隋書)>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라는 7부의 말갈이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라 그들의 주거 범위를 짐작해 보면, 속말부는 쑹화강(松花江) 상류지역, 백돌부는 지린성(吉林省) 부여현(扶餘縣) 일대, 안거골부는 아십하(阿什河) 유역, 불녈부는 무단강(牡丹江) 유역과 닝안현(寧安縣) 일대, 호실부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이란현(依蘭縣)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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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 명나라를 정복하여 청(淸)을 세웠다. ‘淸’ 이라는 한자의 음독은 ‘맑을 청’이다. 말갈을 ‘ᄆᆞᆰ다’는 뜻의 ‘淸’자를 차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말갈의 후손들인 금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 셈이다. 포천을 점령, 상주한 고구려군사의 주력은 말갈군사력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들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으며 장수왕대는 백제 위례성을 공격하는 전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연한 고구려식 성지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에는 ‘고성 반월산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37자(尺),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廢)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각종<지지(地誌)>에는 고성(古城), 산성(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반월성은 고구려 마홀로 바뀌기 전 혹 백제에서 붙인 이름인가. 성의 구조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전체 길이는 1080 나 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성곽이다. 자연 지세를 이용하였으며 정상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넓은 공터가 있고 위쪽에는 약 661㎡(200여 평)의 분지(盆地)가 있다. 그런데 완연한 것은 백제의 초축(판축성) 위에 완전 고구려식의 석성을 구축한 사례이다. 백제시기 추축한 형태는 성의 남쪽 부분에 완전하게 남아 있다. 작은 할석을 흙과 섞어 단단하게 다진 것으로 서문지 치성과 연결시켰다. 이 판축의 유구는 청성역사공원에서 올라가는 둘레길 일부에서도 확인된다. 완
전한 백제식 성의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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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중국 지안 국내성 왕궁 유적에서 출토된 고구려 용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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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에서 출토된 마홀수해공수단 명문와편
 

지난 1995년 발굴조사 때 문지 2개소, 치성 4개소, 건물지 6개소, 우물지, 수구지, 장대지, 망대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당시 수습된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고 적힌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현재 포천시 문화원에 전시되고 있다. 정서(正書)로 고졸한 해서체로 찍은 기와는 회흑색이다. 이 명문으로 이 성의 주인이 고구려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성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성곽구조인 ‘치성(雉城)’이다. 꿩이 몸을 웅크리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치성’이라고 불리며 고구려성지에서 많이 확인되는 형태다. 작은 규모의 오녀산성을 보는 기분이다. 치성의 밑돌들은 장방형으로 흡사 옥수수알갱이처럼 치석한 것으로 왕도인 지안 국내성처럼 들여쌓기로 축성했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치성은 남치성, 서치성, 북서치성, 동치성 등 모두 네 곳이 확인되었다고 되어 있다. 남치성은 남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규모는 길이 13.9 , 너비 8.8 , 현존 최고 높이 5 이다. 서치성은 서벽의 중간지점에 있으며, 길이 14.3 , 너비 4.6 이다. 북서치성은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회절부에 위치하며, 길이 9.2 , 너비 4.5 , 현존 높이 2.9 이다. 동치성은 동벽이 남쪽으로 꺾이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 6.6 , 너비 5.9 , 현존 높이 4.5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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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 애기당지
 

건물지는 헬기장 주변과 망대지 뒤쪽, 현재 성안으로 진입하는 출입구 부분 등 여섯 곳에 걸쳐 확인되었다. 이 중 서쪽에 있는 건물지가 가장 주목되고 있다. 반월산성에서는 기와 및 토기조각 외에도 석기류와 철기류 등 귀중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무문토기편에서부터, 백제토기로 추정되는 원저호들과 통일신라대의 완과 대부완, 단경호류 등 긴 시간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외의 유물로는 철제 초두(鐎斗)와 철낫, 철제도끼, 철촉(鐵鏃) 등이 있다.

글마루 취재반은 성안에서 다량의 고구려계 와편을 찾았다. 그것은 적색을 띤 기와로 격자문, 사격자문, 승문(繩文) 등 다양했다. 만주 지안 국내성을 비롯해 오녀산성, 환도산성, 양구 비봉산성, 연천 고모루성, 아차성 등에서 수습된 평기와 무늬를 그대로 닮고 있다. 고구려 기와는 백제, 신라 기와에 비해 독특하다. 막새 와당 문양도 유약하지 않고 날카롭다. 그것은 대륙을 지배했던 강인한 정신을 드러낸다.

필자가 그동안 조사해온 만주 지안 국내성을 위시 평양지역에서 찾아진 고구려 기와는 대부분 적색을 띠고 있으며 용문과 연화문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혹 마홀성에서도 이 같은 와당의 출현이 가능할까. 기와편이 발견되는 곳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리고 서문지 입구 건물지에서 백제, 고구려 기와가 산란한 현장을 확인했다. 이 속에서 백제 소형의 무문 소형 막새를 수습했다. 무늬가 없는 이 막새편은 마홀성 초축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선문대(斜線紋帶)가 시문된 암막새로 보이는 기와 조각도 확인했다. 이 같이 백제 고구려기와의 뒤엉킨 모양은이 성을 들러 싼 두 나라 쟁패의 역사를 입증하는 것 같다.

취재반은 산 정상에서 ‘애기당지’라는 방형의 석축구조물을 봤다. 이는 고구려 수도 지안에 남은 많은 고구려식 방형 고분의 모습을 닮아있다. 치석한 네모난 돌을 다듬어 2단의 층단을 이루게 한 석축은 혹 고구려 장수의 무덤은 아닐까. 그것이 후에 무당들이 애기당지란 이름으로 붙여 산신에 제사지낸 것일지도 모른다. 마홀성은 가장 완연한 고구려 성지이지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비록 사적 403호로 지정되었지만 속설을 인용하여 궁예가 쌓았다고 기록한 안내판도 있다. 앞으로는 고구려 남방공략의 거점으로 가장 완벽하게 축성한 유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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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에서 보이는 포천시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