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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루 4주년 특집] 조선여인의 아들자랑 풍습

젖가슴 드러내는 것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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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문화잡지 월간 <글마루>가 창간 4주년을 맞아 100년 전 사진으로 보는 우리네 옛 풍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 다룰 내용은 ‘조선여인의
아들자랑’에 얽힌 사진으로 이 중 하나가 80년대에 공개됐다가 많은 논쟁을 낳기도 했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품이 작은 듯 짧은 저고리 밑으로 여인의 젖가슴이 드러나 있다. 조금은 민망할 수도 있는 모습이지만 사진에 담긴 여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어색함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당시 흔하지 않았던 카메라를 의식해서일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릴 만큼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민족이, 그것도 품행과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인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노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여인의 아들자랑’ 사진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사진이 공개될 당시 민속학자나 민속의상연구가 등은 “말도 안 되는 사진”이라며 “100년 전에는 저고리가 짧은 것이 유행했던터라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사진을 공개했던 정성길(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이 사진은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아들 낳은 것을 알리기 위해 젖가슴을 드러낸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가슴을 노출한 것이 민망하거나 수치스런 일이라는 편견 때문에 조선후기로부터 구한말을 거쳐 6·25전쟁 직후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생활상을 부정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어쩌면 더욱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일제는 이런 문화를 마치 미개한 것으로 왜곡하거나, 관광엽서로 만들어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용도로 악용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설혹 ‘아들자랑’ 풍습이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이 문화를 부정하는 것 자체는 자칫 일본의 주장에 수긍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풍습이라 하더라도, 당시에는 아들을 낳은 여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문화였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몇 장의 사진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아들자랑’을 하기 위해 일부러 젖가슴을 노출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 여인의 아들 자랑(1890)

1985년 7월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이 <백 년 전의 한국>이라는 사진전에 ‘조선여인의 아들자랑’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한 사진이다. 당시 이 사진이 공개된 후 “우리나라의 옛 여성들이 과연 이런 천한 모습으로 지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며, 외국인에 의한 풍속왜곡이라며 많은 이들이 분노를 나타냈다고 한다(1985년7월 3일자 한국일보 인용).

이 사진과 관련해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은 “결혼한 여자가 딸만 낳을 경우 젖가슴을 드러내지 않으나 아들을 낳을 경우 집안에서 아들을 키우는 명예로움으로 젖가슴을 내보이는 풍속이 있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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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자랑 확인

정 명예관장에 따르면, 이 사진은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 온 AP통신의 기자가 마을 봉사단으로 나갔다
가 아들을 자랑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들이 아들 낳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마냥, 아들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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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아들자랑
다듬이질하는 여인들에게서도 아들 자랑하는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여인들은 집 밖에서도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노출해, 아들 낳은 것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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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가슴 의도적 노출

참한 모습의 여인이 다림질하는 모습을 앞쪽과 옆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옆모습을 찍은 사진에서는 잘 보이
지 않지만, 앞쪽에서 보면 가슴을 의도적으로 노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에서는 여인의 아들 자랑하는 풍습 외에도 당시 다림질을 하기 위해 사용했던 숯불다리미를 볼 수
있다. 빨갛게 달군 숯불을 그릇처럼 생긴 다리미에 넣고 옷을 다리다보면 불티가 튀어 옷감이 상하거나 피부
에 닿아 상처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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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낳은 여인의 저고리
딸을 낳은 여인의 모습이다. 아들을 낳은 다른 여인들의 사진과는 달리 딸을 낳은 여인의 저고리는 잘 여며
져 있다. 이 여인의 저고리 역시 짧지만 가슴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아들을 낳은 여인과 딸을 낳은 여인의
복장을 유추해볼 수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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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자세 다른 복장

세 명의 연인이 비슷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다. 저마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모습이지만 두 여인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한 여인은 그렇지 않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민속학자나 민속의상연구가들은
저고리와 옷고름이 짧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가슴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지만, 같은 상황에
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이 사진을 통해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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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과 함께 젖가슴 노출

머리에 큰 광주리를 인 여성 역시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다. 손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반듯하게 서 있는 자세이기에 저고
리가 위로 딸려 올라간 모습은 아니다. 비록 저고리가 짧았다고 하지만 치마로도 충분히 가슴을 가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아들을 낳은 여성의 자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인 옆에 수줍은 듯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벌거벗은 아이의 모습까지 더해지면서 한 장의 사진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듯하다.
 
 

 
 
▲ ‘조선여인의 아들자랑’ 혹은 조선여인의 가슴 노출과 관련된 이야기는 캐나다의 선교사이자 의사로 1892년 6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한국에서 체류하며 제중원의 4대 원장,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올리버 R. 에이비슨(Oliver R. Avison, 1860년 6월 30일 ~ 1956년 8월 29일)의 일기장에도 기록된 바 있다.

▲ 조선후기의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진 혜원 신윤복의 그림 <아기 업은 여인>에서도 젖먹이 아기를 등에 업은 여인의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이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항아리 같은 넓은 치마와 풍성한 가채를 얹은 모습이 기녀처럼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짧고 꼭 끼는 저고리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기녀로부터 여염집 여인까지 아들을 낳으면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기도 했다. 이는 또한 모성애의 상징이기도 했다.

▲ 19세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중 두 명의 여인이 절구질 하는 모습을 담은 <쌀 쓸난 모양>에서도 한 여성이 가슴을 드러낸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밭으로 점심 이고 가는 모양>이라는 그림에서도 가슴을 드러낸 여인(어머니)과 바지를 입지 않은 아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 아들을 낳은 여인이 자랑삼아 젖가슴을 드러냈던 풍속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