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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홍천강을

지킨 천혜의 요새

속칭 대미산성 석축에서

고구려 흔적 뚜렷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백은영,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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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강 홍천강
홍천강은 길이가 143㎞나 된다. 360여리 강원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물길이 수도 가까운 청평까지 닿고 있다. 이 때문에 홍천군의 면적이 전국 지자체 가운데 가장 으뜸이란다. 이 강은 서석면 생곡리에서 발원하여 군 중앙부를 동서쪽으로 흐르다가 수도권의 젖줄 청평호로 흘러드는 것이다.

강이 수려하여 시인묵객들이 앞을 다투어 노래했다. 이맹상(李孟常)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원주목사·전라도관찰사·충청도 관찰사·공조참의·호조참의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태종 때는 강릉판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홍천을 지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산과 물은 한 쌍의 족자를 이루었는데
(山水成双簇)
연기와 안개는 옛 이웃이라네
(烟嵐是四隣)


<동국통감>을 지은 문신 서거정은 <가학루기(駕鶴樓記, 여지승람 홍천 조)>에 홍천의 산수와 풍후한 인심을 적었다.

“홍천은 산과 물이 둘러 있고 깊고 궁벽한 곳이 있으면서 잘 다스려졌다. 백성들의 풍속은 순박하고 소송은 적어서 수령 노릇하는 즐거움이 있다. (중략) 그 읍내의 인가들이 그윽하고 깨끗하며 백성들의 재물이 부요하고 수목이 울창한 것을 기뻐하면서(하략)”

홍천강의 명칭은 본래 남천(南川)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8세기 읍지를 수집하여 편찬한 <여지도서>, 19세기 편찬된 <관동읍지>에는 홍천강을 ‘남천’으로 표기하였다. 조선 말 편찬한 <관동지>에는 화양강으로 나온다. 그러나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엔 홍천강이라고 했다. 주민들은 홍천읍을 중심으로 상류 지역은 화양강, 하류 지역은 홍천강이라고 불러왔다.

고대 전쟁은 강, 하천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렸다. 이를 확보해야만 군사들의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강, 하천 유역에 고대 성지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홍천강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쟁패하던 곳이다. 물줄기가 국토의 허리를 관통하기 때문에 쟁탈전이 치열하여 고대 성지가 유독 많이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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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홍천 속칭 대미산성(大彌山城)을 택했다. 이 산성은 그동안 신라산성으로만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성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정연한 석축, 치성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고구려 성곽 유적일 가능성이 큰 곳이다. 물론 신라가 고구려군을 몰아낸 이후에는 이 성을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성지의 규모위치 등으로 미루어 우선은 신라 10정의 하나였던 벌력천정지로 비정하고 있으나 조사하지 못한 성이 있어 결론은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 산성은 영월의 포천 반월성, 왕검성(정양산성), 단양 온달산성 등과 더불어 고구려 대규모 석축 성곽유적이다. 3월 초순, 대미산성과 본래 백제의 치소로 추정되는 오성산, 고색창연한 수타사 등 홍천의 대표적 유적지 답사를 떠나 본다.

홍천의 고구려 역사 ‘벌력천’
홍천의 고구려 때 지명은 벌력천현(伐力川縣)이다. <동국여지승람> 건치 연혁조에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녹효현(綠驍縣)으로 고쳐 삭주의 영현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고구려는 이곳을 ‘벌력천’이라고 했을까. 벌(伐)은 덕(德) 혹은 대(大)의 의미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대미산성(大彌山城)’도 크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고문에는 ‘伐(벌)’을 정복지 혹은 토벌한 지역으로 썼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돈발성(敦拔城)’을 홍천 ‘벌력천’으로 비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伐(벌)’을 ‘拔(발)’로 해석한 것이다. 중국 지안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고구려의 백제 점령성 가운데 돈발성(敦拔城)이 나온다.

“(전략) 영락(永樂) 6(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성, 각미성(閣彌城), 모로성(模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성(頁▨▨▨▨城), ▨이야라성(▨而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성, 두노성(豆奴城), 비▨▨리성(沸▨▨利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루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
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巖門▨城), 임성(林城), ▨▨▨▨▨▨▨리성(▨▨▨▨▨▨▨利城), 취추성(就鄒城),▨발성(▨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 穰城), 증▨성(曾▨城), ▨▨노성(▨▨盧城), 구천성(仇天城) 등을 공취(攻取)하고,그 수도를 … 하였다(하략).”

<대동여지도>에는 벌력천이 표기되어 있는데 홍천의 지천으로 나온다. 지금의 수타사 가는 도로 옆을 흐르는 덕지천을 지칭한 것이다. 덕지천이 에워싸듯 흐르는 하류에 나지막한 오성산이 자리 잡고 있다. 오성산은 백제의 성지였으나 고구려가 빼앗아 벌력천현의 치소로 삼은 것이 아니었을까.

신라는 벌력천현에서 고구려 군사들을 내쫓고 대규모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바로 10정의 하나를 이곳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벌력천정(伐力川停)은 신라십정(十停)의 하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0정이 544(진흥왕 5)년에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실제로 훨씬 늦은 시기인 677~687년경에 걸쳐 9주5소경(九州五小京)이라는 지방 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10정은 음리화정(音里火停)·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거사물정(居斯勿停)·삼량화정(參良火停)·소삼정(召參停)·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內斤停)·벌력천정(伐力川停)·이화혜정(伊火兮停) 등 10개의 정을 말한다.

왕경인으로 편성된 10정은 일명 삼천당(三千幢)이라고도 불렸다. 중앙정부에서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小監) 2명, 화척(火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을 파견하여 군졸을 통솔하고 영토를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통일전쟁 당시 대 백제, 고구려 전에서 활약했던 전직 화랑도들로 구성된 것으로 상정된다. 화랑도를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 ‘큰 미륵’ 즉 대미(大彌)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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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산성을 오르는 능선에서 바라본 벌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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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랴오닝성 환런현 오녀산에 있는 고구려 산성인 오녀산성의 모습
 


대미산성이 고구려 벌력천성인가
대미산성은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40 홍천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별집‘권17’, <관동지> <홍천현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여지승람>에는 “대미산성 석축 주 이천일백 구십칠척 고칠척 금반퇴락(大彌山城石築 主 二千一百 九十七尺 高七尺 今半頹落)”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미’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큰 뫼’ ‘대미’ 즉 큰 성을 지칭한 표현이다.

대미산성을 찾기 위한 남산 등정은 두 번째다. 1차 조사는 2월 하순 홍천역사문화연구회 이병규 회장과 곽계달 전 한양대 교수와 함께했다. 이날 조사는 남산 둘레길로 올라가 성의 북편을 돌아봤다. 북쪽 오성산과 오룡산이 내려다보이는 감토봉 정상까지 걸어가 능선에 길게 축조된 판축의 구조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능선 고준한 곳에 축조한 장대(將臺)를 두 곳 확인했다. 이런 방식의 능선을 이용한 판축성 구성은 고대 성의 일반적 형태다. 남한지역 임진강, 남한강 유역에 있는 여러 고구려식 성 배치와 비슷하다. 대표적인 것이 양구 비봉산 성지다. 백제 초축으로 보이는 비봉산성도 대미산성과 같
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산정의 테메식 석축성을 연결하는 동서 장축의 능선이 포곡(包谷)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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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 오룡산 지맥에 구축된 대미산성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들여쌓기로 정연하게 축조한 것을 봐도 고구려성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오녀산성, 태자산 산성, 평양 대성산성 등 여러 고구려 성곽의 축조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답사는 남산 산행의 들머리인 ‘여우고개’에서 올라갔다. 성으로 오르는 길이 험난하다.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이 없어 임시 가설해 놓은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다. 밧줄을 놓치거나 발을 헛디디면 대형사고가 날 만한 절벽 같은 장애물을 두번 이상 넘어 겨우 본성을 밟을 수 있었다. 벌력천인 덕치천과 오성산이 그림처럼 발아래 보인다.

정상에 오르니 고대 축성방식인 판축과 치성(雉城)의 유구가 확연하다. 이곳을 대미 산성이라고 한 것인가. 답사반은 우선 성벽 주위에 산란한 기와 편부터 수습했다. 처음 찾아진 것이 회백색의 신라기와였다. 그리고 백제 토기와 적색의 와편이 수습되었다. 앞서 걸어가던 이병규 회장이 석축을 발견했다고 큰소리로 알려 왔다.

남쪽 성벽에서 확인된 석축은 일부 무너졌으나 장관이었다. 토사로 매몰된 부분을 제거하면 더 많은 부분이 확인될 것 같다. 한눈에 봐도 고구려식 석축이었다. 이곳에 산재한 편마암을 벽돌처럼 장방향 형식으로 다듬어 들여쌓기로 쌓은 것이다. 무너진 석벽 안을 보면 대소 작은 돌을 넣어 석벽이 무너지지 않게 한 역학구조가 잘 나타나고있다. 성벽 아래서는 고구려 적색 와편들이 수습된다.

이 산성을 설명한 한 자료에 따르면 “입구가 좁은 역C자형으로 돌·흙으로 길이 1.1㎞, 높이 3.5 규모로 파악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설명도 학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확한 조사가 시급하다. 1997년 강원고고학연구소가 한차례 조사를 실시한 후 20년이 넘도록 학술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홍천군은 이 성의 발굴조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허필홍 군수가 직접 산성에 올라가 우물터 등 유구를 둘러보고 정비를 지시했다. 2021년은 우물터와 성안길(內環道)을 재현하고, 망대터, 성문터, 훈련장, 숙영지 등에 이정표를 배치하는 작업에 착수하며 역사 유적에 대한 발굴은 전문기관
에 의뢰, 고증을 받는다는 계획이다.

이 성에는 조선 인조 때 난을 일으킨 이괄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속설로 전해오고 있다. ‘이괄산성’을 비롯해 ‘이괄바위’와 ‘이괄이소’ ‘군량뜰’ ‘이괄봉’ ‘이괄의 우물터’ ‘이괄굴’ ‘성무재’ ‘이괄의 장독대’ ‘이괄의 말무덤’ ‘이괄 아버지 무덤’ ‘야루정’ 등이다. 이밖에도 팔봉산과 태학리 등에도 이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진위를 밝히는 차원에서 이괄과의 연관도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오성산성은 백제 치소인가
오성산성은 덕치천(벌력천) 북편에 있는 성지다. 오성산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구축한 장방형의 성이다. 서쪽으로는 홍천강이 흘러 자연적인 해자를 형성하고 있다. 오성산성은 한자 표기로 오성산(五星山)이다. ‘五城’이 아마 이렇게 변했을 가능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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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연꽃 문양을 닮은 토기편(좌)과 석축 아래에서 찾아진 고구려계 적색 와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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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미산성 안에서 수습된 삼국시대 와편 및 토기편(위)과 통일신라 인화문 토기편(아래)
우)고구려 성벽 앞에서 홍천역사문화연구회 이병규 회장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5부는 고구려, 백제의 편제다. 고구려는 귀족층인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등이었다가 이후 수도를 다섯 부로 나눈 행정 구역으로 바뀌어 운영했다. 다섯부 중에 계루부는 내부 또는 황부, 소노부는 서부 또는 우부, 절노부는 북부 또는 후부, 순노부는 동부 또는 좌부, 관노부는 남부 또는 전부로 나뉘었다. 백제도 수도를 다섯 부로 나눈 행정 구역으로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 등으로 나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전국을 5소경제로 구획하였다.

성은 장방형의 능선을 따라 판축으로 길게 구축했다. 이렇게 고졸한 방식의 판축은 시대가 올라간다. 즉 고구려 시기 이전 백제시대 축성일 가능성이 크다. 능선은 평지까지 연결되어 있어 치소로 추정된다. 답사반은 덕지천과 접한 유지를 조사했다.

백제 신라 고구려 통일신라 토기 편 등이 산란하고 있다. 유백색의 백제 연질 토기편, 승문 토기편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인화문 토기편 등이 산란하다.

주목되는 것은 회색의 화문(花紋) 토기편이다. 작은 조각에 불과하여 전체를 파악할 수 없지만 둥근 자방(子房)에 방사선문대의 꽃 모양을 배치했다. 흡사 고구려 와당 무늬를 연상시켜 준다. 답사반은 적색을 띤 고졸한 고구려계 와편도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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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산성 성벽 위에 보이는 판축의 유구
 



이곳에 많은 토기편이 산란하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답사반은 일몰로 판축의 성지 조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천년 고찰 수타사
공작산이라고 했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자리라고 하여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 천년 고찰 수타사(壽陁寺)를 감싸안은 어머니 같은 산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회와 홍천역사문화연구회, 글마루 취재반은 귀로에 명찰 수타사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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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타사
 


필자는 이미 2월 중순에 홍천역사문화연구회 이병규 회장의 안내로 이 절을 1차 답사한 바 있다. 입구에 부도전이 자리 잡고 있다. 석종형(石鐘形)이 주류를 이루어 조선중기 수타사에서 수도한 고승들의 부도다.

1차 답사 때 수타사 계류는 모두 꽁꽁 얼어 붙었다. 일찍이 여러 사찰을 다 보아왔지만 겨울 풍경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떤 인연이 있는 것일까. 시상이 떠올라 적어 본다.

고색창연한 수타사 계곡
춘설이 분분한데

청정한 계류는 모두 얼어
청옥으로 빚은

부처의 형상일세

정토세계 무량수명을 비는
수타사 독경소리

퇴색한 단청마저
속되지 않은데

1천여 년 역사의 향
기와조각이 반기네

그윽한 풍경이
초면은 아닌 것 같아

전생에 어떤 인연 있어
마음 사로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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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708(성덕왕 7)년에 무애(無碍)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300여 년긴 역사를 간직한 셈이다. 수타(壽陀)란 정토세계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한다고 한다.

천년고찰로 분위기가 잘 남아 있다. 실제로 사찰 주변 경작지에서 통일신라대의 와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병규 회장, 곽계달 교수가 와편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그냥 이렇게 오랜 역사의 편린이 사찰 공터에 뒹굴다니.

와편은 회백색의 선조문으로 고(古) 신라때 만들어진 것이다. 선 무늬가 굵은 것은 시대가 많이 올라간다. 한강변 고구려 유적에서도 많이 찾아진다. 또한 적색의 와편도 찾아지고 있으나 고구려 시기의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같은 와편으로 미루어 수타사의 오랜 역사가 증명되고 있다.

수타사는 처음엔 우적산(牛寂山) 일월사(日月寺)라고 했다. 창건 이후 영서 지방의 명찰로 꼽히다가 1568(선조 2)년에 현 위치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였다. 물 ‘水’자가 지금은 목숨 ‘壽’자로 바뀐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절은 임진왜란 시기 완전히 불타버린 뒤 4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636(인조14)년 공잠(工岑)이 법당을 지었다. 지금남아 있는 아름다운 법당들은 이 시기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없어 더 머물지 못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아쉽다. 마음속으로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약속하며 귀로에 올랐다. 홍천은 역사 유적도 많을 뿐 아니라 청정한 산수가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동토를 비집고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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