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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미녀의 로망


달을성현 산성에는

고구려계 와편 산란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예진,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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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달을성현’
<동국여지승람> 고양군의 연혁조를 보면 “고양군은 본래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이었다. 신라 경덕왕이 고봉으로 개칭하고 교하군(지금의 파주)의 속현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高峯縣 本高句麗 達乙省縣 新羅 景德王 改稱 高峯 爲 交河 郡領縣云云)

고양시의 본래 이름이 ‘달을성’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達乙’은 무슨 뜻인가. 언어학자들은 ‘달을’이 ‘다라’에서 나왔으며 ‘높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고구려 달을성을 신라가 삼국통일 후에 한자식 표기를 수용함으로써 ‘고봉’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에 있는 고봉산성은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태수의 딸 한주(韓珠)의 로맨스가 전설로 내려온다. 이 로망은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를 방불케 하고 있다. 또 우리민족 최고 고전인 춘향전의 스토리 구성과 너무 닮아있다. 호동의 설화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안장왕의 얘기는 춘향전처럼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이 설화에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가 지었다는 <단심가>가 등장하여 이목을 끈다. 백제 태수가 한주를 잡아 옥에 가두고 결혼을 강요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노래로 응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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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
 

죽어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던 없던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이 지었다는 <단심가>를 여기에 가탁한 것인지, 예부터 내려오는 고구려 노래를 포은의 작품으로 부회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적국의 왕자를 사랑하여 끝까지 정절을 지킨 한씨의 빙설 같은 마음은 백제 도미부인의 설화와도 비슷하다. 왕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유랑하는 눈먼 남편을 찾아 천성도(파주)에서 재회한 도미부인이 아닌가.

고구려 달을성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봉산성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과연 고구려 유적은 존재하는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회원들과 글마루 취재반은 혹한의 2월초순, 백제 고구려의 한 맺힌 전쟁의 상처가 어린 고봉산성을 답사했다. 그리고 임을향한 일편단심 백제 한주의 정절을 찾아 나
섰다.

어떤 내용이 고봉산성에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설화를 기록한 책은 <해상잡록(海上雜錄)>이다. 이 기록은 현재 전해지 않고 있으나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봉산성의 설화를 <조선상고사>에 인용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안장왕은 누구인가. 이름은 흥안(興安)이다. 문자왕(文咨王)의 장자로 태어나 498년에 태자로 책봉되어 문자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로부터 ‘영동장군 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에 봉해졌다. 또한 중국 북조의 북위(北魏)로부터도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봉해졌다.

중국 남북조의 양나라와 북위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았다. 아울러 양국과 조공(朝貢)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전대에 이미 확립되었던 대중국 양면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중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대 중국방면의 안정을 추구했던 고구려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이었으며, 전통적인 고구려의 남진정책이기도 했다. 523년과 529년에는 백제를 침략하였다.

고구려 안장왕은 태자 시절 백제인으로 변장하여 개백현(皆伯縣, 지금의 행주산성)을 돌아다녔다. 고구려군의 용간술(用間術)은 과거 장수왕시기 위례성 공격에도 주효했지만 왕자가 직접 변장하고 백제영토에 잠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런데 이 곳 토호인 한씨의 딸인 한주(韓珠)는 절세 미녀였다. 한씨 집에 숨어 있던 안장왕은 한주와 은밀히 정을 통하고 부부의 언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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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 흔적
 

“나는 고구려 태자다. 귀국하면 대군을 이끌고 이 땅을 취한 뒤 그대를 맞이하리다.”

한편, 한주의 미모를 들은 개백현 태수는 부모에게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주는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부모의 압박과 태수의 분노가 대단했다. 할 수 없이 한주는 “저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가 멀리 나가 돌아오지 못했으니, 남자의 생사를 확인한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수는 “그 남자가 누구냐? 어째서 똑바로 말하지 못하느냐? 그가 고구려 첩자이기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냐? 적국의 간첩과 통했으니, 네 죄는 죽음으로도 갚지못할 것이다”라고 겁박하고는 한주를 옥에 가두었다.

사형에 처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하고 온갖 감언으로 꾀기도 했다. 한주가 옥중에서 노래하기를 ‘죽어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노래를들은 태수는 한주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한주가 갇힌 사실을 은밀히 알아낸 안장왕은 장군들을 불러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금 천금과 만호후(萬戶侯)의 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왕의 여동생 중에 고안학이 있었는데 절세미인이었다. 그는 늘 을밀에게 시집가고 싶어 했다. 을밀도 장가들고 싶어 했지만 왕은 가문이 낮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왕의 부름을 받고 을밀이 달려왔다. 그는 왕에게 “천금의 상과 만호의 후는 신의 소원이 아닙니다.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하는 것은 대왕이 한주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하게 해주시면 신도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찾아서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고안학을 아끼는 마음은 그가 한주를 사랑하는 마음에 미치지 못했다. 드디어 왕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을밀의 청을 받아들였다.

을밀은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해상으로 떠나기 전에 그는 왕에게 “신이 먼저 개백현을 쳐서 회복하고 한주를 살릴 터이니, 대왕이 대군과 함께 천천히 좇아오시면 불과 며칠 안에 한주를 만나시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20명의 결사대를 뽑아 평복 속에 무기를 감추도록 하
고, 이들과 함께 개백현에 미리 들어갔다.

이때 개백현 태수는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생일잔치를 벌였다. 한주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그는 사람을 보내 회유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일 계획이지만, 네가 마음을 돌리면 살려줄 것이다.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한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태수가 제 뜻을 꺾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저의 사망일이 될 겁니다. 만약 저의 생일이 된다면, 태수에게는 사망일이 되겠죠.” 이 말을 듣고 태수는 대노하여 빨리 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백성들을 가장해서 연회장에 들어간 을미의 장수들이 칼을 빼어 손님들을 살상했다. 이들이 “고구려 병사 10만 명이 성에 들어왔다”고 외치자 성 안이 크게 동요했다. 이 틈을 타서 을밀은 병사들과 함께 성을 넘어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한강일대의 고을들을 쳐서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백제는 크게 요동했다. 안장왕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백제 고을들을 지나 개백현에 가서 한주를 만났다. 안장왕은 약속대로 고안학을 을밀의 배필로 삼았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지리(地里)>편에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에 대한 설명 중에 다시 안장왕 이야기가 아주 짧게 언급되고 있다.

“즉 왕봉현은 개백(皆伯)이라고도 하는데, 한인(漢人·氏) 미녀(美女)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방이므로 ‘왕봉(王逢)’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을성현은 한씨 미녀가 고산(高山) 위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 불렸다고 한다.”

오곡원 고구려 백제 대회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기록에 안장왕의 남하와 백제군의 패전을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재위 11(529)년 10월에 안장왕이 오곡원(五谷原)에서 백제군과 싸워 이기고 적 2000여 명을 죽였다. (十一年 同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克之殺獲二千餘級)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치열한 공방이 이뤄졌다. 이 시기 백제 성왕은 왕도가 있던 한성지역의 탈환에 목숨을 거는 듯했고 고구려도 국력이 약화됐지만 호태왕과 장수왕이 이미 공략하여 깃발을 꽂은 한강유역을 재탈환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26 백제본기 성왕 7년조>에 <고구려본기>보다 더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변의 혈성을 공격하므로 왕은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기 3만명을 거느리고 오곡원에서 이를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冬十月 高句麗王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謀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不克 死者二千餘人).”

백제군 3만 명이 싸움에 나섰다면 고구려 군사들도 비슷한 규모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오곡원에서의 대 회전은 6~7만에 가까운 병력이 충돌한 큰 싸움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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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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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군이 대회전을 한 역사적 장소 오곡원은 지금의 어디일까. 이 장소는 첫째 고봉산성과 개백현이었던 행주산성과 인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봉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수 있다.

고봉산성과 인근의 곡(谷)이 붙은 비명은 고양시 대곡(大谷)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대 평원인 이곳은 인근에 능곡, 곡산역이있으며 군대들이 진주를 암시하는 대정역도 있다. 이 지역을 옛날에는 ‘오곡’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오곡의 ‘五’를 중국의 <설문해자(说文解字, 한나라 시대 만들어진 한자 해설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뜻을 가지고 있다. “오행은 총 2수이니 음양이 하늘과 땅의 한가한 교오이다. 무릇 오라는 숫자는 총 오에 속한 수다. 고문에 오성이라 했다(五行也。从二,陰陽在天地閑交午也。凡五之属皆从五
云云..古文五省).” 오곡이 ‘달을성’이나 ‘대곡’ 등과 연관은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싸움의 패전은 백제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이 전투 이후로 백제의 한산 구토회복의 의지는 꺾이고 말았으며 성왕은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왕도를 부여로 천도하는 대 역사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9년 후 백제는 소부리로 천도하였으며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했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이 후에도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맞아 전전긍긍했다. 성왕 18(540)년 장군연회를 시켜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성왕 26(548)년 고구려가 독산성(지금의 평택?)을 침공했을 때는 신라에게 원군을 청해 겨우 물리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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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 정상부에서 찾아진 적색 고구려계 와편
 

그러나 백제를 돕겠다고 한 신라는 소백산을 넘어 한강에 진출하면서 백제와의 동맹을 사실상 깨고 만다. 두 나라 다투는 틈을 이용하여 도살성(지금의 증평)을 차지하고 급기야는 성왕 32년 7월에는 보은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에게 왕이 참수당하는 비운을 당하는 것이다. 그 이후의 한강 지배권은 점점 신라로 이양되면서 고봉산성도 신라의 지배가 시작된 것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고봉산성은 고구려 성인가
고봉산성은 고양시 일산구 고봉산(208.8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고봉산은 고양의 주산으로서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주변 일대를 잘 조망할 수 있다. 일대의 한강과 대곡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 고구려가 이 일대를 두고 각축을 벌인 이유도 이해할만하다. 드넓은 평야지대에다 인근의 행주산성 계백현등과 근거리에 위치하여 유사시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봉산성은 이 산의 정상부에 축조한 테뫼식 판축성이다. 처음 이 성을 구축한 이들은 백제일 가능성이 많다.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이나 능선을 따라 동서로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넓게 포곡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지배하고는 일부 구간을 정연하게 석축으로 보축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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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 정상부에서 찾아진 적색 고구려계 와편
 

주목되는 것은 산성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동서로 긴 토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성을 보호하기 위한 차단구축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인위적인 장벽이 틀림없다.중요 건물지를 보호하기 위한 담장 시설인지 발굴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고봉산성 정상부위는 현재 군사시설이 구축되어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돼 조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지만 정상부를 돌아가며 쳐놓은 담장외곽까지는 접근이 가능하여 철망 안으로 살펴본 결과, 정상부의 북동쪽 막사 앞에 길이 3 , 높이 2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석축은 치석된 돌을 줄 맞추어 들여쌓기로 정연하게 축조했다. 바로 고구려 석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평지화된 정상부의 둘레는 150 정도이며, 정상부에 연결되는 부분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특히 북사면의 능선으로 연결되는 지점에는 30~40㎝ 크기의 성 돌이 보인다.

그런데 산성 정상부 운동 기구를 시설하면서 일부가 파헤쳐 져 수많은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곳은 성 외곽 서남쪽 사면으로, 정상부에서 30정도 거리의 완경사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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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 토루 주변에서 찾아진 삼국시대 토기편
 

이 성에서는 완연한 고구려식 적색와편이 많이 수습되고 있다. 주변의 어느 유적보다 많은 양의 와편이 찾아진다. 선조문, 승석문이 주류를 이룬다. 또한 백제식 연질 와편과 세장한 선조문의 신라계 와편도 수습되고 있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장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기와편 중에는 ‘高’자명의 수키와 한 점이 발견되어 고봉산성 또는 고봉현의 치지로서의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조사반도 명문와를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수습하지는 못했다.

고봉산성 자료에 따르면 1단의 투창이 있는 단각고배에서 무개완, 유개완 호 등 신라계의 유물도 수습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배 뚜껑 중에는 신라 통일기 토기 중에서도 제작시기가 상당히 올라가는 삼각집선문과 원문이 그려진 인화문토기가 있다.

이를 감안하면 고봉산성은 신라가 지배하고서도 이 일대의 주요 산성으로서 중요시하게 이용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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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 토루 주변에서 찾아진 삼국시대 토기편

 

고봉산 봉수 잔영
고봉산 봉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다. 본래는 백제에서 봉화를 올렸지만 나중에는 미녀 한씨가 고구려군을 불러오는신호로 이용된 것이다. <여지승람 봉수조에 고봉산>에 봉수가 기록되어 있다.

“고봉산성 봉수.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서쪽으로 교하현 금단산을 응하고 동북으로 봉현을 응한다.”

속설에 따르면 5개의 봉혈이 있다고 되었으나 취재반은 봉수지가 모두 군사시설로 출입이 안 돼 확인을 하지 못했다.

고봉산성은 아름다운 고구려 백제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학계에서도 이 성을 고구려 산성 유적으로 보는 것도 보수적이다. 적색 고구려 와편이 무수히 산란하는 고봉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와 인근 고대 산성 유적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특히 개백현의 치소였던 행주산성에 대한 백제, 고구려 흔적을 찾는 일도 우선돼야 할 것이다.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미녀 한주의 아름다운 로망이 어린 유적을 소홀히 하는 감이없지 않다. 6세기 중반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쟁탈전 당시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고봉산성. 사랑하는 임을 위해 절개를 지킨 백제 미인 한주의 정절이 어린 현장이 새롭게 단장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