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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년 긴 세월이여!

과천 동방에서 회복되리라”


글, 사진. 장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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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정말 원했던 땅은 어디였을까. 조선 풍수지리의 대가(大家)인 무학대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과천(果川)’이 명당(明堂)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관악산의 강한 불기운(火氣, 화기)으로 조선은 과천이 아닌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둥지를 튼다. 관악산 화기가 강했던 건 분명했다. 천도 이후 화기를 누르는 온갖 비책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도대체 어떤 강한 기운을 품던 땅이었기에 조선왕조는 이토록 견제한 걸까. 이와 관련,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과천 속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실제 이 땅 가운데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왕성한 불기운 지닌 땅
예부터 ‘군동팔경(郡東八景)’이라 불린 과천은 수려한 경치를 지닌 곳이다. 과천을 감싼 청계산(618 )과 관악산(632.2 )은 마치 부채가 펼쳐진 듯 고풍스럽다.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산이 여성적이라면, 빼어난 기암절벽과 울창한 산림을 가진 관악산은 남성적이었다. 옛 풍수가는 두 산을 좌청룡, 우백호라 칭하며 명산(名山)으로 꼽았다.

또 서울 남쪽의 관악산은 사방신(四方神) 중 ‘주작(朱雀)’에 속한다. ‘붉은 봉황’ 즉, 왕성한 불기운을 가진 산이다. 반면 경복궁 뒤편 북한산은 ‘현무(玄武)’라고 불렀다. 이는 조선 궁궐 자리가 관악산보다 기운이 약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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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랜드와 서울대공원 동·식물원이 들어선 과천 일대
 


그러니 조선왕조는 이 화기를 눌러야만 했다. 되레 화(禍)를 당할까 해서다. 그래서 관악산 정상에 물웅덩이를 파고, 경복궁 앞에는 물의 신수(神獸)인 해태상을 세웠다. 숭례문의 ‘숭(崇)’자를 불꽃 모양으로 적은 후 현판도 세로로 만들어 화기를 더했다. 불로써 불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몇 년 전에는 정부종합청사가 과천에 들어섰다가 세종시로 이전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곳은 세상 정치가 이뤄질 수 없는 땅이었나 보다.

예부터 동방(東方)이라 불려
과천은 ‘동방(東方)’이라 불려왔다. 삼국시대에 백제 영토였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南下)로 고구려 영토가 된다. 이때 지명은 ‘동사 힐’이었다. 돋을 ‘동’, 고을 ‘힐’ 즉 ‘해가 돋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지구상에 해 뜨지 않는 곳은 없지 않은가. 어떤 뜻이 담긴 걸까.

기독교 <성경(시편 84편 11절)>을 보면, 해는 하나님으로 비유돼 있다. 그러니 해 뜨는 동방이라는 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언젠가 때가 돼서 나타날 것을 하늘은 우리에게 미리 말해왔다. 전설·설화·신화 등 구전(口傳)을 통해서다.

조선시대 예언가이자 천문학자인 남사고 선생의 <격암유록>이 그 한 예다. ‘서기동래(西氣東來)’라는 말이 있는데, ‘서쪽 기운이 동쪽으로 온다’는 뜻이다. 여기서 동쪽은 방위(方位)를 말하며 지구상 땅 끝인 한반도, 정확히는 과천이 동방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그라나타 타고르도 <동방의 등불>을 노래하며 동방(東方)을 코리아라고 지칭했다. 그 코리아에서 훗날 있게 되는 회복의 역사를 미리 담아 놓은 것이다.

잠시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으니, 이런 이야기 속에 동일하게 종교성이 담겼다는 사실이다. 특히 구전은 후대에 전해질 한뜻을 담고 있었다. 그 대상이 ‘우리’였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 걸까. 바로 말속에 담긴 ‘약속’이다. 또 약속이라 했으니 이뤄질 실체가 있는 것이다.

‘문화(文化)’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글월 ‘문(文)’, 될 ‘화(化)’, 즉 글이 글로만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으로 이뤄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9절 말씀에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 보고 믿게 함이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신약인 요한계시록이 이뤄지는 마지막 한때, 미리 말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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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장막성전’이 있던 청계산 옥녀봉 자락 우)옥녀봉 자락에 있는 ‘100일 양육터’
 


지금 이 말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가 이미 55년 전부터 땅끝 동방 ‘과천’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언제부터인가. 청계산 옥녀봉 자락에 ‘장막성전’이 출현하면서다. 요한계시록의 배도, 멸망, 구원의 사건이 비로소 시작된 거다.

하나님과의 언약, 배도와 멸망
이제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자. 1966년 호생기도원 출신의 여덟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다. 이들은 명을 따라 청계산 자락에 올라 100일간 양육 받는다. 피로써 하나님과 언약하고 영명(靈名)을 각각 받는다. 대표 목자 유씨의 영명은 ‘임마누엘’이었다. 이들은 3년 반 동안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여호와의 성신이 임마누엘에게 명을 내리면, 일곱 사람은 임마누엘에게 순종하고, 백성은 일곱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었다. 지키면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어준다고 했다. 이들은 하산 후 청계산 기슭 막계 2리에 초가삼간을 빌려 계시(啓示)된 이름인 ‘장막성전’ 간판을 걸고 예배드리기 시작한다.

장막성전의 말씀은 참으로 대단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성도가 몰려올 정도였다. 당시에 과천은 전깃불이 없고 비포장도로 위에 고물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다닐까말까 한 곳이었다. 또 막계리라는 마을에 들어오려면 버스에서 내려 3㎞나 걸어 들어와야 하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럼에도 성전 주변에 입주한 세대는 순식간에 육백을 넘어섰다.

전국에는 약 80개 지교회가 생겼고, 나날이 급성장했다. 이런 장막성전에 비극이 시작된다. 스스로를 일곱 별, 일곱 사자로 부르던 이들 사이에서 1967년 6월 권력다툼이 일어나면서다. 이 일로 임마누엘은 장막에서 쫓겨났다. 그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하는 ‘배도(背道)’ 행위였다. 이후 설교는 임마누엘의 아들 유씨가 맡는다.

1969년, 하나님과 약속한 3년 반의 기한이 찼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그들은 몰랐다. 이미 주의 성령이 그들을 떠나버린 사실을 말이다. 이 일로 7사자 중 몇몇은 장막성전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이제 돈을 벌어야 한다”며 부패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71년, 늘어나는 성도들을 수용하기 위해 구(舊) 성전 뒤에 400평 규모의 신(新) 성전을 짓는다. 하지만 7사자의 비리·부패로 장막성전은 빚더미에 오른다.

이 무렵, 한 사람이 장막성전에 들어온다. 1975년 서울역 다방에서 유씨에게 전도된 오씨였다. 그는 원래 천주교 신부였다가 개종해 장로교 목사가 된 자였다. 장막성전에서 신임을 얻은 오씨는 곧바로 전도사가 된다. 1980년 3월에는 당회장 자리에 오른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격동의 1980년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정치·사회적으로도 격변의 때였다. 1979년 10·26사태, 12·12사태가 일어난다. 1980년 10월에는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이 출범한다. 당시 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정화운동’이 일어나는데, 핵심은 두 가지였다. 불량배를 소탕한다는 명목하에 ‘삼청교육대’가 세워졌고, 이단을 척결한다는 명목하에 ‘청지기교육원’이 출범한다. 이때 장막성전에 위기가 찾아왔다. 비
리·횡령 건으로 이단 명단에 들어가면서다. 걱정 근심으로 한숨만 내쉬는 날이 계속됐다.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때 장막성전에 입교한 오씨가 유씨에게 한 가지 꾀를 낸다. “신학교에서 목사자격증을 따오면 이단에서 제외된다”는 것이었고, 유씨는 이 유혹에 넘어간다. 1980년 3월 오씨를 당회장에 앉힌 그는 그해 10월 미국 신학대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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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양육터에 있는 ‘모세 영록’. 세월 풍파에 씻겨 희미해진 것처럼, 우리 마음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희미져해 가는 것은 아닐까.
 


이 일이 있은 후 장막성전은 빠르게 변해갔다. 1980년 9월, 장막성전은 물론 전국 80여 개의 지교회 간판은 이삭교회로 바뀐다. 오씨는 장막성전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7사자가 100일 양육 받은 청계산 초막과 야외 강대상을 부순다. 신성전 머릿돌은 뽑아 시멘트로 메운다. 그리고 1981년 9월 20일 14시 ‘목사임직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완전히 파해진다. 이후 이곳은 도시계획사업으로 저수지 건너편의 앞산 문원동으로 이전한다. 그리고 장막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의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대공원 동·식물원이 들어선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는 마태복음 24장 2절의 말씀처럼 장막성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청계산 옥녀봉 자락에는 지금도 7사자가 100일 양육을 받던 곳이 남아있다. 이곳 산세는 여전히 영험한 듯했다. 큰 바위 아래로 초막을 세웠는데 몇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로 비좁다. 바로 옆 널찍한 바위에는 ‘모세 영록’이 희미하게 남아있으며 그 당시 함께 훼손됐다. 그런데 잠시 의문이 든다. 왜 이곳에 모세 영록이 있는 걸까. 그 답은 청계산이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3500년 전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첫 언약을 하고 말씀이 새겨진 돌판(법)을 받았던 것처럼, 맑은 시내가 흐르는 청계산도 성신과 언약하고 말씀(법)을 받았다. 즉 모세 영록은 청계산 자락이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가 이뤄진 장소임을 증거하고 있다. 100일 양육터 아래에는 수종(갱매)폭포가 있다. 맑은 물소리가 난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빛의 역사 출현
이런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뜻을 이뤄 가셨다. 1967년 장막성전에서 역군 생활을 하던 한 사람을 통해서다. 그는 193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태몽에 ‘하늘의 빛으로 태어났다’하여 미리 지어 둔 이름이 ‘만희(萬熙)’였다. 완전한 빛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그를 ‘빛’이라고 칭하겠다. 역군생활을 하던 1971년 어느 날이었다. 장막성전이 ‘<루크코리아(LOOK KOREA)>’라는 잡지에 소개되는데, 이때 빛은 교회의 비리를 알게 된다. 이 일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빛은 고향 청도로 낙향하고 새마을 운동에 참여한다.

1977년 늦가을, 빛은 제주도에 가 있는 장막성전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고향 마을 다리에서 천인(天人)을 만난다. 천인은 장막성전의 현실을 그에게 보여준다. 당시 빛은 새마을운동으로 일궈 놓은 농작물을 추수만 하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과천 장막성전으로 다시 올라간다. 그리고 장막성전의 7사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1979년에는 과천 옆 안양 인덕원으로 이사온다.

1981년 9월 20일 14시 ‘목사임직예배’가 있던 날, 빛은 모든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확실한 증인이었다. 그리고 이산 저산을 다니며 실제 보고 들은 배도, 멸망의 사건을 알리며 구원의 역사를 펼친다. 이것이 ‘산상예배(1981년 2월 초~1984년 6월)’다. 그 역사의 현장인 청계산을 지금 둘러보는 것이다. 빛과 함께하던 사람들은 성전 없이 예배를 드리다 1984년 6월 3일 안양 비산동 동산아파트 지하에 첫 성전을 마련한다. 그해 9월 24일 예배 때 성헌을 발표하는데, 1984년 3월 14일을 신천지 창립일로 선포한다.

20년의 간절한 기도, 응답
1979년, 빛은 과천 옆 안양 인덕원으로 이사 온 후 20년간 한 일이 있었다. “과천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빛은 기도 동산의 지계석 옆에 초막 하나를 세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기도 응답은 1999년 10월 네 번째 성전이 과천 고려빌딩 5~6층으로 입주하면서 이뤄졌다.

빛은 왜 과천에 들어가길 간절히 바랐던 걸까. 지금까지 우리가 장막성전과 빛의 행보를 살펴본 이유가 바로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곳, ‘고토(古土)’라고 하는 동방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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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인덕원에 세워진 기도 동산 초막
 


이를 좀 더 이해하려면 동방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성경>을 살펴봐야 한다. 창세기 2장 8절에 보면 동방 에덴에서 하나님의 6000년 전 역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아담 범죄 후 사망이 주관하는 세상이 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하나님은 이를 회복하고자 긴긴 역사 펼쳐왔고, 요한계시록에서 고토를 완전히 회복한다고 약속했다. 이 말씀이 20년간 이어진 빛의 기도를 통해 과천(동방)에 들어가면서 이뤄지기 시작한 거다. 기도 동산은 그 실상의 장소인 셈이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 동방까지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명한다. 그 바통을 동방인 대한민국 과천에서 이어받았고 ‘영원한 복음’이 됐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눈앞에 약속의 말씀이 펼쳐지면서다. ‘세인하지(世人何知)’라는 말이 있다. ‘세상사람 중 누가 알아주겠는가’하며 안타까워하는 창조주의 심정이 담겼다. 세상은 보고도 믿지 못하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고 이뤄진 역사가 확실한 증거다. 또 남은 약속도 모두 이뤄진다 했다.

이 같은 신의 뜻을 사람이 어찌 막을 수 있으랴. 하늘이 정말 원했던 땅, 그곳은 동방인 과천이 분명했다. 그러니 조선왕조가 과천을 품고 있는 관악산 화기를 누를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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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동산 초막 옆에 있는 지계석. 과천과 안양의 경계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