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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대학살 100주년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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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 때 일본군의 간도침입의 빌미를 만들어 준 마전 만순의 처형장면.
만순은 같은 마적 패의두목 고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관병의토벌에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틴 선교사의 목격담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 보병들이 야소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마구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S.H.마틴(S.H.Martin, 閔山海)은 캐나다장로회에서 한국 선교부로 파견된 의료선교사로서 북간도 용정에 있는 제창병원장이었다. 앞에 인용한 기록은 마틴의 글로서, 1920년 10월 31일 북간도 용정에서 가까운 장암동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집단학살극 장면이다. 그의 기록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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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창병원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 남자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볼 수 있었다. …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 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 앞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고 … 큰나무 아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였다. …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36개와 시체들을 목격하였다. 이튿날 일본군 17명은 다시 장암동에 쳐들어와 유가족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치게 하고 채 타지 않은 시체를 다시 소각하였다. 사건 당일 현장을 조사한 연길현 경찰 제5분소 순경 ‘총진하’는 장암동참안에서 조선족주민 33명이 사망되고 2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하였다.” (양소전 외 4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p208)

그날은 일본 천왕의 탄생일인 천장절이었다. 일본군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한 후 천장절 축하연에 갔다. 마틴은 용정촌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취한 일본군 병사들과 마주쳤고, 용정 시가지에는 일장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이 같은 학살이 “간도 모든 지역에 적용된다”며 “촌락은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됐고 청년들은 사살됐다”고 적었다. 이같은 참상은 중국 언론에서도 보도되었다. 다음은 북경과 천진에서 발간된 <태오사보>라는 신문에 난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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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의 사진첩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땅바닥의 시신은 독립군 혹은
1920년 간도대학살 때 일제에 의해 학살된 조선 양민으로 추정된다
 


“간동이라는 곳에서는 일본군이 각 부락에서 14명의 양민을 붙잡아 넓은 들판으로 끌고 가 큰 구덩이를 팠다. 그러고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시켜 장작・석유 등을 가져오게 했다. 잡아온 14명을 총살하고 화장한 뒤, 백골을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려 시체조차 구별해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 용정촌에서 40리 떨어진 어떤 마을에서는 일본군이 밤 1시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강제로 집을 나오게 했다. 사람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곧 발포하여 한 집에서 2, 3명씩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고는 그 시체들을 한군데 모아 불태운뒤, 다시 집을 불태우고 교회에 불을 질러 건물 19동을 불태웠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이 참상을 목도했는데 새 무덤이 30군데나 되었으며, 고아와 과부들이 무덤을 둘러싸고 울고 있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망자들은 모두 선량한 백성들이다.

혁명운동을 한다는 이들은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피신했으며, 피살된 사람들은 모두 불구자들이나 노약자들뿐이었다. 어떤 선교사는 말하기를 “나배교회가 불탈 때는 한국인 6명이 손발이 묶여 불 속으로 던져졌으며, 소왕교회에서는 먼저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주로 기독교 신자들을 상대로 했으니, 무릇 교회가 있는 부락이면 성한 데가 없었다(김철수 저,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p437, 439, 441, 442).

대학살의 피해 규모
일제는 살해당한 사람 494명, 체포 707명, 불탄 가옥 531동, 불탄 학교 25개교, 불탄 교회당 1개소로 기록했다. 이는 사실을 은폐하고 최소로 축소된 수치임이 분명하다. 서간도의 유하, 삼원포, 홍경, 왕청문, 관전, 삼도구, 철령 등지에서 자행된 것만 1323명 사살, 125명을 체포하였으며 장백현 일대에서도 한인 212명을 사살하고 400여 명을 체포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피해상황은 피살 3664명, 체포 155명, 불탄 가옥 3520동, 불탄 학교 59개교, 불탄 교회당은 19개소, 불탄 곡물 5만 9970섬이었다. 이 통계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후 훈춘과 화룡에서 발행된 지역사에 보면 한국인의 통계 사이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독립신문> 87호에서 화룡현의 피살자가 613명, 불탄 가옥 361채, 불탄 학교 8개, 불탄 교회 2개라고 했는데, 김동섭은 <화룡인민의 항일투쟁>에서 피살된 수 1362명, 불탄 가옥 866채, 불탄 학교 10개교, 불탄 교회 3개소로 집계하고 있다.

훈춘현의 경우도 임시정부 간도파견원은 피살 249명, 체포 없음, 불탄 가옥이 457채, 불탄 학교가 2개교, 불탄 교회는 없다고 집계하였으나, 양봉송이 편저한 <훈춘조선족발전사>에는 피살자 1124명, 체포 110명, 불탄 가옥 1094, 불탄 학교 19개, 불탄 교회 7개로 나온다. 앞으로 학살 피해에 대해서도 정밀한 재정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피해 규모가 차이 많은 것은 조사한 시점의 차이, 광범위한 지역조사의 한계, 접근이 어려운 마을의 누락, 기록자 고의적인 가감삭제 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의 간도 대학살
망국의 상황이 되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등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했다. 일제의 통제를 벗어난 국외에서 힘을 키워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조국을 해방한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서간도 및 북간도 지역에 국내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집단 이주를 했고, 곧 민족의식 교육을 위한 학교와 군사 지도자 양성을 위한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중간에 풍토병과 가뭄 등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원만하게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간도 한인사회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압록강 두만강 너머 서·북간도 한인사회로 곧바로 번져갔다. 북간도 용정에서는 3월 13일 1만여 명의 대규모 만세시 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밖에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간도 동포들은 곧 3·1운동 열기를 조국 해방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독립군이 조직되고 무장대원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일본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거나 독립군자금 모집,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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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12일 혼춘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군의 간도침입에 이용되었던 마적 만순의 처형장면(왼쪽)과 일장기를 들고 귀대하는 일본군 보병 75연대 병사들(오른쪽) (제공:김재홍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사무총장)
 


10년간 식민지 지배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하고자 해온 조선총독부로서는 국경 지역의 불안이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군 사령관 우츠노미야(宇都宮太郞)는 1919년 9월 12일 나남의 제19사단장과 용산의 제20사단장에게 해외 항일단체들의 국내 진입을 막도록 국경폐쇄를 지시했다.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가 독립군을 탄압하기도 했다. 1920년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간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가와 항일단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길림성지역에서는 서정림(徐鼎林) 성장(省長)을 비롯한 지방관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일본군은 단독 토벌의 길을 열고자 했다. 1920년 7월 16일까지 3차에 걸친 봉천회의를 열었다.

명분은 ‘일본과 중국의 협동조사’ ‘일본과 중국의 공동토벌’을 내걸었지만, 일본군이 중국 국경을 넘어 들어가 한국 독립군에 대한 단독 토벌의 길을 열고자 한 것이었다. 1920년 8월 15일 일제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만주 진입에는 중국의 양해가 있어야 했다. 일본 군부는 만주의 실질적 지배자이던 장작림(張作霖)을 끌어들였다. 장작림은 중국 동북 3성의 지배자가 될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자금과 무기의 지원이 필요했다. 장작림은 일본군을 이용하고자 했고, 일본군은 장작림을 이용하고자 했다. 양자의 이해가 맞아들어 일본군의 중국 영토 내 진입의 길이 열렸다.

장작림은 우선 한인 독립운동 세력 탄압에 소극적이었던 길림성장 서정림과 연길도윤(延吉道尹) 장세전(長世銓)을 해임하고, 자신의 충복인 길림독판(吉林督辦) 포귀경(鮑貴卿)을 길림성장으로, 도빈(陶彬)을 연길도윤으로 임명했다. 바로 그날인 1920년 9월 2일 간도참변의 계기가 된 제1차 훈춘사건이 발생했고, 일제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소포계획서(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書)>를 완성했다. 이는 일본군의 간도 대학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간도지역 한국인 집단학살을 승인한 장작림은 일본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1921년 6월 외몽고를 침략했으며, 중국 동북지방의 최강자가 되었다.

일제가 저지른 간도 대학살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는 10월 14일부터 11월 20일까지의 제1차 집단학살극이다. 이 단계에는 한국인의 항일단체들과 밀정들에 의해 파악한 무장독립운동기지로 지목된 마을, 학교, 교회당 등에 대한 대대적인 방화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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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학살 현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제2단계는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로서 ‘잔당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마을과 무장독립운동기지에 대하여 거듭된 수색, 비행대와 국경수비대를 동원한 무력시위 단계였다.

제3단계는 12월 17일부터 1921년 5월 9일 일제가 철수하기까지로서, 간도 파견대를 기반으로 경찰분서의 증설, 총독부 경찰력 증가 그리고 친일세력 육성 등을 통해 간도지역에 일제 경찰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한국인의 저항세력을 해체, 무력화하는 데 중점이 놓여 있었다.

갓 창간된 동아일보의 장덕준 기자가 간도 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는 밤중에 안내해 준다며 그를 찾아온 일본군을 따라나섰다가 실종되었다. 유인하여 살해한 것으로 믿어진다. 올해는 간도 대학살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