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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남단 제천

‘장락’의 비밀


북연의 풍홍과
망국 유민의 한 스며있나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백은영,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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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은 고구려 땅 ‘나토’군
충북 제천은 본래 고구려 땅 나토군(奈吐郡)이었다. 언어학자들은 ‘나토’를 왕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한다.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강원도 영월은 나생(奈生)으로 불렸다. 언어학자들은 ‘奈’란 ‘어찌 나’의 ‘어’로 고대에는 임금을 ‘어라하’라고 부른 데서 비롯됐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우리말을 한자로 차용하면서 그 음의 첫 자를 땄기 때문이다.

여기서 ‘吐’라는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土’를 쓰지 않고 왜 이런 자를 쓴 것일까. 이 글자는 ‘구토하다’는 뜻인데 중국 고문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해석이 여럿 나온다. <설문(說文)>에는 ‘베끼다(吐,寫也)’는 뜻으로 쓰였으며, <시・대아(詩·大雅)>에는 굳고 강한 것을 나타낸 의미로 쓰인 것이다(柔則茹之,剛則吐之. 채소는 유하며 토는 강하다).

나토는 바로 ‘어토’라는 뜻으로 강한 임금의 땅이라고 해석해도 될 듯하다. 그렇다면 제천 장락 땅은 어느 시대 어떤 나라와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자. <동국여지승람>에 ‘제천은 강원도 영월 경계까지 17리이고, 영춘 경계까지는 18리이다. 남쪽으로 청풍군 경계까지 20리이고 단양군 경계까지 20리 거리이며 서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43리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 병력의 주요 거점들이 모두 20~40리 가까운 거리에 위치에 있다.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서로 지원할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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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사 칠층모전석탑
 

제천은 본래 지역이 지세가 높아 고구려인들이 방어와 취락의 요지로 삼기에 좋은 곳이었다. 소백산 준령인 죽령(竹嶺)을 넘어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는 아주 중요한 관방으로서 최적이었다. 조선조 세종 때 문신인 신개(申槩)는 제천의 형승을 ‘수복산중(水複山中)’으로 비유했다.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겹겹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
(행행수복우산중 다소민거도진중
行行水複又山中 多少民居圖盡中)


필자는 지난 70년대 중반 지금은 작고하신 서양화가 신용길 화백과 함께 제천시 장락동에 소재한 폐사지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장락(長樂)’이란 이름에 흥미를 느껴 절터를 조사한 것이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모전석탑(석재를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탑)이 있어 고구려 시기 이후에도 매우 중요한 사찰로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많이 알려진 모전 석탑 조사보다는 어떤 와당이 수습될까가 관심이었다.

그런데 신 화백이 절터 주변을 돌다가 와당한 점을 손에 들고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정신이 번쩍 드는 삼국시대 와당 한점이 들려져 있었다. 신라나 백제와당이 아닌 특별한 연화문 와당이었다.

연화문을 눌러 선문형태로 한 육엽(六葉)의 와당은 매우 고졸했다. 충주시 탑평리 사지에서 출토된 적색의 연화문와당이나 고구려 왕도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와당 모양과도 같았다. 주연은 높았으며 아무런 무늬가 없는 소문대였다. 지금 이 와당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그 이후 충청대학 박물관 장준식(현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박사에 의해 몇 차례 절터 발굴 작업이 이뤄져 동형의 와당들이 학계에 보고된바 있다.

오늘은 고구려 남단의 요지, 역사의 향이 어린 제천시 장락사지(長樂寺址)를 답사해 본다. 왜 ‘장락’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이들 와당들은 정말 고구려계 와당들인가. 또 후대에 신라인들이 장중한 모전석탑을 지어 향화를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혹 기록에는 없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락’이란 특별한 이름
장락(長樂)이란 단어는 고대부터 중국 민족이 즐겨 사용했던 길상(吉祥)용어다. 중국의<금석색(金石索)>에 따르면 ‘장구환락 영불결속(長久歡樂, 永不结束. 기쁨과 즐거움이영구하여 끝이 없다)’의 줄인 말로 한나라 황제는 이 문구를 사랑하여 장락궁(長樂宮)까지 지었다고 한다.

<예기(禮記·樂記)>의 ‘樂’조를 보면 ‘낙은 천지의 화합으로 본래 화(和)에서 나왔으며 천자와 제후의 화에서 비롯된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樂者, 天地之和也 <禮記·樂記>,‘樂’的本質是‘和’, 天代表天子, 地代表諸候).

한나라 황실의 삼궁은 장락궁(長樂宮), 미앙궁(未央宫), 건장궁(建章宫)을 가리키며 이중 장락궁이 주 궁전이었던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되는 한나라 문자와당 가운데는 ‘장락(長樂)’ 혹은 ‘장락미앙(長樂未央)’이라고 각자된 유물이 많다.

그런데 황실에서만 사용하던 ‘장락’이라는 이름이 왜 이 절터에 붙여졌던 것인가. 고구려 왕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 어떤 나라의 황실과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중국 고대 <사서(史書)>에서 장락이란 연호를 사용한 제왕들을 검색해 봤다. 장락을 쓴 것은 이미 기원전 한대(漢代)부터 여러 명이 등장하고 있으나 고구려 중엽 시기에 살았던 제왕은 중국 5호 16국시대에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후연(後燕)의 제3대 황제 소무제(昭武帝) 모용성(慕容盛, 재위 398~40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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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사지
 

소무제 모용성은 스스로를 ‘서민천왕(庶民天王)’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건평(建平)’에서 ‘장락(長樂)’으로 바꾸었다. 장락 연간인 400(장락 2)년 후연은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新城)과 남소(南蘇) 등 2개 성을 점령해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 후 5세기 중반 등장한 북연(北燕)의 황제들도 ‘장락’이란 연호를 썼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구려 장수왕시기 지금의 하북성에서 집권한 풍홍(馮弘)이었다. 그는 장락신도(長樂信都, 지금의 하북성 기주冀州) 출신으로 북연의 마지막 황제로 기록된다. 제천처럼 ‘장락신도’란 지명까지 기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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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사 표지석
 

당시 풍홍은 북위(北魏)와 대립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장수왕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처음에는 인정해 주었다. 땅을 빌려줘 살게 했으나 북위 눈치를 살피느라 결국 그를 살해하고 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3년부터 27년까지 기사 가운데 북위와 북연의 풍홍과 연관된 사실을 검색해 본다. 풍홍의 비극적 운명이 우리 역사에도 소상히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国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諱系及以與之. 遣 員外散騎侍郞李敖,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領擄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 麗王. 秋, 王遣使入魏谢恩. 魏人数伐燕,燕日 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圖后擧. 密遣尚書陽伊, 請迎于我.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王遣将葛廬, 孟光, 將衆数萬, 随陽伊至和龍, 迎燕王.葛廬、孟光入城, 命軍脱弊褐.取燕武庫精仗以给之, 大掠城中.五月, 燕王率龍城遣户東徙, 焚宫殿, 火一旬不滅.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廬、孟光帥骑殿後, 方軌而進, 前后八十馀里. 魏主聞之, 遣散骑常侍封撥来, 令送燕王.王遣使入魏奉表, 称當興與馮弘俱奉王 化.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骑卒, 劉絜, 東平王丕等諫之, 乃止.

二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贡.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 劳之曰 ‘龍城王馮君,爰適野次, 士馬劳乎!’.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弘素侮我,政刑赏罰猶如其国. 王乃奪其侍人,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驹等迎之, 幷令我资送. 王不欲使弘南来, 遣将孙漱, 高仇等,殺弘于北豊, 竝其子孫十馀人. 白駒等帥所领七千馀人, 掩討漱, 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不欲違其意, 下白驅等獄,已而原之.
二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十二月, 遣使入魏朝贡.


북연의 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의 요녕성 신풍현에 자리 잡았던 북연(北燕)의 인가(人家)는 약 3만호(약 10만 명 추산)가 있었다는 <위서(魏書)> 기록이 있다. 이때 황제 풍홍을 잃은 북연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지리멸렬하여 유주(幽州)나 북위, 혹은 동으로 고구려 땅으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기록 <위서(魏書)>를 보면 요동, 성주, 낙랑, 대방, 현도 등도 모두 북위에 투항했다고 기록된다.

대흥이년(大興二年, 432년) 팔월(八月), 북위태무제척발증친자솔병정토북연(北魏太 武帝拓渤蒸親自率兵征討北燕), 풍홍고성자수(馮弘固城自守). 구월(九月), 북연소할영구(北燕所轄營丘), 료동(遼東), 성주(成周),낙랑(樂浪), 대방(带方), 현토등륙군전도향 북위투강(玄菟等六郡全都向北魏投降), 태무제파북연적삼만다호인가천사도유주(太武帝把北燕的三萬多户人家遷徙到幽州). 상서곽연동풍홍향북위투멸귀부(尚書郭渊東馮弘向北魏投滅歸附), 병진헌녀인입조(竝進獻女儿入朝), 청구주북위적부용(请求做北魏的附庸), 이보전자기적왕위(以保全自己的王位). 풍홍설도(馮弘說道): 량국지간 조취산생렬흔(两國之間早就産生裂痕), 결하적수원이경흔심료(结下的讐怨已經很深了), 강부북위시자취멸망(降附北魏是自取滅亡), 환불여고수성지(還不如固守城池), 등대전기운운(等待轉機云云)… <(위서·권(魏書·卷)(구십칠(九十七)·렬전제팔십오列傳第八十五)>

<삼국사기>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민의 상당수가 장수왕의 한반도 남진정책에 의해 변방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이주됐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공격할 때는 말갈이나 피지배민족을 앞세워 싸웠다. 고구려 유적에서 말갈의 명문 와편이 찾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기도 포천 반월성에서 발견된 ‘마홀(馬忽)’명이 대표적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신라는 병합한 금관가야를, 백제는 가라를 앞장세웠다. 장수왕이 신라 방어에 주력한 변방은 바로 최남단으로 추정되는 소백산 죽령지역인 제천, 단양지역이다. <여지승람>에 영주, 봉화까지 고구려 영토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면 더 남하 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쟁에서 패한 피지배민족은 정복자들에 의해 강제이주 되는 것이 관례였다. 풍홍이 죽은 후 제천 ‘장락’ 지역에 북연 유민들이 이주해온 곳은 아닐까. 중국의 일부학자들은 북연을 고구려계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한족이 아닌 선비족으로 말갈처럼 고구려 별종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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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미앙 와당
 

요녕성 전탑과 장락사지 전탑
장락사지에 우뚝 서있는 보물 제459호 모전석탑을 학계는 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선조문 기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충청대학교 박물관이 그동안 조사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장락사지의 2차 중창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1967~1968년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기단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당시 백자종자편, 금동편, 금동불상, 사리 장치 석재 등이 출토되어 석탑이 한 차례 이상 중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모전석탑의 중건과 관련한 자료가 제5건물지에서 확인되었다. 제 5건물지에서는 모전석탑에 쓰였던 완형의 석탑 부재가 건물의 부재로 전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편이라면 석탑 부재를 만들고 남은 것을 건물 조성에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지만, 애써 다듬은 완형의 부재를 건물 기단의 다른 석재와 함께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제22건물지 및 26건물 기단토에서 석탑 부재가 확인되었다. 장락사지의 2차 중창기는 고려시대로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북연의 수도였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에도 북위시대 모전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장대한 크기의 탑은 모두 2기이며 하나는 북위시대의 것이고 하나는 12세기 요나라 축조이다. 제천 장락사지 모전 석탑의 탄생이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조양시 모전석탑 가운데 오래된 것은 북위 문성제의 풍황후(馮皇后)가 할아버지인 풍홍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탑이라고 전해온다. 풍황후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가 죽음을 당한 이후 아버지가 북위에 투항하여 높은 관리를 지냈다.

14세 어린 나이에 궁중으로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18세에 황후에 올랐다. 황후가 되어서 문성제가 붕어하자 아들인 헌문제가 12세로 등극했다. 풍황후는 이를 계기로 수렴청정하며 전권을 장악하고 조정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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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평양 출토 연화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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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황후 능묘출토 와당(도판)
 


헌문제가 장성하자 모자간에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풍황후는 결국 헌문제를 체포하여 5세 아들인 효문제를 황제로 등극시켰다. 섭정하면서 스스로 태상황이 되어 군대를 시켜 남방 정벌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헌문제가 23세가 되자 또 독살하고 태상태후가 되어 조정을 다스렸다.

개혁사상을 도입하여 서정을 일신했다. 특히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공헌도 있다고 기록된다. 풍태후는 검소하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호색하여 젊은 남자를 옆에 두고 총애하였다고 한다.

이런 호기(豪氣)로 조부의 고향 북연 땅에 큰 모전탑을 축조하여 영령을 위로한 것이 아닐까. 중국 위사(魏史)에 기록된 풍태후의 사실을 참고로 붙여둔다.

풍태후(馮太后, 公元 441~490년), 북위문성 제적황후(北魏文成帝的皇后). 시북위일위 걸출적녀정치가(是北魏一位杰出的女政治家). 중문명풍태후(中文名馮太后) 국적북위(国籍北魏) 출생일기(出生日期) 공원(公元) 441 서세일기(逝世日期) 공원(公元) 490 주요성취반행반록제(主要成就颁行班禄制), 정돈리치(整顿吏治), 통일도량형(统一度量衡), 추행(推行) “삼장제(三長制)” 실행(實行) 균전제(均田制). 신빈북위문성제적황후(身份北魏文成帝的皇后) 역사지위녀정치가(歷史地位女政治家) 풍씨적조부풍홍(馮氏的祖父馮弘), 백부풍발시북연국왕(伯父馮跋是北燕國王), 기부풍랑재북연멸망후강위(其父馮朗在北燕滅亡后降魏), 관지진(官至秦), 옹이주자사(雍二州刺史), 고모시북위태무제척발도적좌소의(姑母是北魏太武帝 拓跋燾的左昭儀). 후래기부인죄피살(後來其父因罪被殺), 저수고모입궁(她随姑母入宫). 공원(公元) 452, 문성제즉위후(文成帝即位后), 봉십사세적풍씨위귀인(封十四歲的馮氏爲贵人), 십팔세립위황후(十八歲立爲皇后). 동년(十八歲立爲皇后), 립량세적인자척발홍위황태자(立两歲的儿子拓跋弘爲皇太子). 안조‘립자살모’적규구, 척발홍생모리귀인피사사(按照‘立子殺母’的规矩,拓跋弘生母李贵人被赐死). 풍황후무양척발홍(馮皇后撫養拓跋弘), 대태자여동친생(待太子如同親生). 문성제사후(文成帝死後), 헌문제척발홍즉위시(獻文帝拓跋弘即位時),년근십이세(年僅十二歲), 존풍황후위황태후(尊馮皇后爲皇太后), 유승상을혼총람조정(由丞相乙渾总揽朝政). 을혼도모찬위(乙渾圖謀篡位), 풍태후용계파타체포살사(馮太后用計把他逮捕殺死). 종차(從此), 조정유풍태후일인재결(朝政由馮太后一人裁决).수착헌문제만만장대(随着獻文帝慢慢長大,모자간적모순월래월심(母子間的矛盾越来越深). 공원(公元) 471, 십팔세적헌문제피박선위우오세인자척발홍(十八歲的獻文帝被迫禅位于五歲儿子拓跋弘)(즉효문제即孝文帝), 자기주료태상황(自己做了太上皇). 단타잉통병남정북벌(但他仍统兵南征北伐),저본신취사풍태후감도위협(这本身就使馮太后感到威脇), 이차타환살료태후적남총리변(而且他還殺了太后的男寵李變), 우시풍태후우(于是馮太后于) 공원(公元) 476, 장년근이십삼세적헌문제독사(將年僅二十三歲的獻文帝毒死). 헌문제사(獻文帝死), 풍태후이태황태후신빈재차림조은정(馮太后以太皇太后身份再次臨朝听政). 살료일비정적(殺了一批政敌), 중용일비유개혁사상적인(重用一批有改革思想的人), 풍태후도불괴시북위일위걸출적녀정치가(馮太后都不愧是北魏一位杰出的女政治家). 공원(公元)490년(年) 구월(九月), 풍태후병서(馮太后病逝, 종년사십구세(终年四十九歲). 시위문명태황태후(諡爲文明太皇太后), 장우산서대동북교방산영고릉운운(葬于山西大同北郊方山永固陵云云)

풍황후(馮皇后) 능묘(陵墓)는 중국 산서성 대동시 북교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능묘 건물지에서 출토된 와당들이 고구려의 전형적인 모양이어서 주목을 끌었다. 이는 북위지역 고토에서 출토된 와당들과 확연히 다른 것들이었다. 오히려 중국 지안 국내성이나 호태왕릉(好太王陵)에서 건물지에서 출토된 전형적인 고구려 연화문와당과 닮은 것이었다(도판).

길림성 훈춘시 고성촌 북연시기 유적에서 출토된 와당들도 고구려 와당을 닮고 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와당들은 더욱 선문이 짙으며 흡사 기하학 무늬를 연상시켜 준다.

돌기된 중앙의 자방을 중심으로 6엽의 뾰족한 판단을 두고 간판은 모두 기하학 무늬같은 선문을 배치했다. 그래서 학자들이 북연을 고구려의 별종으로 해석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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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사지에서 찾아진 고구려 및 신라 시대 와편
 


장락사지 출토 고구려 와당
장락사지에서는 많은 와당이 출토되었다. 충청대학교 박물관이 수습한 와당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고구려계 와당들이다. 주연을 높게 만든 이 와당은 가운데 양각된 자방에 7과의 정연한 연자를 배치하고 그 주위로 선문대의 연판과 간판을 배치한 예다.

연꽃의 판단은 그리 날카롭지는 않으나 가운데를 1조 선문으로 구획하였다. 이 같은 형태의 이형 와당들은 고구려 구토인 괴산군, 청주 비중리 고사지에서도 찾아진 적이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연판 사이에 T자형의 간판을 배치했는데 이 같은 모양의 와당은 평양 대동강 일대에서 수습되어 현재 경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 평양출토 고구려 와당 도판).

태토가 고운 재료를 쓴 이형의 와당(도판)은 내구에 무늬를 선각으로 처리했다. 연판은 모두 6엽이다. 원문의 자방 안에는 일직선의 선문을 그렸다. 와장(瓦匠)의 여기로 보이는데 날카로운 연꽃이 시대의 상한을 알려준다. 북연의 풍홍이 살던 고사지에서 출토되는 와당들도 모두 선문으로 된 것들
이다. 길림성 훈충 고성촌에서 출토된 와당은 기하학 무늬를 이룬 것도 있다.(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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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제천 장락사지에서 출토된 와당, 우)평양 대동강변 출토 와당
 


그 옆의 와당은 돌기된 원형의 자방을 두었으며 상면에 1과의 연자만이 뚜렷하다. 연꽃은 모두 7판으로 연판의 중간을 선문으로 구획하였다. 간판은 생략되었으며 주연부에는 연주문대를 돌려 시대가 조금 떨어진다.

또한 절터에서는 명문와도 수습되었다. 조사보고서에 나와 있는 명문와편은 ‘장(長)’자명 기와로 평와에 좌서 양출(左書陽出. 거꾸로 보이는 글씨)한 것이다. 와편에 나오는 격자문과 글씨의 모양으로 보아 통일신라 이전의 기와로 보인다. 또 ‘무인륙월대길(戊寅六月大吉)’이라는 기와도 조사되었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 답사반은 추석을 며칠 앞두고 장락사지를 답사했다. 사역을 정연하게 단장하여 혹시 와편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경작지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을 조사할 수 있었다.

붉은색의 평와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서도 보이는 승석문 평와편은 영락없는 고구려계 기와다. 경기도 포천 반월성에서 찾은 승석문 와편은 전형적인 고구려 유물로 이를 닮아있다. 내면에는 직포문(織布紋)이 완연하다. 음성 망이산성, 청주 구녀산성에서 수습한 적색의 평와편 안쪽 면과 비슷하다.

선이 굵은 선조문 평와, 사격자문 평와도 보인다. 이를 보면 장수왕이 이 일대를 지배하는 5세기 말엽부터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 세력이 가람을 세우고 향화를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나토의 고구려 군사들은 북상하는 신라 군사들을 제어하고 단양, 영월, 영주, 봉화, 삼척일대의 아군들과 연합했을 게다. 그러나 진흥왕이 소백산 일대를 장악하는 6세기 중반, 고구려 군사들은 많이 전사했거나 북쪽으로 퇴각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일부 고구려 후예들은 신라의 유화정책으로 나토에서 자리 잡고 살았을 것이다. 이들 중 북연의 후손들이 조국에 대한 향수로 고향 조양에 세워진 모전석탑을 닮은 장락탑을 세운 것은 아닌지. 1500여 년 전에 지어진 ‘장락(長樂)’이라는 이름 그리고 홀로 남은 웅장한 모전석탑, 절터 주변에서 발견되는 고구려계의 이형 기와편들이 잊힌 역사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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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사 칠층모전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