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삼국의 운명을 바꾼

‘남천정’

설봉산 성벽에서부터 수많은 고구려 흔적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백은영, 이태교


01.jpg
 


고구려가 중요시한 남천현
경기도 이천의 옛 고구려 시대 이름은 남천현(南川縣)이었다. 5세기 후반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아리수를 점령한 고구려군은 이천을 장악하여 남방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땅은 6세기 중반 진흥왕대 신라 수중으로 들어가 삼국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주 무대가 된다.

남천은 ‘남쪽의 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 조(漢州條)에도 고구려시대 남천현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천에서 남천은 어떤 하천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지승람>에는 고적 조에 남천(南川)이 나온다. 고려 태조가 후 백제를 치려했을 때 장군 서목(徐穆)의 도움을 얻어 이 내(川)를 건넜다고 하여 ‘이천(利川)’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 내(川)가 남한강 지류인 흥천 혹은 북하천인가.

이천 동쪽에 있는 애련정(愛蓮亭)에는 조선 성종 때 학자 임원준(任元濬)이 쓴 <객관기>가 있다. ‘이천 고을이 고구려 때는 남천현이었는데 뒤에 신라의 영지가 되어 남매군(南買郡)이라 이름하였으며 군주(軍主)를 두어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는 이천을 매우 중요시했다. 백제성의 고지인 설봉산(雪峯山)에 거대한 석성을 구축하여 신라, 백제의 북상을 저지했다. 당시에도 ‘땅은 넓고 기름지며 백성은 많고 부유하다‘는 형승을 중요시했을 게다. 주요한 군사기지가 되어 옛부터 많은 군사들의 왕래가 잦았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었던 이첨(李詹)의 시를 음미해 보자.

시내의 흐름이 온통
말굽의 티끌로 흐려졌으니
북으로 가고 남으로 오는 것이
묻노니 몇 사람인고(溪流渾盡馬蹄塵)


신라 진흥왕은 남천현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이곳에 군주(軍主)를 진주시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남천정(南川停)’이 바로 여기다. 남천정은 신라 10정(停)의 하나였다. 지역이 넓을 뿐만 아니라 국방상 요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2개의 정을 더 설치한다.

신라군의 군복 빛깔은 황색(黃色)이었다. 뒤에 남천주를 황무현(黃武縣)으로 고친 것은 복색에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속군관으로는 장군(將軍), 대관대감(大官大監), 대대감(隊大監), 제감(弟監), 소감(少監), 감사지(監舍知), 대척(大尺), 군사당주(軍師幢主),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등이 있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544(진흥왕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강을 개척하기 전 이곳을 먼저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는 신라에게는 매우 긴박하고 역사적인 해였다. 그동안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와 국경분쟁이 일어나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한 것이었다. 성왕은 가야세력과 연합하여 신라를 습격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는데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고리산(지금의 옥천)에 오다가 구천에서 신라 복병에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진흥왕은 성왕을 잃은 백제가 혼란에 빠지자 때를 잃지 않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했으며 세력이 약해진 고구려 남방지역인 충북과 경기도 일대의 여러 성들을 공취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남천현’의 확보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군사력을 집주시켜 고구려의 남하와 백제의 북상을 저지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신라 통일의 전진기지
660년 여름, 신라의 대 백제 공격은 이천즉 남천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나라 13만 대군은 수 천척의 배를 이용, 중국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는 ‘전선이 천리나 뻗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660년 5월 26일 신라는 무열왕을 위시, 김유신 장군과 제장들이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라벌을 떠나 남천정을 향했다. 당시 무열왕을 시위했던 신라군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남천정으로 떠난 군사의 숫자가 5만 대군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군이 왕도를 떠나 남천정에 도착한 것은 22일 뒤인 6월 18일이었다.
   

02.png
좌)이천 설봉산성 성벽 축조 상태(1916년), 우)이천 설봉산성 문지 측벽(1916년)(출처:문화재청)
 


당 소정방은 서해 덕물도(德物島)에 상륙하여 남천정에서 떠난 태자 법민을 맞는다. 당시 법민은 전선(戰船) 백 척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소정방을 맞이했다고 되어 있다.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남천정에서 기다린 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정방은 법민을 만나 ‘나는 7월 10일에 백제의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사와 만나 백제 의자의 도성을 격파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법민은 ‘대왕은 지금 대군이 오는 것을서서 기다리고 있는 터이므로 장군이 왔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올 것입니다.’하니 소정방이 크게 기뻐하자 법민은 돌아와서 왕에게 소정방의 군세가 매우 강성한 것을 말하자 왕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김춘추는 회군하여 서라벌로 환궁하지 않고 상주 백화산 금돌성(金突城)에 주둔하게 된다. 김유신 휘하의 군사들은 황간-진안-탄현-황산 길을 택해 소부리로 진격을했다. <삼국사기>에는 7월 9일 황산에 도착한 것으로 나오는데 남천정에서 이곳까지도 20여 일이 걸린 셈이다.

왕경에서 떠난 군사들과 주둔 군사가 가장 많았던 사벌주(상주), 영동(길동군), 보은(삼년산성), 옥천(고리산) 군사들이 정벌군에 합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여러 성에서 합류한 군대의 수가 5만이었다.

백제의 옛 땅 설봉산성
<동국여지승람>에 설봉산(雪峯山)은 ‘이천의 진산’으로 나온다. ‘설봉산은 부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雪峯山 在府西五里鎭山).’ 그리고 고적조에 ‘설봉산 고성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5천1백12척이다.

지금은 폐하였다(雪峯山 古城 石築 周 五千1百十二尺 今廢).’고 나온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 1656, 효종 7년)>에는 ‘설봉산 재부 서오리 산상유 고성(雪峰山 在府西五里山上有古城)’으로 <대동지지(大東地志, 1862, 철종 13년)>에는 ‘설봉산고성 석축 주오천일백십이척 비고운 일천오백보(雪峰山古城 石築 周五千一百十二尺 備考 云一千五百步)’으로 나오며, <이천부읍지(利川府邑誌, 1842, 헌종8년)>에는 ‘설봉산고성 석축 주 오천일백 십이척 금폐(雪峰山古城 石築 周五千一百十二尺 今廢)’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지도서(與地圖書, 1760, 영조 36년)>에는 ‘왜성 재부 서 오리 설봉산상 주회 일천오백보 금폐(倭城 在府西五里雪峰山上 周回一千五百步 今廢), <이천부읍지(利川府邑誌, 1871, 고종 8년)>에도 ‘왜성 재 부서 오리 설봉산상 주회 일천오백보 금폐(倭城 在府西五里雪峰山上 周回一千五百步 今廢)’로 기록돼 있으며, <이천 부읍지(利川府邑誌, 1899, 광무 3년)>에는 ‘왜성 재부 서 오리 설봉산상 주회 일천오백보 금폐(倭城 在府西五里雪峰山上 周回一千五百步 今廢)’라고 나온다.

왜 설봉산성을 ‘왜성’이라고 기록한 것일까. 일설에 따르면 임진전쟁 때 일본군이 일시 주둔한 데서 이같이 왜곡되었다고 한다. 설봉산성의 본래 주인은 어느 나라였을까. 이천이 마한,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처음 백제에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흙과 할석을 섞어 다져 쌓은 판축형태가 뚜렷이 나타나며 백제계 연질 와편과 토기편이 많이 수습되고 있다. 그런데도 백제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남천정이 아닌 ‘설봉(雪峯)’이 혹 백제 땅의 이름은 아니었을까.

<이천시지(利川市誌)>는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한 시기를 3세기 후반 ~ 4세기 초반’으로 추정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이천 지역 지표조사를 통해 ‘이천시 전역에서 백제 토기가 수습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삼국중 백제가 가장 먼저 이천 지역을 지배했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03.jpg
복원된 성벽이 너무 신작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04.jpg
성안의 기와 무더기에서 찾아진 각종 문양의 와편.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산성은 해발 300여 의 설봉산 계곡을 감싸 안았다. 실측보고서에 따르면 둘레 1079 의 포곡식 산성이며, 면적은 8만 5880㎡이라고 되어있다. 산성의 전체 지형은 평면상으로 남~북 길이가 380 , 동~서 길이가 226 인 부정형의 장방형(長方形) 형태로 서벽의 북쪽과 중앙부분이 돌출되어 있다.

단면상으로는 남고북저(南高北底), 서고동저(西高東底)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연구소는 1997년 12월부터 지표 및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칼바위 부근에서 저장용 구덩이(土壙)를 다수 발굴하였다고 학계에 보고했다. 그 안에서 수많은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고, 또한 서벽 배수구에서 백제 토기의 특색인 삼족기(三足器)가 출토되었다고 했다. ‘설봉산성은 4세기 후반 경에 백제가 처음으로 축조한 석성(石城)이다.’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백제가 이처럼 장대한 석성을 구축한 사례가 없다.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이 새로 복원되었으나 원형을 그르친 것 같아 눈에 거슬린다. 너무 신작 냄새가 나고 있다. 오히려 무너진 일부는 그대로 존속이 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취재반은 산성을 돌면서 성저 부분을 보는 순간 “아!”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바로 포천 반월성, 남양주 대모성, 오산 독산성, 영월 정양산성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성의 구축상태를 확인한 것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들여쌓기로 구축한 것이었다. 중국 지안 오녀산성, 환도산성, 국내성의 성벽을 보는 듯하다. 포천 반월성처럼 백제가 쌓은 판축성 위에 고구려가 견고한 성벽을 구축한 것이다.

돌의 다듬은 형태는 경기도내 여러 고구려성보다 가장 완벽하다. 가장 잘남아 있는 포천 반월성이나 오산 독산성에 견줄 만하다.



05.jpg
설봉산성의 초기 축성형태인 판축모습으로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글마루 취재반은 성안의 곳곳을 답사하며 혹 고구려 흔적이 없는 가를 살폈다. 성 안 곳곳에는 삼국시대 와편과 토기편이 산란했다. 백제계 연질 선조문 와편을 비롯해 적색의 고구려계 와편이 다수 조사됐다. 많은 와편이 산란한 것은 이 성에 많은 군사들이 주둔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 단국대학교 박물관의 발굴로 드러난 대단위 건물지도 살폈다. 정면 9 , 측면 6.30 크기의 유지에서는 다듬은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었다. 신라가 남천정을 설치할 때 군주가 주거했던 관아터가 아닌가.

주변에서는 회색의 경질 신라 와편과 토기편이 산란하다.

장대지(將臺址)는 정상 밑 서쪽 능선의 비교적 평평한 부분에 원형대로 남아 있다.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 및 석전용 돌무더기도 여러 곳 남아 있다.

단국대학교 박물관이 1998~2005년에 걸쳐여러 차례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했으며 공개된 보고서의 요지를 간추려본다. 그런데 보고서는 이 성의 석성부분을 신라의 축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축이전 고지에다 보축한 것이라고 밝혀 본래 주인은 백제라는 것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06.jpg
 


(전략) 성벽은 지형 조건에 따라 편축법(片築法)과 협축법(夾築法)을 이용하여 수직에가깝게 쌓았다. 바닥 부분은 자연암반을 ‘L’자형으로 파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았다. 지반이 연약한 곳에서는 기둥 구멍이 1.9 ~2.2간격으로 확인되었는데, 바깥쪽 벽면에 목조 가구 시설을 설치하고서 성벽을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돌은 주변의 풍부한 화강암을 잘라 크기와 형태를 규격화한 뒤 성벽 바깥 면에 빈틈이 없고 정교하게 맞물려 쌓았다. 기본 규격의 성돌은 네모난 모습인데, 가로와 세로의 비율을 2:1 또는 3:1로 다듬었다. 성벽은 기본 규격의 네모난 성돌을 2~3단 쌓고서 중간에 1단씩 두께가 얇고 길이가 길면서 네모난 판상석을 놓거나 모든 면의 길이가 일정한 네모난 돌을 교대로 쌓은 뒤 뒷채움돌과 견고하게 맞물리게 하여 쉽게 붕괴되지 않도록 쌓았다.

성 안의 시설물로는 문터 1곳, 건물터 5곳, 치성 2곳이 남아 있다. 주변에 절벽과 암반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연암반의 화강석을 잘라 성돌로 이용하였는데, 암반을 자를 때 생긴 부석은 2차 가공하여 암반 사이의 틈을 메우는 데 활용하였다. 지반이 약한 곳은 기반토인 풍화암층을 단이 지게 깎아내고 2차가공된 면돌과 깬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성벽과 성 안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를 비롯하여 철제 솥과 용기, 뚜껑 등의 취사용 기류와 보습, 볏, 살포, 낫, 도끼, 망치 등의 철제 농공구류, 다양한 형식의 철촉 등 6세기 중엽~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들 산성은 신라에 의해 축성된 뒤 통일신라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성에는 남장대터가 있는데, 남장대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적심초석 건물로 신라 경문왕 때 연호인 서문터 바닥 시설 아래에 묻혀 있는 수구는 설봉산성을 처음 쌓을 때 만든 것으로, 입수구 주변과 수구 안에서 세발토기와 함께 굽다리접시류, 항아리류 등의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고 신라 유물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로써 보아 신라에 의해 석성이 축조되기 전에 백제 성곽이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후에 서문터는 크게 고쳐졌는데 이때 수구는 덮개돌 윗면으로 1~2 이상 점토다짐을 하여 바닥시 설을 한 뒤 그 위에 성문을 만든 모습이다. 아마도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던 6세기 중반경에 개축하면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팔각제단 고구려 신전 아닌가
이 성에서 평양 청암리 사지(金剛寺), 경주나정(박혁거세), 하남시 이성산성, 공산성 등지에서 발굴된 팔각제단지(八角祭壇址)가 조사되었다. 제단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성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제단은 설봉산성 칼바위의 서쪽 20 지점에 복원되어 있다.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의 구조보다는 작지만 고대의 정연한 팔각전지다. 이 유적은 어느 시대의 것일까.

고구려 시기 팔각전지가 발굴된 청암리 사지는 평양 시가지에서 약 3㎞ 떨어진 대동강 북안, 청암동(平壤市 大城區域 淸岩洞) 토성안에 있다. 인근에는 대성산성, 안학궁터를 비롯 다수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발굴 조사단은 설봉산성 유적 건물지를 제단으로 추정했다. 또한 팔각 유구 주변에서도 하남산성 답사 때와 마찬가지로 고구려계 적색와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와 가운데는 격자문 등 포천, 남양주 고구려 성지에서 수습되는 형태의 문양도 보였다.

고구려 후손임을 자처한 서희의 고향
이천은 고려 초기 문신으로 거란 장수 소손녕을 퇴각시킨 외교가 서희(徐熙, 942~998)의 고향이다. 서희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을 연 서목의 후손으로 이천 서씨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난 인물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서희의 빛나는 사연이 기술되어 있다.

서희는 993(성종 12)년 거란(契丹)이 80만 대군으로 침공할 때 중군사(中軍使)로 북계(北界)에 출전했다. 이때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한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자 서희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서희는 또 거란과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만주 지역의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07.jpg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결국 서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군 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담판 이후 고려는 또 강동 6주를 회복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오늘날 왜 이런 멋진 외교, 정치가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소손녕처럼 한국이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계승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중국 저명한 학자들도 앵무새처럼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이 아니라고 우긴다. 1000년 전 고려 중군사 서희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적 합의 역사를 들추어 상기했으면 한다.


08.jpg
설봉산성에서 찾아진 와편들
 


고려는 고구려(본래 국호는 高麗)의 후손임을 지처하며 ‘구토 회복’이란 기치를 내걸고 개국했다. 그래서 국호도 ‘高麗’라고 한 것이다. 한국민이라면 이천 출신 명신 서희의 멋들어진 주장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남한 지역에서 글마루 취재반에 의해 계속 확인되는 많은 고구려 유적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가져야만 한다. 대 고구려가 구축한 많은 성지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장엄하게 우뚝 서 있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 유산임을 증명하고 있다.


09.jpg
설봉산성 성벽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