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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민족문화말살의 현장
평양기생학교에 분 왜색의 바람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그토록 기다리고 염원하던 광복을 맞았지만 69년이 흐른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아직 온전한 광복을 이루었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못한 채 사회 곳곳에 숨어있듯 남아있는 식민사관은 잘못된 역사관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마저도 왜곡시켰다. 광복 69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아 진정한 광복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기획을 마련했다.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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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기생 을미대 야외나들이(26p)
평양기생학교의 수업은 3년 동안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졌다. 한문, 국어, 음악을 비롯해 승무와 검무 등의 춤을 익혀야 했고, 거문고와 가야금 같은 악기도 배워야 했다. 무엇보다 윤리교육을 중요시했다(일패기생). 빡빡한 수업과정을 이수해야 했던 평양기생학교 학생들에게 야외나들이는 꿀맛 같았을 것이다. 
 

 
“평양의 명소 연광정에서 대동강을 끼고 부벽루에 오르다 보면 한-양옥 절충의 우람한 조선집이 나타난다. 아름드리 기둥에는 주홍칠을 하고 벽마다 그림을 그려놓은 이 집이 당시 팔도에 유일했던 평양 기생학교다.”  -이규태 역사 에세이 中-
 
본래 우리네 기녀는 시와 서(書)에 능했으며, 전통악무(傳統樂舞)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이들이었다. 비록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했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별한 존재였으며, 글 꽤나 한다는 양반이나 문인들보다 그 재능이 뛰어난 이들도 많았다. 조선 말기를 지나 일제강
점기를 거치면서 기녀의 문화에 변화가 일고 그 의미가 왜곡됐지만 말이다.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평양기생학교’에도 그렇게 일제에 의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평양기생학교의 본래 이름은 ‘기성권번 학예부’로 평양에 있는 기성권번(箕城券番)에 속해 있었다. 기성권번 학예부가 만들어진 시기는 1921년으로 당시 평양기생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기생이 아닌 학기(學妓)라 불렀다.

학습과목으로 가곡, 민요, 잡가, 시조 등 조선성악은 물론, 가야금과 거문고, 양금(洋琴) 같은 전통악기의 교습 및 검무(劍舞)·우의무(羽衣舞) 등의 전통춤이 포함됐다. 또한 시문(詩文)과 서예(書藝) 및 사군자(四君子)를 비롯한 인물화와 산수화, 일어(日語)와 독본(讀本) 및 회화(會話) 등의 교양과목도 이수해야 했다.

대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 모란대가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한 평양기생학교. 이곳 역시 일제의 감시와 간섭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놀이터의 노래에 목이 쉬어 / 돌아와서 화가 나 함부로 뜯는 가야금이여 줄이 끊어지도록 뜯으며 / 뜯으며 이 밤을 새일 거나”
- 놀이터의 노래에, 장연화(1920년대 평양기생)-

평양기생학교 출신의 장연화는 1920년대 중앙문단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말 한번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웬만한 문인을 능가했던 문학 기생이었다. 이렇듯 평양기생학교 출신의 기생들은 최고의 기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으며, 그 기량 또한 뛰어났다. 이들은 논개와 춘향, 황진이와 같은 의기(義妓)와 정절, 예인(藝人)의 대명사들을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문이었을까. 일본과는 다른 조선 기녀들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일본은 평양기생학교에까지 침투해 그 고유의 문화를 변질, 왜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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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일본식 가극 실습
대동강 연광정(練光亭)과 능라도를 배경으로 평양기생학교 학생들
이 일본식 복장으로 춤을 추는 장면. 실제 공연 장면을 사진으로 남
긴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연출한 장면이다. 이 역시 채색한
것으로 인쇄물에 넣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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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선박 위에서의 공연
1906년 8월 1일 부산에 정박 중인 일본 선박 선상에서 조선인 기녀들이 전통악무(傳統樂舞)를 선보
이고 있다. 이 공연은 일본인 측에서 평양기생학교 기녀들의 기예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초
청한 것으로, 당시 여자를 배에 잘 태우지 않는 문화가 있었음에도 선상에서의 공연을 허락한 것은 그
만큼 평양기생학교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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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졸업 촬영
평양기생학교 출신은 그 기예가 출중한 만큼 평양기생으로서의 자부심과 애향심도 남달랐다고 한다.
3년의 과정이 끝나면 졸업증명서를 받고 정식으로 기적(妓籍)에 올라 기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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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 악기 소개
평양기생학교는 8세 이상이면 들어갈 수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3년의 과정이 3학기로 나누
어 진행되며, 시험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사진 속 학생의 모습이 많이 앳되게 보인다. 앳된 동기(童妓)
주위로 한국의 전통악기인 장구와 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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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연주회 시범
각양각색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들의 모습으로, 평양 기생들이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연습하는 장
면으로 보인다. 교방마다 여러 악공들이 있었으며, 기생들과 함께 공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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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조합(妓生組合) 권번의 간부들
일제강점기 기생을 관장한 기생조합 즉 권번이 있었다. 1918년 기생조합의 명칭이 일본식 교방
의 이름인 권번으로 바뀐 것이다. 지방의 여러 권번 중에서도 특히 평양에 있는 기생조합인 ‘기성
권번(箕城券番)’이 유명했다. 권번은 기생을 길러내던 교육기관이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고
활동했던 조합으로 권번에 기적을 둬야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권번은 교육과정의 기생을 관장
했으며,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고 감독했다. 또한 기생들의 세금을 정부에
바치는 중간 역할을 했다. 사진 속 의자에 앉은 이가 조합장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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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전경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듯한 모습의 평양기생학교 전경이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곳답게 건물이
크고 깨끗하다. 학교 앞에 인력거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공연 등으로 외출할 일이 있을 때 사용
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인쇄물로 만들기 위해 채색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은 그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 문화의 가장 밑바닥까지 다 파고 들어갔다. 민족문화말살
정책을 통해 일제가 원한 것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 우리네 문화와 풍습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고 숱한 유언비어를
만들면서까지 그들이 뺏고 싶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정의로움과 애국심 등 한 없이 높은 문화였다.

이는 기생의 문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기생들은 항일 의식이 투철했다. 진주(晉州) 기생 산홍(山紅)은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친일파를 꾸짖었으며,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진주·수원(水原)·해주(海州)·통영(統營) 등지의 기생조합원들이 궐기해 만세시위를 크게 벌이기도 했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 기생들은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으며,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고 한다.

이렇듯 애국심과 절개가 남달랐던 조선의 기생, 그것도 전국에서 제일가는 평양기생학교에서 일본춤과 일본 전통악기를 가르쳤다는 거짓 선전을 하
기 위해 일제가 연출한 이 사진들은 외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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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통악기 시범연주 장면
한복을 입고 있으나 일본의 전통악기 샤미렌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평양기생학
교는 우리네 춤과 노래, 전통악기를 배우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 곳에서 우리
전통 복장인 한복을 입고 일본의 전통악기를 들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연출된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 또한 일본이 자신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한
인쇄물에 사용할 목적으로 채색을 입혔으며, 한자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평양
기생학교’라고 적힌 것을 보았을 때, 당시 유명했던 평양기생학교를 폄훼하고 왜
곡하기 위해 자신들의 문화를 일부러 심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기생들의 뒤편
으로 보이는 배경은 대동강이며, 악기를 들지 않은 둘은 창을 하는 모습을 연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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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일본식 무희변신
평양기생학교는 우리네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전통무희를
양산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예기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으며, 자
신들을 예술가로 생각했다. 이 사진 또한 일본식 복장을 하게 한 뒤 정체불명의
춤을 추게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