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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대신 총을 들었던

6.25참전

인천소년병


글, 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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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육군통신학교에서 인천 지역의 중학교 2~3학년 출신 통신병들이 3개월간 무전통신 교육을 받고 3기로 졸업하며 찍은 참전 기념사진
(제공: 이규원 인천 학생 6·25 참전 기념관장)
(*소년병: 14~16살의 중학생들로 구성된 어린 군인들)
 


70년 전 6월은 아주 슬프고도 잔인했던 달이었다. 어제의 형제가 적이 되기도 했고, 아침까지만 해도 인사하며 헤어졌던 가족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던, 하나의 민족으로 반만년의 역사를 함께했으나 이념이 다른 이유로 같은 피를 나눈 형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안타까운 시기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단순히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전쟁이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을 선언하면서 끝이 아닌 끝을 낸 이 전쟁은 한국군의 수로만 13만 명이 넘는 수가 죽고 3만2000여 명이 실종 됐으며 45만여 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이 많은 전투 인원 중 사실 정식 군인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나간 인원들도 있다. 바로 연필 대신 총을 들었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 20살도 되지 않았던 어리디 어린 이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어야 했다.

총을 잡은 학생들
어느 전쟁이나 승자와 패자가 있고 그 속에서 영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6·25전쟁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이 이름을 높였다. 하지만 영웅만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 무수히 목숨을 잃었던 이들. 그 속에 학도병이 있었다.

정식 명칭 ‘학도의용군’이라 불리는 이들은 6·25전쟁 때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한 의용병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서울시내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수원에서 ‘비상학도대’를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이 되면서 낙동강·다부동·포항 등에 30만여 명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 중 7000여 명의 안타까운 목숨이 떠나갔다. 그 중에서도 영화 <포화 속으로>와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다룬 ‘포항여중 전투’와 ‘장사상륙 작전’은 학도병들이 6·25전쟁에서 획을 그은 전투다.

이처럼 학도병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후방지역이나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중 인천에서 마산까지 걸어가 자원(自願)한 이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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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학생 6・25 참전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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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학도병의 명단
 

500㎞를 걸어간 소년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승기는 국군과 연합군 쪽으로 기울여졌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바뀌던 1950년 12월18일 인천 축현국민학교에서 모인 인천지역의 학도병(인천학도의용대)들은 걸어서 저남쪽 마산까지 걸어갔다. 2000여 명의 이들이 걸은 그 거리만 500㎞. 함박눈을 맞으며 하루에 25㎞씩 갔다. 1951년 1월 8일 부산에 도착한 인천학도의용대는 육군 제2훈련소로 찾아갔다.

자원한 이들 중에는 14~16살의 나이 어린 중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입대 불허 판정을 받았으나 탈영병의 군번을 목에 걸고서라도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그 속에는 이경종 인천 학생 6·25 참전관 초대 관장도 있었다. 그는 입대한 지3년이 지난 19살이 돼서야 자신의 군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그 전에 전쟁터에서 스러져갔다면 가족들은 그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인천 학도병의 명단 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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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1951년 6월 7일 수도사단 강원도 향로봉 전투에서 이경종 씨 모습, 우)인천 학생 6・25 참전관 내부(6·25 전몰 인천 학도병 명단)
 

“하늘 땅처럼 오래 이어갈 겨레는 끝없는 충성을 나라에 다하고,
자손 만대를 오래 이어갈 집안은 먼저 어버이께 효도를 다하고,
여기 불어 오가는 바다 바람이여 늘 이 뜻을 모두에게 전하라.”
- 이규원 인천 학생 ·625 참전관장

당시 학도병은 국군에 큰 힘이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전 세계를 통틀어 낮은편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은 국가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전쟁이 터져 정신이 없는 그 속에서도 훈련소에 입소하는 징집군인 중에는 문맹자가 많아 군대 훈련보다 기본적인 문자 교육을 먼저 진행해야 했다. 그렇기에 공부를 하다가 온 학도병들은 국군의 큰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조용히 가버린 넋을
기록하는 남겨진 자

16살의 나이에 자원입대한 이경종 씨는 휴전을 선언하고 1년 뒤 1954년 12월 5일 20살의 나이로 전역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겨진 것은 3년제 중학교 졸업장, 지친 몸과 마음이었다. 이후 국가는 그에게 1996년 ‘참전용사 증서’만을 줬다. 다른 보상은 없었다.그때 이경종 씨는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함께 의용대에 참여했던 이들의 마음을 담기 위해서였다. 1996년 7월 15일부터 이씨 부자(父子)는 인천 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해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 시작했다.

아들 이규원 씨는 “아버지는 직접 친우들을 만나러 다니시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획과 경제적인 부분을 도왔다”면서 “증서 한장으로 그때의 노고를 인정하는 모양새가 많이 아쉬웠다”고 밝혔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벌써 20여 년 흘렀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이경종 씨는 녹음기와 사진기를 들고 직접 발로 뛰면서 자료를 조사했고 그 결과 전사한 이들 중 국립묘지에안장되지 못한 2기의 묘를 찾아 육군 본부에 문의해 이장시켰다. 그리고 아들 이규원 씨와 함께 <인천 학생 6·25 참전사> 1~4권을출 간했다.

그와 함께 이규원 씨는 하루에 2시간씩 아버지 이경종 씨가 모은 자료를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천 학생 6·25 참전관을 설립했다. 이규원 씨가 운영하는 치과 병원의1층에 마련된 이 기념관은 다른 기념관들보다 규모는 작아도 내용만큼은 알차다. 참전 당시 학도병들의 실상을 참전한 이들이 생
생한 증언한 토대로 인천학도병들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벌써 70년째이다.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은 끝났으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아직 ‘휴전’ 상태라는 것이다. 언제든 전쟁이 시작돼도 사실 이상하지 않은 상태. 하지만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자원,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 가운데 연필 대신 총을 들어야했던 이들의 피와 땀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평화’롭다고 할 수는 없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아직 내전이 일어나고 있으며 국가 간에 무기는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을 겪은 세대나 겪지 않은 세대 모두 ‘평화’가 무엇인지 고민을 하면서 지난 시절 풀꽃처럼 떠나버린 호국영혼들을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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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15살 소년병이었던 신명호 군의 사진, 우)인천 학생 6・25 참전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