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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임금을

모실 수 없다”

목숨 바쳐 충절 지킨 사육신


글, 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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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 남효온 <추강집> 中


줄지어 세워진 공무원 학원들과 서울 최대 수산물 전문 도매시장인 수산시장, 허기진 공시생들의 배를 채워주는 컵밥까지. 노량진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충절(忠節)이 함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스러져 가버린 사육신의 정신을 기리는 ‘사육신공원’이 있다.

실패한 단종 복위 운동
계유정난(1453년)으로 수양대군은 왕권에 한 발 더 다가갔다. 문종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부탁한다고 부탁했던 김종서·황보인을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거짓으로 꾸며 죽인 수양대군은 병권을 쥔 채 요직을 겸직하면서 조정을 장악했다.

계유정난 이후 1년이 되던 1455년에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겁박해 상왕으로 앉히며 자신이 왕위를 받아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가 됐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2년이 되던 1456년 세종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이 단종 복위를 논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처형되고 유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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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등은 명나라 사신들을 초대해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 때 별운검으로 유응부와 성승을 세우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세조가 별운검을 세우지 않도록 명령을 한데다 세자도 병으로 연회장에 나오지 않자 거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유응부는 거사를 단행하고자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유응부)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며 말렸다.

이에 유응부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된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 호령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놓치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의 만류로 거사는 중지됐다.

하지만 유응부의 염려는 현실이 됐다. 함께 일을 도모하던 김질이 거사가 성공되지 않자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려 함께 반역을 밀고한 것이다. 세조는 주모자 6명을 당장 잡아들였다. 유응부는 세조의 국문 중에도 자복하지 않은 채 성삼문과 박팽년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지난번 사신을 초청해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하면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고 외쳤다.

이후 단종 복위를 주도한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 등은 1456년 7월 10일 수레로 찢겨 죽는 거열형을 당했고, 연좌제로 이들의 가솔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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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공원 내에 있는 사육신비
 

생육신과 사육신
사육신은 단종 복위를 주도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를 가리킨다. 생육신 중 한명으로 불리는 남효온이 <추강집>에 이들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적으면서 이들의 충절을 기리게 됐다.

세조 이후 사대부들이 이들의 신원을 요구하자 성종(成宗)은 이들의 후손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금고(禁錮)를 풀어줬고, 숙종(肅宗)은 6명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서원을 지어위패를 안치할 수 있도록 했다. 영·정조 대에는 사육신 외의 인물들도 관작을 회복시키고 <어정배식록>을 작성하도록 해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으로 희생된 이들의 위패 또한 안치하도록 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은 1434(세종 16)년에 급제해 집현전 학자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단종 때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됐으나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 박팽년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그의 재능을 아낀 세조가 회유를 했으나 끝까지 거절하다 고문으로 죽고 말았다.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를 주도했던 성삼문도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할 당시 예방승지였던 성삼문은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양위식을 담당했던 그는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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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문집(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목숨을 바쳐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이 있다면 목숨을 잃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이들도 있다. 바로 생육신(生六臣)이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이에 속한다.

김시습은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3일간 통곡을 하다 공부하던 책을 다 불태우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이후 방랑 생활을 하며 시와 글을 쓰며 지냈는데 그는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며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계유정난)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히면서 방랑 생활의 이유를 설명했다. 또 김시습은 거열형으로 찢어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임시 매장하기도 했다.

<육신전>을 쓴 남효온은 단종 복위 운동 당시의 인물은 아니다. 1454(단종 2)년에 태어난 남효온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 정여창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가 생육신 중 한명으로 꼽힌 것은 성종에게 올린 장문의 소와 <육신전>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시 25세였던 남효온은 성종에게 올린 소에서 “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을 복위해달라”고 요구했다. 소릉 복위는 세조와 함께 공신에 오른 이들의 명분을 부정한 것으로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이후 남효온은 1480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당시 계유정난의 공신이었던 훈구파가 집권하고 있었고 이에 남효온은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남효온은 벼슬을 단념하고 김시습처럼 유랑을 하면서 <추강집>을 저술했다. <육신전>은 <추강집>에 있는 내용이다. 그가 죽은 뒤 갑자사화 때 생전에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을 이유로 부관참시 당했으며 중종 때 소릉 복위가 되자 신원된 후 정조대에 이조판서로 추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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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사육신 중 박팽년의 묘 우) 사육신 중 이개의 묘
 


논란의 사육신공원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 함석헌 <씨알의 소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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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육신 공원 내에 있는 의절사에서는 매년 10월 9일에
사육신 추모제향을 한다.
아래) 의절사 내부. 7개의 위패가 있다.
 

사육신공원은 노량진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공무원 입시생들이 다니는 학원 숲을 지나면 나온다. 조금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그 뒤편으로 묘가 있다. 또 조금 더 올라가면 사육신 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당에 들어가면 위패가 7개가 나온다. 묘 또한 7기로 조성되어 있다. 여태 우리는 사육신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명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칠신이었다는 말일까.
위패를 나란히 보면 낯익은 듯 낯선 인물의 위패가 보인다. 이름은 김문기. 그는 누구일까. 김문기는 세종대에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등을 거쳐 1453(단종 1)년에 형조참판에 올랐던 인물로 단종 복위 운동에도 함께했다.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된 김문기였지만 남효온이 쓴 <추강집>에서 사육신으로 명단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1731(영조 7)년에 복관됐고 정조 때 편정한 <어정배식록>에 삼중신(三重臣)으로 민신, 조극관과 함께 명단에 올랐다. 앞서 말했던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명은 <추강집>의 기록대로 ‘사육신’으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삼중신’ 중 하나인 김문기는 왜 사육신 묘에 함께 있게 된 것일까.

사육신공원이 조성되던 1977년의 기록을 봐야 한다. 당시 서울시는 사육신공원을 재정비 하면서 묘역에 없던 하위지와 유성원의 묘를 새로 만들어 모시려 했다. 그러자 김문기의 집안인 김녕 김씨 종친회가 “사육신에는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에 서울시는 문교부를 통해 국사편찬위원회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의뢰하자 국사편찬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결정했다.

서울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이 결정에 따라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를 추가로 설치했다. 다만 유응부의 묘도 그대로 두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은 사육신 논쟁이 됐다. 유응부의 천녕 유씨 종친회와 ㈔사육신현창회 모두 반발했다. 그러자 국사편찬위원회는 결국 1982년 “종래 사육신을 변경한 적이 없다”고 다시 말했다.

분명 정조 때 <어정배식록>에서 사육신과 삼중신을 구분했음에도 이런 논란이 발생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육신공원에 위패와 묘를 모신다고 해서 충신이고, 뺀다고 해서 충신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사육신과 삼중신 모두 2명의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신념 아래 목숨을 바친 충절을 지킨 충신들이었다. 이 충신들의 충절을 우리가 감히 더하다, 덜하다 논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노량진은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인 공시생들이 모인 곳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공시생들이 휴식을 하기 위해 사육신공원을 찾는다. 위로 올라가면 탁 트인 한강을 볼 수 있고 공원 조성도 잘 해놨기 때문이다. 불꽃 축제 때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공원을 찾는 이들이 바라볼 때 사육신의 충절을 흐리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원을 예쁘게만 조성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공원 조성의 일부분이라 할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의 충절이 퇴색되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 전달은 분명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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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공원 내에 있는 사육신 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