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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10 양주 대모산성과 보루군


양주 대모산성,

대 고구려 요새

유적의 보고


남방 공격의 대로 철옹성 그대로 남아
불곡산에 보루성… 큰 테미 새 발견 마한 유적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백은영,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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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의 보고(寶庫)다. 백석읍 어둔동 속칭 성골에 있는 ‘대모산성(大母山城, 사적 제526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지척의 거리에 고구려 유적이 가장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은 대부분 성지, 보루(堡壘)다. 왜 이곳에 고구려 보루 등이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일까.

양주시는 북으로는 ‘동두천-연천’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다. 특히 남쪽으로는 한산(漢山, 아차산)과 직선도로로 연결된다. 4~5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 백제왕도 위례성을 공격했을 당시 남하루트였다.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약 22㎞)로 옛날 도보로도 하루에 닿을 수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권 제11권 양주목(楊州牧) 기록을 살펴보자.

“동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25리이고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된다. 가평현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 경계까지 75리다. 북쪽으로는 적성현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고구려는 교통의 요충인 양주를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겼다.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세는 흡사 항아리 입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호명산(425 ), 흥복산(463 ), 동쪽으로는 천보산(335 ), 북으로는 불곡산(佛谷山, 450 )이 옹립하고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양주 산악
풍경(見州 가는 도중에)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깎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가네
(截然三嶺揷靑天 峻路長氷馬不前)

고구려가 양주에 대규모 관방유적을 구축한 것은 이곳의 산세가 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유사시 고구려 군사들은 치소인 대모산성이 점령당할 위기에는 산성으로 피신하기가 용이하다. 그동안 불곡산에서만 9개의 고구려 유적인 보루가 조사되었다.

한강변 일대의 고구려 보루 유적 중 가장 많은 곳이 광나루에 있는 아차산이다. 그런데 양주시의 경우 그 숫자를 넘고 있다. 그리고 천보산과 회암산에서도 보루 유적이 조사되었다. 앞으로도 조사되지 않은 새로운 보루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양주는 고구려 지배 이전에는 마한, 백제의 강역이었다. 인근의 포천(馬忽, 반월성)과도 같았다. 대모산성을 조사하면서 극명하게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한 시기까지 올라가는 고식의 판축성이 찾아지고 그 위에 철옹성 같은 고구려식 석축성을 확인했다.

양주 대모산성도 포천의 반월성, 충주 장미산성, 직산 사산성 등과 더불어 남한 지역 고구려 산성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싶다. 보존상태도 아주 좋다.

오늘은 마한과 백제 고구려 신라의 역사가 점철된 유적의 보고 양주시를 가본다.

고구려의 ‘매성’ ‘창화군’

<동국여지승람> 권 11에는 양주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 ‘매성(買省)’ 혹은 ‘창화군(昌化郡)’이었다고 기록된다. 신라의 영토가 된 뒤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다(本 高句麗買省郡 一云 昌化軍 新羅 景德王 改 來蘇云云).

언어학자들은 ‘매성’을 마홀(馬忽)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근 포천에 있는 반월성 고구려 성지 ‘馬忽’과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매(買)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물(水)’로 표기되어 있다. ‘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골’의 음전(音轉)으로 ‘고을’ 혹은 ‘성’을 뜻한다. 매(買)가 물을 뜻하고 홀이 성(城)을 나타내므로 ‘물가의 성’ 또는 ‘물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경기도 수원의 고 이름인 ‘모수’의 ‘모’와 ‘매홀’의 ‘매’는 음이 비슷하기 때문으로 매성을 이곳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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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대모산성
 

‘모수국(牟水國)’은 중국 지안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백제로부터 정복한 성 가운데 하나인 모수성(牟水城)에 해당된다. 그런데 모수성과 같이 비문에 나오는 성들이 대부분 한강 이북에 걸쳐있는 성들이다.

구모로성, 약모로성, 간저리성, 모수성, 모로성(臼模盧城, 若模盧城, 幹氐利城, 牟水城,牟盧城)이다. ‘약모로(若模盧)’는 옛 표기로 ‘소모로’, ‘모로성(牟盧城)’은 그대로 ‘모로골’이므로 각각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의 ‘승량’과 경기도 포천 또는 양주의 일부가 된 ‘견주(見州)’로 비정되고 있다.

필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 모수성이야 말로 양주로 비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와 학술 논문을 통해 규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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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대모산성 입구에 있는 고인돌


백제 이전 마한 ‘모수국’
‘모수국(牟水國)’은 마한 54개국 중 하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삼한에 대한 소개와 함께 마한의 소국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마한 54개국은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분포하였으며 모수국은 원양국(혹은 애양국. 필자는 지금의 청주시 부모산(애양산) 아래 비하리로 비정)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기록된다.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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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성 성벽(북문지 옆)

 


사실 한강유역에서 있던 백제국도 마한의 일국이었으며 북쪽에서 온 부여계 온조가 이곳 땅을 빌어 살다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모수국이 동이전 한조 머리 부분에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세력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양주시에서 마한의 유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백석읍 평지에 구축된 대모산성은 마한과 백제, 고구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성지다. 왜 이곳 성을 ‘대모산성’이라고 부른 것일까. ‘큰 성’ ‘한메성’ 즉 읍성, 치소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왕성이나 큰 성을 ‘大母山城’으로 부르거나 표기했다(글마루 2019. 11월호 진천 대모산성 참고).

글마루 취재반은 대모산성을 답사하면서 매우 주목되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을에서 성지로 올라가는 입구 경작지에서 매우 큰 고인돌을 확인했다. 정방형의 고인돌은 인위적으로 커다란 바위위에 올려놓아져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부족장의 유물이다. 이를 보면 백석읍 일대의 평야를 다스렸던 마한의 치소로도 이곳을 지목할 수 있다. 그리고 대모산성은 삼국 기 초기 토성과 판축성이 혼재 한 가운데 구축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마한에서 초축된 성지를 백제시기 판축성으로 구축한 다음 고구려 점령 시기인 4~5세기에는 견고한 석성으로 다시 보축한 것이다.

대모산성의 초축 형태는 춘천 우두산성, 안성 도기동 산성, 진천 대모산성 등 초기 철기시대인 마한 유적을 방불하고 있다. 산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외면은 삭토(削土)하여 적들이 성을 공격하는 데 어렵게 만들었다. 제일 윗면에는 흙을 다져 쌓고 간혹 판축에 이용된 할석이 나타난다. 할석을 넣고 다져 쌓은 것은 백제 축성방법이다. 이곳에서 작은 파편이지만 조질 연질토기 조각을 찾았다.

모래가 많이 섞인 이 토기 잔해는 대모산성의 초기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의 판축성을 가지고는 신라세력을 방어할 수 없음을 알고 이곳에 요새를 구축한다. 그것은 돌을 잘 다듬어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돌을 어디서 조달한 것일까. 주변에는 평지이며 석재가 나는 것이 없다. 고구려 군사들은 불곡산 혹은 천보산에서 돌을 실어 나른 것일까.

고구려식 들여쌓기 축성
대모산은 해발 212 로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 방성리에 연접해 있다. 평지형을 이루고 있는 대모산의 산꼭대기를 돌아가면서 돌로 견고하게 쌓았다. 테메식으로 보이지만 백제 초축을 감안하면 2~3중의 계단식 축성으로 이례적인 방식이다.

축성방법은 장방형의 돌을 다듬어 비스듬하게 들여쌓기로 하여 고구려식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해준다. 고구려왕도 국내성, 환도산성, 오녀산성 등에 나타나는 축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식을 보여주는 치(雉)는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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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대모산성에서 찾아진 와편

 


양주 대모산성은 <삼국사기> <세종실록>의 기사를 근거로 매초성(買肖城)으로 비정(比定)되기도 한다. 매초성은 675년 신라군이 당나라 대군 2만 명을 대파한 곳이다. 그러나 필자는 매초성은 지금의 연천 소성리산성으로 비정한 바 있다(2020년 글마루 3월호 연천 매초성 다룰 예정).

이밖에 <여지승람> <만기요람(萬機要覽)><경기지(京畿誌)> <경기읍지(京畿邑誌)><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서 양주 대모성산(大母城山), 대모산성(大母山城)의 기록이 확인된다.

문화재 대관에는 성벽의 둘레를 1400 로 기록하고 있으나 아래 마한시기부터 구축한성을 포함하면 훨씬 길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높이는 4~5 안팎이나 너비는 주변의 지세에 따라 가파른 남쪽은 6 , 완만한 북서쪽은 8 쯤 된다. 서북쪽 성벽이 잘 남아있다.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성 내부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 있으며, 지표에는 둥근 주춧돌 여러 개가 노출되어 있고 또 주변에는 많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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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천보산 고지도

 


글마루 취재반은 산성에서 마한시기 조질 토기조각과 고 신라 와편을 찾았다. 신라 와편은 굵은 선조문으로 회색을 띠고 있다. 경주 왕도 반월성(재성) 유적에서 찾아지는 유형의 와편이다. 신라군은 고구려로부터 성을 정복하고 많은 건축물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찾아지는 것은 고려, 조선시대 와편이다. 나뭇잎이 쌓여 적색의 고구려기와는 찾지 못했다.

천보산이 병풍처럼 막아선 ‘큰 테미’
양주시에서 또 주목되는 곳이 바로 고읍지구에 있는 ‘큰 퇴미’다. 해발 219 의 이 구릉산은 불곡산과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대모산성에 이어 마한 시기 치소가 될 수 있는 입지적 환경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대모산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퇴뫼 혹은 테미는 바로 토성을 지칭한 표현이다. 전국적으로 퇴미라는 지명을 조사하면 반드시 토성의 유구를 찾을 수 있다. 양주 큰 테미는 과연 어떤 역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까. 혹 마한 모수국의 고지는 아닐까.


취재반은 대모산성에 이어 2차로 ‘큰 테미’를 조사했다.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이 다 그렇듯이 큰 테미도 육안으로는 밋밋한 구릉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완연한 토축의 성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취재반이 밝힌 개가이다.

이 토성이 대모산성보다 앞선 시대의 유적이라고 보는 것은 토루에 할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외벽은 삭토하고 흙을 다져 토루를 만든 형태다. 주변에서 토기편이 수습된다. 마한 모수국 시기로 보이는 와질토기 조질 적색토기 파편이 수습되고 있다. 성 안에는 넓은 대지가 나타나고 있다. 이 성에 대한 비밀을 풀려면 확대된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취재반은 성지에서 수많은 고분군을 확인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고분은 초기 철기시대 특징인 석관묘로 보이며 고분이 발견된 지역에서는 많은 석재들이 나뒹구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눈이 쌓인 현장에서 초기 철기 시대 토기편 등 유물은 확인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양주 모수성을 점령한 후 이 ‘큰테미’보다는 방어와 취락에 이점이 있는 대모산성 지역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대모산성 정상에 견고한 고구려식 석성을 축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주시 문화재 당국의 특별한 관심과 학술조사 등 조치가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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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특징인 석관묘로 보이는 고분군이 확인됐다.

 



주목되는 불곡산 보루군
양주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 불곡산(佛谷山)이다. <여지승람>에는 ‘주 북쪽 3리에 있는데 진산(佛谷山 在州 北 三里 鎭山)’이라고 나와 있다. <여지승람>에도 ‘불곡사(佛谷寺)가 불곡산에 있다’고 되어 있다. 불곡사는 현재 백화암(白華庵)으로 불린다.

898(신라 효공왕 2)년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불곡사라 불렀다. 1592(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598년 광종화상이 중건하고 1868년 축성루를 세웠으며, 1923년 주지 월하가 중창하였다. 6・25전쟁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56년 성봉스님이 복원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불곡산에는 고대 보루(堡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보루는 적은 군사를 가지고 성을 수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어시설이다. 고구려는 남방지역을 공략하면서 대규모의 군사력 유지가 힘들었으므로 이 같은 방식의 관방시설을 영위했다.

백제 왕도인 한성을 지배하면서도 아차산, 용마산에 다수의 보루를 구축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임진강 유역의 관방 시설은 보루형태가 지배적이다(호로고루, 당포성 등 유적).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각 발굴된 보루의 크기는 대부분 전장이 100 가 채 안 되는 소형이다. 가장 큰 것이 80 인 아차산 4보루이다. 출토되는 철촉과 무기류를 통해 주둔인원을 산출해보면 작게는 10여 명 많은 경우에는 100명까지도 주둔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보루를 구축하여 적을 방어한 것은 고구려 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백제도 국경지역에 산 능선을 연결하는 보루를 세워 신라를 방어했다. 대전 인근 회덕 계족산 능선에 구축된 보루군은 백제에서도 보루를 구축했음을 보여준다.

불곡산 보루군(佛谷山 堡壘群)도 고구려 축성술을 한눈에 보여준다. 왜 이곳에 많은 보루를 쌓았을까. 불곡산은 양주시에서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로 양주 분지 일대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어 사방 조망이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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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큰 테미 정상 주변의 모습

 



외딴 길을 지켰던 독바위 보루
양주시 옥정동 속칭 독바위 정상부에 위치에 있는 나 홀로 보루다. 천보산 보루(天寶山 堡壘), 불곡산 보루(佛谷山 堡壘), 도락산 보루(道樂山 堡壘) 등과 연결되고 사방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독바위’라는 명칭은 산 정상부가 독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는 높이 181 이며 주변에 산이 없는 독립된 구릉이다. 서울 광진구 아차성 아래에 있는 홍련봉 보루를 연상시킨다.

독바위 보루는 동두천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으로 남하하는 적들을 저지하도록 만든 요새다. 이 보루는 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북쪽과 서쪽은 자연 암벽 경사면을 이용하였고, 성벽 높이는 2~3m 정도로서 가파르다. 성 내부에는 벽체 일부로 추정되는 붉은색 소토 덩어리가 있어 성내 건물 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집수 시설로 직경 2m, 깊이 50㎝의 구덩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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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독바위 보루

 


1998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성벽은 토사에 덮여있으며, 독바위 보루 정상부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완형에 가까운 적갈색 연질 토기호와 흑색 마연된 토기 항아리가 수습되었다고 한다. 양주시는 지금도 정상부 토루를 발굴 중이다.

그런데 당초 고구려 보루로 알려진 경기도 양주 독바위 보루가 최근에는 백제가 세운것이란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것은 발굴결과 5세기 백제 유물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백제 고유의 회색 타날토기를 비롯해 고구려 적갈색 토기, 신라시대 고배도 출토됐다. 그러나 백제계 연질 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아무래도 대모산성의 예처럼 백제 초축였던 보루를 고구려 신라가 차지 이용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취재반은 눈발이 내리는 12월 초순 독바위 보루 성지를 조사했다. 취재반은 보루에서 남북으로 길게 포곡식을 이루는 토루를 찾았다. 이는 학계가 밝히지 못한 것으로 단순히 보루성이 아닌 백제 시기 산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구축된 토축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삼국시대 치열한 전쟁으로 마한 백제에서 고구려로 주인이 바뀐 것을 이 성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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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양주 독바위 내 제를 지낸 것으로 추측되는 바위, 우)양주 독바위 보루 발굴 조사 중인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