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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죽음,

백성들이 알아보다

충민 임경업 장군


글, 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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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사당
 


역사 속에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역사책보다 문학책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임경업 장군. 그는 고대소설의 <박씨부인전(박씨전)>에 나오기도 하고 <임경업전>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임경업 장군은 어떻게 소설 속에 나오게 됐을까.

전란 중에 나타난 영웅
1594년 충주 달천에서 태어난 임경업은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다. 1618(광해군 10)년 동생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면서 정계에 진출한 그는 인조 때 발생한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무과에 급제했던 그였지만 1626년 낙안군수로 부임하면서 선정을 펼쳐 백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그러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서울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도착했을때 이미 강화가 성립된 뒤여서 낙안군으로 소득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1633년 평안도 청천강 북쪽의 방어를 맡고 있는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쌓았다. 조정의 지원으로 명나라와 교역을 확보하면서 친명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이번에야말로 임경업은 싸우고자 했지만 싸울 수 없었다. 임경업이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청군은 인조가 있는 서울로 곧바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을 마치고 청나라로 돌아가던 뒤를 공격한 임경업은 기병 약 300기를 없애고 포로로 끌려가던 100여 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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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충렬비 우 정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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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 묘소
 

명과의 의리를 지키다
청은 조선과 강화를 맺은 뒤로 명을 치기 위한 병력을 조선에게 요청해왔다. 조선은 여러 차례 응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임경업을 내세워 명나라를 치도록 했다. 하지만 임경업은 진격하는 척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 조달이 어렵다며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인조는 그 모습에 말 한필과 의주부윤의 자리를 임경업에게 줬다.

이후 청은 명의 근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게 병력과 군량미 지원을 더 요구했다. 조선측은 임경업을 통해 군량미 1만 7000여 석, 세공청국미 1만석 가량을 싣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를 명에게 몰래 알린 임경업이 제대로 싸우지 않자 청은 볼모로 잡혀있는 소현세자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명과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채 조선으로 돌아온 임경업에 대해, 청은 조선 정부를 압박해 삭탈 관직하도록 했다. 그러다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청에 잡히면서 명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났다. 청은 조정에 압력을 가했고 조정은 임경업을 체포해 청나라로 압송하기에 이르렀다. 임경업은 압송되던 도중 황해도에서 도망쳤다. 겨울동안 승려로 숨어 지내며 망명의 기회를 엿보던 임경업은 명나라로 망명했으나 청나라가 북경까지 함락시키자 임경업도 잡히고 말았다.

이때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어 있다 하여 청에 임경업을 처단하기 위해 송환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임경업은 친국을 받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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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유물전시관 내부(충렬사원지: 충렬사 연혁과 임경업 장군・그 부인의 사적을 적은 책)
 

억울한 누명을 벗다
임경업은 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명의 의리를 지켜 민족의 자존심을 높인 인물로 칭송됐다. 송시열 등 사대부들의 입으로 전해져 오면서 충신·명장으로 칭송됐으며 민중들 사이에서는 <임경업전>과 같은 이야기로 인해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숙종 23(1697)년에 복관된 그를 위해 충주에서는 충렬사, 선천에서는 충민사 등에서 제향됐다. 특히 그가 나고 자란 충주에서 그를 위한 사당을 세웠고 영조는 이곳에 충렬사라 사액하였다.

그는 장수로서 이름을 떨쳤지만 청과 제대로 전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얼마나 장수로서 답답했을까. 그래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구전으로 <임경업전>이 전해지며 그를 더욱 기리는 것 같이 행했다.

지금 청주에 가면 충렬사 안으로 그의 유품들을 모아놓은 유물전시관이 있으며 사당 앞에는 정조가 건립한 충렬비와 영조가 만들어준 그의 부인 이씨의 정렬비가 함께 있다. 그의 부인 이씨는 임경업 장군이 명에 망명해 있을 때 청에 붙잡혀 압송되던 중에 자살하고 말았다.

임경업 장군이라는 인물을 놓고 보면 어떤 이는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명의 의리만을 지키려 했던 모습을 어리석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명과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면서 매우 친밀해져 있는 상태였고 어찌보면 뒤늦게 나타난 청보다는 명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후대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과 그 죽음을 백성들은 이야기를 통해 잊지 않으려 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남길 수 있는데 결국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후대의 평가인 것이다.

당시 떵떵거리며 잘 살았어도 오늘에 와 친일사전에 올려져 있는 친일파들의 이름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임경업 장군은 당시에는 억울하게 죽었어도 백성들과 후대가 잊지 않았고 억울함을 신원시켜 줬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갈 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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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도다
장부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석자 추련도를 십년 동안 갈고 갈았도다.
임경업 장군 칼에 새겨진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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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내부 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