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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지킨 고구려

‘공목달’


당포, 은대리 백제성 점령 후 성지 보축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백은영,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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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7 연천 당포. 은대리성을 가다
 


연천 고구려 유적의 보고
백제 땅이었던 경기도 연천(漣川)은 4세기 후반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다. 광개토대왕이 호로고루성을 정복한 시기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장악하고 백제가 쌓아놓은 몇 개의 토루식(土壘式) 성에다 고구려식으로 보축하여 기능을 보강했다. 호로고루 인근 당포와 연천읍과 가까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 지점인 은대리에도 읍성형태의 고구려유적이 찾아진다.

그렇다면 이 일대는 ‘호로고루-당포-은대리’를 잇는 광역의 고구려 사이트다. 한반도에서 이처럼 집중적으로 고구려 유적이 밀집해 있는 곳은 드물다. 가히 고구려 유적의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 선사박물관 이외 고구려 역사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명분을 입증하고 있다.

당포와 은대리성은 역사,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어디에서 그 많은 석재를 가져 온 것일까. 연천 임진강 일대는 화산암인 현무암지대다. 흔히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곰보돌이 많다. 땅을 파면 많은 양의 현무암이 노출된다. 그리고 한탄강 강변에는 각종 풍부한 석재들이 즐비하다. 고구려군사들이 석재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연천군 전곡리 주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에서도 고구려성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연천 주변의 보개산 寶蓋山), 웅섬산(熊閃山) 등이다. 고구려는 대부분 높은 산을 의지하여 포곡식을 성을 쌓았다. 중국이나 평양 등지에서 조사되는 고구려 주요성들은 대부분 포곡식이다.

은대리, 당포, 호로고루가 임진강 수로를 방어하는 읍성이자 요새라면 유사시 주민들을 보호할 난공불락의 산지성이 있어야 한다. 산성을 조사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다. 역사학자들도 피하는 것이 산성연구다. 연천군내 산성 조사는 앞으로 젊은 학도들이 규명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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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성
 


백제의 곰뫼성 ‘공목달’로
연천군 기록을 보면 백제 때 ‘곰뫼성’ 혹은 ‘고모루성’이었다가 ‘공목달(工木達)’ ‘웅섬산(熊閃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공목달은 고모루와 음이 비슷하고 웅섬은 곰뫼성과 닮아있다.

고모루, 곰뫼성은 백제식 표현으로 공주(熊津)를 곰나루, 고마나루로 부른 것과 같다. 유독백제 땅에서 고마라는 이름이 많이 전해내려온다. 중국 <북사>에는 백제의 도읍지를 ‘고마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고마’와 관련된 땅이름으로 ‘고미현(곤미현)’ ‘고마미지현(무진주)’ ‘고마지(고노현)’ ‘고마며지현(마읍현)’이 나타난다. ‘공목달’은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기록된다.

‘한산주 공목달현(工木達縣)은 경덕왕이 공성현(功城縣)으로 개명했는데 지금의 장주(獐州)’라는 기록이 있다. ‘공목’은 ‘고마’의 다른 표기였으므로 ‘웅(熊)’의 뜻이며 ‘달(達)’은 고구려계 땅 이름인 ‘산’이나 ‘고(高)’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 연혁조에 “연천군(漣川郡)은 본래 고구려 공목달현(工木達縣)으로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불리었다. 신라에서 공성(功成)으로 고쳐서 철성군(鐵城郡) 영현으로 만들었다. 현종 9(1018)년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5(117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기록된다(本高句麗工木達縣 一云 熊閃山 新羅改功城爲 鐵城郡領縣 高麗 改爲 獐州..顯宗九年屬 東州明宗五年 名改今云云).”

조선 세종 때 경기관찰사를 지낸 최부(崔府)는 연천을 가리켜 ‘산들로 에워싼 곳’이라고 예찬했다. 이 시기 문사 성개(成槪)는 조용한 마음으로 연천을 노래했다.

공사 끝내고 책상에 의지하여 / 우연히 남산을 바라보니 / 새는 푸른 언덕으로 들어가고 /구름은 푸른 바위구멍에서 나오네 <조선 팔도노래>라는 운문이 있다. 작자미상의 이 노래 속에 연천송이 있다.

(전략)
고구려 공목달(工木達)이다가 신라에는 공성(功成)이라.
고려의 장주(漳州)라가 충선왕 때 연천이다.
다른 이름으로 웅섬산(熊閃山) 장포(獐浦)로도 불렀다.

보개산(寶蓋山) 오봉(五峯) 견불(見佛)은 동쪽에 솟아있네.
차탄(車灘) 여울 너머로 가사평(袈裟坪) 펼쳐지고
징파도(澄波渡) 나룻배는 장단(長湍) 임진(臨津) 건네주네.
길손을 건너게 하는 뱃사공이 고맙구나.

송절원(松折院) 옥계역(玉溪驛)에 김극기(金克己)의 고향 시요
오봉산에 오봉사(五峯寺)요 보개산에 고성(古城) 있네.
(하략)


글마루 취재반은 지난호에 이어 연천 땅을 답사했다. 당포성, 은대리성도 모두 중요한 고구려 유적이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성지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주상절리 위에 세운 당포성
주상절리(columnar joint, 柱狀節理)는 한탄강에 있는 아름답고 절묘한 절벽 층위이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은 주상절리의 신비로움 때문이다.
주상절리라는 어떤 것인가. 절리에는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서 판상(板狀)절리와 주상절리가 있는데 주상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육각형, 오각형 등 다각형의 장주상(長柱狀: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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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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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에 대해 설명 중인 이재준 역사연구가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 되는 데 이때 식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자료를 인용하면 용암은 표면부터 식을 때 균열이 육각형 모양으로 형성되고 점점 깊은 곳도 식어가면서 균열은 큰 기둥을 만들어낸다.

주상절리 위에 세워진 당포성은 현재 사적 제4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지리지에는 당포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미수 허목(眉叟許穆)의 <기언별집(記言別集)> 제15권 ‘무술주행기’에 “마전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 진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가 있고, 그 앞의 나루를 당개라 하며 큰 물이 흘러 나룻 길로 통한다”고 기록, 당포성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당포성은 현재 전곡읍의 서북쪽 임진강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과 그 지류에 의해 형성된 천연적인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된 강안 평지성이다. 호로고루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그렇다면 호로고루와 당포성을 점령한 고구려 군사들이 참가하여 비슷한 요새를 구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단애지대를 남북으로 가로막아 축조하였기 때문에 서쪽 부분이 뾰족한 모양인 삼각형 형태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동쪽 성벽은 매우 높게 되어 있으며 단애지대를 따라 조성된 남북의 성벽은 낮게 축조되었다.

당포성도 호로고루처럼 큰 성은 아니다. 서쪽 끝에서 동벽까지의 길이는 200 , 동벽의 길이는 50 , 전체 둘레는 450 이다. 이 성의 특징은 보축벽이 3~4중이며 높게 쌓았다는 것이고, 성벽 밖에 폭 6 , 깊이 3 의 대형 해자가 있다. 특히 성벽 상단부위에 이른바 ‘구멍기둥(柱洞 또는 石洞)’들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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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당개나루
 


발굴 당시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 홈이 파여져 있고 그 끝에 동그랗게 판 확(確)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학자들은 고구려성인 평양의 대성산성의 중간 벽과 호로고루의 체성 벽 안쪽 내벽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고구려의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성 기초부의 중심부는 흙으로 다짐을 한 백제식 판축으로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이 성의 본래 주인이 백제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판축(版築) 위에 체성 벽이 올라가고 체성 벽 바깥쪽에 보축성벽을 쌓아 체성 벽의 중간부분까지 이르도록 했다. 그리고 보축성벽의 바깥 쪽에는 중간부분까지 다시 점토로 보강했다.

당포성의 축성기법은 토성과 석성의 축성기법을 결합한 구조다.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의 축성기법과 동일한 기술적 일면이지만 남한지역에서도 많이 확인되었다. 글마루 취재반이 조사한 파주 반월성지, 양구 비봉산 성지, 충주 장미산성지, 단양 적성지 등에서 이 같은 방식의 축성술이 확인되고 있다.

취재반이 수습한 고구려 잔영
9월이 되니 제법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취재반은 당포성부터 답사했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이곳을 지인들과 답사한 적이 있다. 당시는 정비가 안 돼 이곳저곳에서 많은 와편을 볼 수 있었다. 농로를 걷다 구석기 유물인 뗀 석기를 수습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이 두 번째 답사 길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당포성 풍경은 호로고루와 너무도 흡사하다. 잘 정비된 석축의 성벽, 말끔히 정돈된 성안의 잔디밭은 오히려 고색창연했던 옛 모습을 잃고 있다.

취재반은 여러 곳에서 삼국 역사의 편린을 찾았다. 연질의 회백색 백제 와편과 토기편 적색의 고구려 와편을 수습했다. 신라계도 찾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 와편이다. 이는 호로고루성의 예와 같다.

적색의 와편은 격자문, 사격자문 또는 승석문들이다. 호로고루 혹은 포천 반월성, 양구 비봉산 출토와편들과 흡사하다. 속리산이 가까운 괴산 청천리 도원리 사지에서 수습한 기와를 닮은 것도 있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색은 적색이었다. 궁궐을 빨갛게 칠하고 기와도 빨간색만을 사용했다. 이들의 신앙은 태양이었다. 바로 천제의 후손이었으므로 태양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를 엠블럼(상징, 문장紋章)으로 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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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주먹도끼(왼쪽)와 구석기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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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대리성에서 바라본 삼형제바위의 모습(수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다)
 


적색의 깃발을 들고 다닌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확실한 표지를 세웠다. 바로 붉은색의 건물이다. 그것이 지붕을 덮는 와당으로도 증명된다. 호로고루 당포성에는 와당을 사용한 장엄미의 붉은색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취재반은 건물지 옆의 돌무더기 위에서 구석기 긁개 한 점을 찾고 인근 경작지에서 여러 점의 구석기 유물을 수습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주먹도끼(사진, 39p) 한 점이었다. 이로써 호로고루 이어 당포성도 광범위한 구석기 유적임을 확인한 것이다.

은대리성 내외성을 갖춘 읍성
은대리성도 사적 제469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판축 축조방식의 읍성형태이다. 외성의 전체규모는 1069 이고 내성의 둘레는 230 이다. 삼국기 초기 왕성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규모가 작지 않다.

이런 형태의 축성기법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의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된다. 충북 진천(鎭川) 대모산성도 비슷한 형태를 보여준다. 대모산성은 평지 이중성으로 초기 백제성으로 추정된다. 이 성도 고구려가 진천(고구려식 지명 만노군萬弩郡)을 점령한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인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성은 고구려 고뫼성, 공목달시기 치소일까.

이 성도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의 형태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지류와 만나 형성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성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청동기 시대 유물인 고인돌 2기가 남아있다. 그리고 은대리성 주변에서도 구석기의 흔적이 찾아진다. 이를 감안하면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인류가 살았음을 알려준다.

은대리 고인돌의 제원은 다음과 같다.

약 40 의 절벽으로 형성된 용암대지위의 소나무밭 사이에 3 정도의 간격을 두고 고인돌 2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1호는 동쪽 고인돌인데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며 평면은 직사각에 가까운 긴 타원형이다.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하나 모서리 일부분이 절단된 상태이다. 서쪽 고인돌인 2호는 평면의 형태가 타원형인 뚜껑돌이 동서로 양분되어 부서져 있다. 뚜껑돌의 방향으로 보아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부는 겉으로 보기에 확인되지 않으나 땅 밑 20㎝ 정도에서 석재(石材)를 확인할 수 있다(두산 백과사전 참고).

은대리성에 관한 문헌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95년 연천문화원에서 발간한 향토사료 집에 최초로 보고되어 있다. 이후 육군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지표조사보고서(京畿道 漣川郡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에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2003년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에 의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성벽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사보고서에는 은대리성의 평면은 삼각형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방형의 성이 아닌 것도 흥미롭다. 아마 자연 지세를 가능한 이용했음을 알려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는 강변의 자연단애를 이용하였으며 동쪽 평탄지에만 지상성벽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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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에서 바라본 모습
 


이 보고서를 보면 성벽의 높이는 호로고루나 당포성에 비하여 낮고 견고함도 떨어진다. 이는 전략적 성이라기보다는 읍성의 형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조사에서 노출된 성벽의 단면을 보면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 부분은 점토와 모래로 판축을 하였고, 성의 외벽과 내벽만 석축을 한 구조이다. 이는 백제식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성들은 임진강 주변의 백제 초기 유적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은대리성의 축성기법이 호로고루나 당포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백제 토성을 이용하여 읍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벽의 외벽에 보축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점 성벽의 높이가 높지 않지만 남벽과 북벽에도 동일한 구조의 지상성벽을 쌓았다는 점이 그렇다.

7세기 중반 호로고루나 당포성은 신라에 의한 정복되었다. 동벽 바깥에는 석축성벽을 덧붙여 신라에서 쌓은 흔적이 확인되며 내외성을 구분한 토루에서 석축의 유구를 확인활 수 있다. 신라가 점유한 이후 보축한 것을 알려준다.

고구려성 특유의 치성 확인
조사보고서를 보면 문지 3개소를 비롯하여 대형건물터 1개소, 치성(雉城) 3개소가 확인되었다. 문터는 북벽과 남벽의 비교적 지형이 낮은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북벽에 있는 2개의 성문은 배수기능도 겸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규모 건물지는 이곳을 다스리는 관아 건물이 아니었을까. 건물터는 남벽에 인접한 외성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데 건물의 외곽담장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사방에 3 폭으로 무너져 있다. 담장의 내부공간은 동서 60 , 남북 30 정도나 된다.

고구려 특유의 ‘치성’은 성의 북동 회절부와 북문터 서쪽 및 남문터 서쪽에서 확인되었다. 북문터와 남문터 서쪽의 치성은 8×5 의 동일한 규모로 체성에서 ‘ㄷ자’ 형태로 돌출시켜 성문의 방어력을 높였다. 흡사 포천 반월성 충주 장미산성의 치성을 연상시켜준다. 이처럼 성문 주변에 방형 치성을 설치하는 구조는 고구려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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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당포성에서 찾아진 구석기 유물, 우)당포성에서 찾아진 와편
 


연천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절실
연천군은 선사문화유적의 보고이다. 글마루 답사반이 이번 당포성에서 수습한 구석기 유물은 매우 중요하다. 전곡리 유적을 더욱 뒷받침 할 수 있는 유물이며 연천군 한탄강, 임진강 유역이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의 보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적들은 많이 파손되지 않았으며 향후 발굴을 통해 더 많은 자료들이 찾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호로고루 당포, 은대리에서 확인한 고구려 유적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했다. 이곳에서는 1500년 전 고구려 왕도였던 중국 지안이나 북한 평양성에서 발견되는 적색의 기와가 찾아졌다. 다양한 무늬의 평기와도 다수 확인 되었다. 이 기와들은 남한지역에서 찾아지는 고구려계 와편의 비교연구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천제의 아들 주몽이 건국하여 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던 고구려. 그 문화는 매우 강열하고 다양함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통해 임진강은 주목받았던 터전이요 역사의 무대였던 것이다. 고구려 유적이 산재하므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고 있다.

이 지역은 북한 땅과 인접하여 개발이 안 됐다. 그것이 이 지역의 유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게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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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주상절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