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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의병장 의암 유인석,
붓과 칼을 들다

글, 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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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 기념관 내부
 


“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지극히 스스로 통탄(痛嘆)해야 할 것입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대대로 피맺힌 원수 왜적(倭賊)을 이겨 없애야합니다. 우리의 임금을 지극히 높은 지위로 되돌려 모시고 우리 백성을 쾌활한 땅으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인석은 다만 죽음을 무릅쓰고 영원히 의병의 깃발을 굳게 잡을 뿐입니다. 융희(隆熙) 4년 음 7월 21일 동포인(同胞人) 13도의군도총재 유인석이 통곡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재배합니다.”

- 1910년 8월 25일 ‘다시 십삼도의 대소 동포에게 통고함’ <의암집> 37권 中


불안했던 1890년대, 아침의 나라 조선은 어둠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잡아먹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고, 서양의 열강들은 일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폭풍이 휘몰아치는 정세 속에 가만히 있을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여러 곳곳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 붓을 쥐고 있던 이도 칼을 들고 일어났다. 그가 바로 의암 유인석이다.

이항로의 뜻을 이은 위정척사사상
198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유인석은 화서 이항로(李恒老) 밑에 들어가 수학을 했다. 이항로는 조선 후기 유학자로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한 인물로, 그가 죽은 후에는 중암 김평묵과 당숙인 유중교에게 유인석은 학문을 배웠다. 유인석의 스승이었던 이항로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했다.

“오늘날 서양인의 침입을 당하여 국론이 화친과 전쟁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인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 쪽사람의 주장이고, 서양인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쪽 사람의 주장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를 따른다면 조선인이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점이 서양인과 싸우느냐 화친하느냐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지키려는 신념
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 <화서선생문집> 中



그러면서 이항로는 병인척사운동을 주도하는데 이 때 유인석은 그를 따르면서 척사사상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유인석은 이항로의 화서학파를 이끄는 수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고, 그는 일본과 개화파를 매우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슬프도다. 저 양왜는 이적(夷狄)의 아래인 금수인데 매국의 무리들이 다년간 결탁하여 오늘날의 대화(大禍)를 양성해 놓았으니 마침내 우리의 소중화는 절멸(絶滅)되어 소양(小洋)·소왜(小倭)가 되고 말았구나.”라고 말하며 한탄했다.

을미의병의 대장이 되다
1894년의 조선은 격난의 시기였다. 2월에는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고, 그로인해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이후 일본은 개화파 김홍집을 내세워 갑오개혁을 실시함과 거의 동시에 청일전쟁에 돌입했다.

김홍집을 비롯해 친일내각이 실시했던 갑오개혁은 보수적인 유생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특히 관리의 의복을 개정했던 변복령은 전통적으로 흑색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유생들에게 큰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1895년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까지 공포되면서 유생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유인석은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항쟁을 직접 참여·주도했다. 호좌창의 대장에 오른 그는 전국에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돌리며 사기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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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 당시 작성했던 유인석 상소문(제공: 의암유인석유적지)
 


“아! 저 섬 오랑캐의 추장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은 애당초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이 원통함을 어찌하랴! 국모의 원수로 이미 절치부심하고 있는데 잔혹함이 더욱 심해졌다. 군부가 지극히 존엄한데도 머리털을 자르고 갓을 부수고 옷을 찢는 상황을 보게 되었다. (중략) 이기고 지는 것과 유리하고 불리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할 것이 아니다. 생(生)과 의(義)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생을 버리고 의를 택함으로써 경중대소가 분명하게 갈라진다.”

-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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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집(유인석의 시문집)(제공: 의암유인석유적지)
 


약 3000명의 의병진을 구성했던 호좌창의군은 제천, 단양, 청풍을 거쳐 충주성을 손쉽게 점령했다. 당시 관찰사였던 김규식을 처단하고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면서 친일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이 충주성의 외곽을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제천으로 회군했다. 이곳으로 각지의 의병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수안보·가흥·음성 등에서 관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꽤 많은 승전보를 올렸지만 나중에는 제천마저 함락 당했다. 서간도로 망명 그리고 연해주 제천이 함락 당하자 의병은 급격히 무너졌고 유인석은 남은 의병들과 함께 재기를 희망하면서 서간도로 망명했지만 청의 요구로 무장 해제를 하고 말았다. 서간도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그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자 연해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도총재에 추대됐다. 13도의군에는 이범윤·이남기·안창호·홍범도·이상설 등이 함께한 조직으로 신식무기와 약 4000명의 사람들이 함께했다.

13도의군을 통해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려 했으나 얼마 뒤 국권피탈 소식이 들렸고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의병대를 해체시켰다. 이후 연해주에 모인 한인들은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를 조직했다. 성명회는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으로, 성명회 총재에 유인석이 추대됐다. 그는 추대된 당일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고 광복의 날까지 투쟁할 것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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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17일 백범 김구가 찾아와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제공: 의암유인석유적지
 


“한국인들은 일본과 투쟁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힘과 수단을 규합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본에 항의문을 발송하고 ‘한국국민의회(성명회)’를 조직했다. 이밖에도 우리는 세계 속에서 한국의 이름을 간직하고 국민들에게는 한국이라는 지위를 계속 간직하기로 결정했다. 우리의 과업이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유에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
- <성명회선언서> 中

이 선언서를 중국과 러시아 인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돌려 한일합병 반대 서명을 촉구했다. 이를 통해 8624명이 동의 서명을 했고,이 서명록은 각국 정부와 신문사 등에 발송됐다. 그러자 일제는 연해주 일대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되자 러시아에 항의하였고, 러시아는 이상설, 이범윤 등 독립 운동가들을 잠시 투옥한다.

이렇게 연해주 또한 독립 운동을 하기에 어려워지자 유인석과 다른 이들은 서간도로 다시 옮긴다. 1913년 2월 서간도로 이동하면서 유인석은 <우주문답>을 저술·간행했고, 1914년 서간도로 다시 망명하게 된다. 하지만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5년 1월 29일, 관전현 방취구에서 유인석은 병으로 인해 74년의 일생을 마감한다.

의암을 기리는 춘천
춘천은 의암 유인석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그의 묘와 함께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 있는 그의 유적지에 가면 기념관과 함께 사당 등을 볼 수 있다. 1935년에 이곳으로 반장(返葬)된 그의 묘는 해방 이후 백범 김구가 직접 찾아와 참배하기도 했다. 유적지에서는 그의 사상과 의병활동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춘천관내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암 유인석 독립운동 교실’을 진행해 교과서로 배운 의병의 역사를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몸소 깨닫는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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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이 평상복으로 입던 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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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유인석유적지 전경(제공: 의암유인석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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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유인석유적지 앞에 세워져 있는 순국 100주년 기념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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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 기념관
 


또 3박 4일 동안 진행되는 ‘충효서당’은 초등학교 4~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으로 바람직한 전통문화의 이해와 인성 함양을 위해 1년에 한 번 여름 방학에 진행한다. 이외에도 ‘의병리더십캠프’와 같은 교육 사업 외에 매년 4월 12일마다 ‘의암제’를 진행하는 등 여러 방면을 통해 그의 사상과 업적을 알리는 데에 힘쓰고 있다.

여태껏 우리는 ‘의병활동’이라고 생각하면 무장투쟁을 많이 생각했다. 물론 의암 유인석의 의병 활동도 무장투쟁의 성격이 컸다. 하지만 그의 근본은 붓을 들었던 유생이었고, 후학을 가르치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위정척사사상’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려 개화를 늦추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가장 최선은 아니었을까. 그런 와중에 유인석은 붓과 함께 칼도 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 항일운동까지 전개해 나갔다. 그를 통해 우리는 위정척사상은 개화를 늦췄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사상이며 항일 운동에서 칼과 붓 중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후세대의 관점에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모든 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고민하고 투쟁했음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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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