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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지역에 남은

고구려 비밀 ‘구녀성’

주변 절터엔 고구려 일광삼존불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태교,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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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청원구 비중리 절터
 


청주시 초정 약수터 뒤 산에 속칭 ‘구녀산성
(九女山城)’이 있다. 왜 구녀산성이라고 한 것일까. 이 성에는 10남매에 얽힌 축성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남매 축성설화가 아닌 9녀 설화이니 숫자상으로는 가장 많다. 설화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성마을에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둔 홀어머니가 살았는데 모두가 힘이 장사였다. 어느 날 스님이 그 집을 찾아와 아들이 액운이 들어 얼마 못 살 것이라고 점을 쳤다. 홀어머니는 노승을 붙들고 액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묻자 노승은 난감해하면서 아들을 살리려면 딸 아홉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처방을 알려주었다. 홀어머니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아들을 살리기 위한 내기를 하게 되었다. 아들에게는 송아지를 끌고 서울을 다녀오게 하고 딸들에게는 성을 쌓게 하였다.

아들이 쉽게 이기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홉 명의 딸들이 성을 거의 완성하게 되었다. 이제 성돌 하나만 얹으면 게임은 끝이었다. 홀어머니는 노심초사하여 머리를 짜냈다. 뜨거운 팥죽을 끓여놓고 딸들을 불러 이제 성을 다 쌓았으니 음식을 먹고 나머지를 완성하라고 권유했다. 딸들이 뜨거운 팥죽을 빨리 먹지 못하고 후후 불면서 먹고 있는 중에 아들이 집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딸 아홉은 죽임을 당하여 구녀성 안쪽에 묻혔다(<청주시지> ‘설화’조 종합). 이는 전통적 남아선호사상을 말해주는 혈육 경쟁의 비극사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구녀산성 아래에 있는 청원구 비상초등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4년 동안 봄 소풍 때는 내리 구녀산성을 올라갔다. 어린 시절 오르기에 벅찬 산성이었으나 기억으로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고색창연한 돌무더기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의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하다. 고적을 조사하고 답사하는 재미가 이때부터 생긴 것인가. 구녀산은 청주시의 동쪽 미원면 대신리 종암리와 내수읍 우산리의 경계에 걸쳐 있다. 이곳은 본래 구라산(句羅山, 혹은 謳羅山)이라고 불렸다. 해발 497 의 구라산 정상에 걸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며 혹은 고려산, 궁예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라산(謳羅山)이 주의 동쪽 41리에 있다.’는 기록과 동일 문헌에 ‘구라산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2790자이며 안에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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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구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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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녀산성 오르는 길
 


<청원군지>에 의하면 이 산은 원래 ‘구려산(句麗山)’ ‘구라산(謳羅山)’ 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해객(嶺海客)이란 인물이 쓴 등시(登詩) 시구에 ‘구녀사시구려사 구려성시구녀성(九女寺是句麗寺 句麗城是九女城)’ 구절이 전해내려 온다. 이 시로 미루어 ‘구려사, 구려성’이 구녀성 전설과 연관지어 ‘구녀사, 구녀성’으로 불리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주 인근 고대 유적 중 이처럼 고구려식 지명을 가지고 있는 유적은 드물다. 특히 ‘구녀성’이라고 작명된 곳은 이곳 성이 유일하다. 오늘은 고구려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청주 구녀산성과 주변 일대의 유적을 여행해 보자.

고구려성 ‘구려성’ 의 음운이화
구녀성은 본래 ‘구려성(句麗城)’의 음운이화로 보인다. 고구려는 성(城)을 ‘구루(溝漊)’ ‘홀(忽: khol)’이라 불렀다. 읍(邑), 동(洞), 곡(谷)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비슷한 말이다. ‘고구려’는 ‘구려’에 ‘크다’ ‘높다’는 뜻의 ‘高’ ‘大’를 덧붙인 말로서 ‘큰 고을’ ‘높은 성’이란 뜻이다.

5세기 중엽 이후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한자의 뜻을 살려 ‘고려(高麗)’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고구려 성장의 비밀은 ‘구려’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주몽이 소서녀의 지원에 힙 입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구려의 왕권과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망명한 지 2년 만에 역사적인 ‘구려’를 세웠다. 그것은 그가 구려왕의 사위가 돼 구려 왕이 죽자 왕권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구려’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사료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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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녀산성에서 찾은 와편과 토기편
 


<후한서> 예전에서는 ‘예, 구려 및 옥저는 다본래 조선 땅이었다’고 구려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한서> 권28 지리지 현도군 고구려 현조에 대한 후한 말 응소의 주석에서 ‘옛 구려호(호는 이민족에 대한 비칭)’라고 했다. 고구려가 구려의 왕권을 이어받아 구려 국호에 ‘높을 고’자를 덧붙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상서> 권 11 주관에 대한 주석에 ‘해동의 여러 이족들인 구려, 부여, 한, 맥’이 주나라 성립시기 중국과 통했다는 기사가 있다. 일주서 왕회해편에 성주(주나라 동도 낙양)의 낙성식에 ‘고이’가 축하하러 왔다고 했는데 진나라 사람 공조가 ‘고이는 곧 고구려(구려를 지칭)다’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 강력한 세력이 남하했을 때 청주, 청원은 이들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소백산 준령과 가까운 청천, 미원, 구녀성, 초정, 도안, 괴산, 음성, 충주를 잇는 광역 지배권이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구라산’ ‘구녀성’의 혼동
구라산성과 구녀성은 같은 성이면서 이중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청주의 동쪽 40여리에 있으며 둘레는 2790척이고 성내에 2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구녀산성의 표기와 비슷하다.

이 산성의 지형적인 배려와 성문, 망대, 수구의 배치 그리고 출토유물과 축성설화(築城說話)로 미루어 볼 때 초축(初築)은 신라였을 가능성이 있다. 보은, 상주 등 남쪽에서 올라오는 신라군을 제어하기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의 각축장으로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지표조사 자료에 따르면 후삼국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군사가 주둔하고, 고려 초기까지도 성곽의 기능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둘레는 크지 않다. 약 856 로 성내에서 가장 높은 북단에서 양쪽으로 이어진 능선이 남쪽 계곡을 향해 점차 낮아져 삼태기 모양을 이루었다. 조사 자료에 따르면 기반은 2중 쌓기로 한 후에 석루(石壘)를 쌓아 올렸는데 대부분 붕괴되어 유구가 토루(土壘)처럼 남아있다.

능선의 서북단 남쪽 부분에 성벽이 많이 남아있다. 높이 7 , 폭 8 , 두께 6.3 의 내외겹축성(內外夾築城)이었음을 보여준다. 산성 안의 시설로는 남쪽 수구 옆에 있는 남문지와 북쪽과 서쪽의 작은 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정상부에 망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완전히 붕괴되었다. 성벽이 능선으로 이어지는 북·남·서 모퉁이에 고구려식인 곡성(曲城)이 설치되었다.

이 같은 형태는 포천 반월성지, 단양 적성산성, 충주 장미산성, 양구 비봉산성 등에서 엿볼 수 있는 형태다.
<여지승람> 제 15권 청주 목 토산 조에 보면 매우 재미있는 기록이 보인다. 바로 구라산에서 청옥(靑玉)이 나온다는 기사다.

“청옥 출구라산. 청옥석 출주동삼십리소음리운운(靑玉 出謳羅山. 靑玉石 出州東三十里召音里 云云).”

글마루 취재반은 성벽 혹은 성내에 마련한 체육시설 부지 등을 조사하면서 여러 점의 붉은색 와편과 경질의 신라 토기편을 수습했다. 와당은 포천 반월성, 단양 적성, 단양 용부원리 보국사지, 양구 비봉산 등지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평와를 닮고 있다. 그리고 혹 청옥의 파편은 없을까. 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조사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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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비중리 석조삼존불좌상
 

비중리 ‘고구려 일광삼존불상’
지난 1978년 청원구 비중리 ‘일광삼존불상’은 햇빛을 찾았다. 필자의 안내로 단국대 학술조사단(단장 정영호)이 현지로 내려와 불상을 실측하고 시대를 판단했다. 처음에는 이 삼존불상의 국적에 대해 이론이 분분했다. 조사단장 정영호 박사는 일광삼존불의 특이한 양식을 감안해 고구려불상으로 단정했다. 그런데 당시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백제불상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두 전문가는 국립박물관 회보를 통해 논쟁을 벌였는데 나중에는 정영호 박사측의 견해가 우세했다.

불상이 남아있는 곳은 ‘비중리 절터’라 불려왔다. 그런데 절터로 추정되는 곳은 모두 밭이 되거나 집이 들어서서 건물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동구 정자나무 주변에 기와 조각이 산란하며 일광삼존불과 석불입상, 광배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일광삼존불’이란 하나의 광배 안에 불상 세 구를 조각한 것이다. 가운데에 본존불이 앉아 있고 양 옆에 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네 조각으로 깨어져 본존의 머리 부분과 좌우협시 보살이 떨어져나갔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그 원형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한 좌협시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자리에 맞춰놓았다.

이 삼존불에 대한 문화재 대관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본다.

“본존불은 결가부좌하고 앉았으며 옷자락이 무릎을 덮고 대좌까지 흘러내렸다. 얼굴과 왼쪽 어깨, 가슴 부분이 뚝뚝 깨져나가고 오른쪽 무릎도 벗겨지는 등 손상이 심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부드럽다. 어깨가 당당하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둘째손가락을 구부린 채 시무외인을 지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지만 잘 알아볼 수 없다.

넓은 무릎을 덮은 옷자락이 여러 겹으로 U자를 그리며 아래쪽으로 흘러내렸고 그 아래에 삼존불상이, 양쪽에 사자가 한 마리씩 새겨졌으나 심하게 닳았다. 두광과 신광은 둥근 무늬를 몇 겹 새겨 물결 모양으로 표현했고 좌우에 5구씩, 모두 10구의 화불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의 높이는 1.22 무릎 너비는 0.86 이다. 남아있는 우협시보살도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원통형 몸, 몸 앞에서 X자로 엇갈리는 옷 주름, 중첩된 광배의 형태 등에서 6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비중리 일광삼존불상은 원형을 많이 잃기는 했으나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처음으로 조사된 석조일광삼존불상이며 청주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광삼존불상 앞에 세워진 석불입상은 높이 1.44 의 돌기둥 모양 화강암에 높게 부조되었으며 두광이이중으로 새겨져 있다. 얼굴 부분은 깨져서 알아볼 수 없고 어깨가 좁은 편이며 가슴도 움츠린 듯하다. 오른손은 들어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내려서 여원인을 지었는데 손이 유난히 크다. 두 어깨를 감싼 법의는 굵고 두툼하게 주름지으며 가슴 아래에서 타원형을 그리며 물결치고 그 아래로 주름진 군의자락은 발께 에서 층단을 이루었다. 가슴 아래로 흘러내린 타원형 옷 주름이나 커다란 두 손 등의 형태나 양식으로 보아 이 석불입상도 일광삼존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불입상은 얼굴 부분이 깨져나가 표정을 알아볼 수 없으나 흘러내린 옷 주름이나 커다란 두 손 등의 형태와 양식으로 보아 일광삼존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안치된 주변에서는 1980년대 초 단국대학에 의해 발굴작업이 벌어졌으며 판단이 뾰족한 팔엽(八葉) 와당이 수습되기도 했다. 주연은 아무 무늬가 없는 소문대(素紋帶)였으며 색깔은 청회색이었다. 이 와당은 괴산 문광면 일대 엣 절터에서도 발견된 형태였다. 현재 이 불상은 보물 제194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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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비중리 일광삼존불상
 


이 절터 안에서도 글마루 취재반은 붉은색의 와편을 다수 찾았다.

낭비성은 어디인가
낭비성은 김유신 장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결전의 성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金庾信) 전에 의하면 629(진평왕 51)년 신라의 임영리(任永里)·용춘(龍春)·백룡(白龍)·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 승리를 이끈 것으로 나온다.

이때 김유신은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전하여 뛰어난 용맹으로 고구려 군사 5000여 명을 목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쟁이 바로 김유신 장군이 승승장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격전의 현장인 낭비성은 지금의 어디가 될까. 학자들은 충청북도 지역 혹은 경기도 북부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대동지지>에서는 충주(낭자곡성)로 비정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들은 오늘날의 청주 지방을 삼국사기의 낭비성(娘臂城), 비성(臂城)이라 하고 있다.

청주 지역의 역사학계를 이끌던 고(故) 이원근 교수는 청주시 북이면 부연리와 토성리에 걸쳐 있는 속칭 ‘남비성’을 낭비성으로 추정했다. 남비성은 비중리 절터에서 북쪽으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부연리의 옛 산성은 높이 250 의 야산에 석축되었으며 바로 부근에 노고성(老姑城)이 있어 주·부성(主副城)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는 오늘날의 임진강 유역이어서 문제가 있으나 지명이 그대로 전존되어 주목되고 있다.

화랑정신은 오늘날 청소년 정신문화의 지표로서 삼아도 손색이 없다. 나라사랑과 부모에 대한 예의와 신의 그리고 인생을 개척하는 백절 불굴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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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구녀산성 건물 뒷쪽 산
 


세종대왕이 치료하던 곳, 초정약수
초정약수는 <동국여지승람> 제15권에 청주 목산천 조에 그 유래가 나온다.
‘초수 재주동삼십구리 기미여초 랭욕칙이질아세종세조상행 우차(椒水 在州東三十九里其味如椒 冷浴則已疾 我世宗世祖嘗幸 于此)’라고 되어 있으며, 조선 태종 때 방문중(房文仲, 사헌부 집의)의 시와 세종 때 문사 이승소(李承召)의 시가 초수를 칭송했다. 초정약수의 발견은 지금부터 600년이 넘는 셈이다.

세종은 이곳 행궁에서 약 60일을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했다. 그런데 세종이 안질만을 치료하기 위해 이렇게 장기간을 머무를 수 있었을까. 일설에는 속리산에 있던 신미대사(信眉大師)와의 회동을 점치는 견해도 있다. 신미대사는 당시 범어에 가장 능통했다. 한글 창제에 가장 긴요했던 범어를 익히기 위해 세종은 초정에 머물면서 신하들의 반대를 피한 것일까.

신미대사 약전을 보면 그는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김수온(金守溫) 선생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신미(信眉)라 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 26년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 27년에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다. 더구나 세종 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고 말았다. 3년 동안에 세 사람을 떠나보낸 세종의 슬픔과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종은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특별히 가까워졌다. 이때 세종은 <능엄경(楞嚴經)>에 깊은 매력을 느껴 항상 이 경을 읽고 실천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능엄경은 바로 세종에게는 애민(愛民)의 경전이었다. 능엄경을 읽으면 만사가 여의(如意)하고 뜻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세종은 생전에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고 했다.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대사에게 사호(賜號) 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우국이세’라는 대목이다. 국가를 가장 이롭게 했다는 칭호였다. 이 시호 가운데 혹 한글창제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존자(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다. 세조 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령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 에게 일러 불서 100종을 간행토록 했다.

세조가 강원도 상원사에 행행하여 피부병을 치료했을 당시 신미대사는 수백리 길을 노구를 이끌고 가 배알했다. 뜻밖에 신미대사의 출현으로 상원사는 진한 감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세조는 신미대사를 상객으로 모시고 법문을 들었다.

현재 초정약수 원탕 부근에는 세종, 세조가 묵었던 행궁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준공을 얼마 앞두고 있으며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행궁터가 완공되면 초정약수 일대도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될 전망이다. 초정약수와 구녀성, 비중리 일광삼존불, 낭비성은 한 사이트 안에 있다. 이곳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중시한 고구려가 100년 동안 지배하고 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비밀이 구녀성과 일광삼존불 그리고 낭비성에 담겨 전해진다. 아직도 고구려는 역사 속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