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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성장과 의열단, 조선의용대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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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김원봉(金元鳳, 1898. 9. 28~1958)은 뜨거운 남자였다. 뜨거운 열정, 뜨거운 투쟁, 뜨거운사상이 일생을 지배했다. 그를 전설적인 독립투사로 각인시키는 것은 그가 창설한 의열단 때문일 것이다. 의열단은 3·1운동과 같은 평화적 시위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암살, 폭파등의 격렬한 항일투쟁을 위해 창설한 단체이다. 그후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것이나, 사회주의로 기울어졌던 것도 더욱 뜨거운 투쟁의 방편으로 선택한 길이었을 것이며, 해방 후 택한 북한행 또한 더욱 뜨거운 ‘민족주의’를 위한 것 같다. 운암 김성숙은 그를 가리켜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라고 평하였다.

출생과 성장
김원봉은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집안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3살 되던 해 어머니 이경념은 둘째 아들 김경봉을 출산하고는 사망했다. 아버지 김주익은 역관인 할아버지로부터 30마지기 땅을 물려받아 절반은 소작을 줄 만큼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천연이와 재혼하여 6남 1녀를 더 두었는데, 밖에서 박순남이란 여성과의 사이에서도 3남 1녀를 낳았다. 김원봉은 형제간이 11남 2녀나 되는 대가족의 장남으로 자랐다.

김원봉의 ‘뜨거움’이 나타난 첫 사건은 13살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4월 11일에 일어났다. 일본 천왕 생일이라는 천장절인 그날 소년 김원봉은 일장기를 변소에 처넣었다. 이 사건으로 김원봉은 학교를 자퇴해야했다. 그는 동화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동화학교는 전봉표 교장, 김대지 교사 등 민족의식이 투철한 지사들이 있었는데, <사립학교법>에 따른 법인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해 가을 강제 폐교당했다. 김원봉은 얼마간 서울에 머물며 중앙학교에 다니기로 작정하고, 아버지가 학비를 마련할 때까지 약 2년간 밀양의 표충사에서 독학을 했다.

1913년 15살에 서울의 중앙학교에 편입하여 1916년 봄 졸업했다. 그는 중국 천진의 독일계 학교인 덕화학당에 입학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함으로써 덕화학당은 문을 닫았다. 다시 남경의 금릉대학으로 옮겼다. 1919년 2월 겨울방학 중 학비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투쟁을 위해 만주로 갔다.

의열단 창단
그는 만주에서 3·1운동 발발 소식에 이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었다. 그해 6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더 뜨거운’ 투쟁을 위해서였다. 9월, 석 달 만에 학교를 자퇴했다. 그는 길림으로 가서 11월 9일 자신을 비롯한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 일명 곽재기)·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 등 13명을 단원으로 하는 의열단을 창단했다. 단원들은 김원봉을 단장인 의백으로 뽑았다. 단원 일동은 의백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 다음과 같은 의열단 행동지침 10개조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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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단체사진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 수 있다.
4.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케 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회의 참석요구: 필자)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 뜻에 뜻을 다한다.
9. 한 사람은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 뜻을 배반한 자는 죽임에 처한다.

이러한 의열단의 강령은 민족주의 내의 문화주의, 외교를 통한 독립론, 독립을 위한 준비론 등을 일절 배격하고, 오직 민중에 의한 폭력적 혁명에 의해 일제를 타도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제거해야할 대상으로는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조선 주둔 일본군 수뇌 ③ 대만총독부 총독과 고관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의 7부류를 정했다. 또한 폭파 대상 기관으로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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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전단-자금모금 협조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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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김익상의 폭탄투척 의거지인 남산의 조선총독부
 


의열단은 이 목적을 위해 폭탄을 구하고, 단원들이 폭탄제조법을 직접 배운 후 1920년 6월 1차 암살 파괴조가 국내로 진입시켰으나 대부분 체포당하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1920년 9월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11월에는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1921년 9월에는 김익상이 남산 조선총독부 청사에 잠입하여 폭탄을 던져 일제를 경악시켰다. 1922년 3월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田中) 저격을 시도했다.

1923년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피신 중 일본 순사부장을 처단하고 포위망을 탈출하여 경성 한 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1924년 1월 김지섭이 도쿄 궁성안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졌다. 1926년 12월 나석주가 경성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피살되었다.

조선의용대 창설
그러나 대체로 거기까지였다. 단원들의 장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격으로 일본제국은 무너지지 않았고, 희생만 늘어갔다. 신규 대원 입단이 끊어졌고, 자금도 바닥났다. 게다가 국내외 사상계가 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지하조직이 대두되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공산주의의 계급적 혁명운동에 의열단이 참여하는 길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25년을 지나면서 의열단은 의열투쟁 노선에서 군사 정치적 방향으로 전환했다.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으로 10여 명의 대원들과 함께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했다. 일부 다른 대원들은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이 되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5기생 조선인 정원을 100명으로 늘였고, 입학생 중 의열단이 아닌 80명을 의열단으로 만들었다. 1927년 8월 중국 공산당 남창봉기에 참가하고 1930년 4월에는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열었다. 이듬해 3월에는 박차정과 결혼했다.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침략을 개시하여 이듬해 3월 만주국이라는 일본 관동군이 조종하는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김원봉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열고 교장이 되었으며, 11월에는 의열단과 한국 독립당 등 5개 단체를 묶어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1935년7월 혁명간부학교 교육을 계속하면서 의열단과 한국 독립당 등 5개 단체를 묶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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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창립기념사진(1938. 10. 10)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도발해 중국 남부로 뻗어오기 시작했다. 1938년 7월 김원봉은 조선인 무장부대 창설계획안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제출하고 10월 10일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200여 명으로 출발하여 1940년 2월에는 314명으로 늘었고, 제3지대가 결성되었으며,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들 중에서 국민당지구에서 선전활동만 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결국 1940년 말부터 이듬해 여름 사이 주력이 황하를 건너 태항산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화북지대(華北支隊)로 개편되고,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여 조선의용대가 1942년 5월 18일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자 7월 7일 광복군에서 이탈해 화북조선독립동맹 소속군이 되어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연안으로 후퇴했다가 해방 후 북한으로 환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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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통합을 이룬 제34회 임시의정원 희원 일동 기념사진(1942. 10, 앞줄 오른쪽 끝이 김원봉)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 합류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기습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중국 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과 손을 잡을 것과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 세력을 받아들여 좌우합작의 통일전선을 이루도록 요구했다.

1941년 12월 김원봉은 주력이 빠져나가 약화된 약 40명의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1942년 4월 임시정부는 국무회의 결의에 의해 5월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과 제1지대장을 겸하게 되었다.

1942년 8월 4일 임시의정원은 <의정원의원선거규정>을 개정하여 좌익 진영의 인사들도 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게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1942년 10월에 임시의정원 제34회 회의에서 의원 23명을 새로 선출하였는데, 이 중 좌익 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에서 12명,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에서 각각 2명이 선출되어 좌익 진영 인사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게 됐다. 제34회 회의는 임시의정원 설립 이래 가장 많은 의원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로써 좌우익 독립운동세력이 임시정부로 통일전선을 이루었고, 그 결과로 임시의정원은 좌우가 손잡은 통일의회가 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통할 할 수 있는 최고기구이자 민족의 대표기구라는 위상과 권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이었던 민필호는 김원봉에 대해 “임정을 탈취할 야심으로 갖은 수단을 다썼다” “당시 공산당(김원봉을 말함: 필자)과의 암투를 생각하면 지금 와서도 머리가 무겁다”고 회고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