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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팔에

매를 앉혀 데리고 다녔다?


글. 신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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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본래 뜻은 말을 타는 사람이다. 중세 유럽에는 기사 계급이 있었는데, 이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사였다.

처음에는 자유민이면 누구나 기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말, 갑옷, 무기 등을 사는 데 많은 돈이 들고 군사 훈련을 받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것을 감당할 만한 상류층만이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그 뒤 기사 계급은 세습이 되어 대대로 이어졌고, 12~14세기 사이에는 영주에게 봉토를 받고 전쟁터에도 나가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 왕이 영주에게 출전을 명하면, 영주에 속한 기사들은 말을 타고 떠나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기사들은 전투에서 승리하면 전리품도 얻고 영주에게 봉토도 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명예와부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면 몸값으로 많은 돈을 내야 풀려날 수 있었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으면 적군에게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기사들에게는 갑옷, 투구, 무기 등 값비싼 장비가 있기 때문에 적군은 그것을 챙기려고 서슴없이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기사들은 전쟁이 없을 때는 ‘마상 시합’을 했다. 그들은 두 패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는데,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나올 정도로 치열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대 일로 맞서는 창 시합으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창 시합으로 죽었다. 심지어 1559년에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가 창 시합에 나왔다가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없을 때 기사들은 사냥을 했다. 사냥은 기사들에게 자신의 용맹스러움과 사냥 솜씨를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영주에게 잘 보이면 출세의 길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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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은 영주의 허락을 얻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사냥에는 개들이 동원되었는데, 개가 짐승들을 몰아오면 기사가 활을 쏘아 죽였다. 기사는 사슴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칼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잘라, 사냥에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나눠 주었다. 폐와 내장은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기사는 자신의 용감함을 뽐내려고 동물과 직접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곰이나 들소 등에게 접근하여 창과 칼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이 사냥 방법은 매우 위험했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지 않으면 포악해진 동물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사고가 자주 일어났기에 사냥을 떠날 때 까마귀가 울면 불길한 징조라는 등의 미신도 많았다.

기사는 팔에 매를 앉혀 데리고 다니며 사냥도 했다. 사냥개들이 숲을 뒤져 새들을 날아오르게 하면 기사는 매를 풀어 주었다. 그러면 매는 쏜살같이 날아가 새를 잡았다. 왜가리 사냥을 할 때는 악단을 동원하여 매가 왜가리를 공격할 때 웅장한 연주를 하게 했다고 한다. 매는 새뿐만 아니라 토끼도 사냥했다.

기사 계급은 자식이 그 뒤를 잇는 세습제였지만, 기사가 되려면 일정한 수습 과정을 밟아야 했다. 일단 7세가 되면 기사의 아들들은 영주의 성으로 들어가 ‘시동’ 노릇을 시작했다. 벽난로를 피우거나 귀부인들의 시중을 드는 등 궂은일을 하면서 궁중 의식이나 무예를 익혔다.

14세가 되면 견습 기사인 ‘종자’가 되어 기사를 모셨다. 기사가 갑옷을 입거나 말을 탈 때 시중을 들고,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또한 기사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기사의 무기를 들고 쫓아다녔다.

기사가 부상을 입기 전에는 직접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기사로서 갖춰야 할 일곱 가지 기예를 배웠는데 검술·활쏘기·승마·수영·수렵·체스와 시 짓기 등이었다.

21세가 되면 정식 기사로 임명되었는데, 반드시 기사 작위 수여식을 가졌다. 처음에는 기사 작위 수여식이 간소해서 기사가 종자에게 갑옷을 입혀 주고,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나중에는 예배당에서 복잡하고 엄숙한 의식을 거쳐 기사 작위를 받았다.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등 중세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뒤부터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14~15세기 이후 전술이 달라지고 화약과 총포가 등장하면서 기사들은 계속 패하여 설자리를 잃어갔다. 나중에는 기사 작위가 훌륭한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명예 작위로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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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도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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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도는 중세의 기사가 ‘기사로서 가져야 할 명예롭고 예의바른 행동’을 뜻한다. 11~12세기경에 생겨난 이 기사도는 교회와 영주에게 충성을 다하며 정의를 수호하고, 모든 사람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터에서는 용맹스럽게 싸우고, 비겁한 짓을 하지 않으며, 여자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들은 기사도 정신에 따라 신과 교회를 위해 싸우려고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음으로써 기사도 정신을 저버렸다.

중세의 기사들은 여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특히 귀부인을 숭배하고 그를 위해 헌신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귀부인의 명예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 승리함으로써 그 귀부인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푸마의 모습을 본떠 만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11세기 말경 남아메리카 대륙 안데스 지역에 나타난 잉카족은 12세기 초에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페루·에콰도르·볼리비아·칠레에 이르는 잉카 제국을 건설했다. 1532년 에스파냐의 피사로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루었다.

잉카족은 태양신을 믿었다. 그들의 기원 신화에 따르면 잉카 사람들은 안데스 산맥에서 동물과 다름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가엽게 여긴 태양신은 아들 망코 카팍과 딸 마마 오크요를 불러 말했다.

“너희는 지상으로 내려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잘 가르쳐라. 금 막대기를 줄 테니 가는 곳마다 이것을 땅에 던져라. 금 막대기가 땅속으로 사라지면 그곳에 나라를 세워라. 너희가 이 나라를 다스리며 사람들을 자식처럼 돌보아야 한다.”

망코 카팍과 마마 오크요는 부부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갔다. 태양신이 지시한 대로 가는 곳마다 금 막대기를 땅에 던졌다. 그런데 어느 날 금 막대기가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곳이 바로 쿠스코 골짜기였다.

망코 카팍과 마마 오크요는 쿠스코 골짜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농사짓는 법과 집 짓는 법을 가르쳤다. 예의범절을 지켜 사람답게 사는 법까지 알려주었다. 이들은 쿠스코 골짜기에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는데, 이 나라가 바로 잉카다.

잉카는 처음에 작은 부족 국가였지만, 제9대 왕 파차쿠텍 때 영토를 넓혀 제국이 되었다. 파차쿠텍 왕은 쿠스코를 도시 계획에 따라 건설하여 잉카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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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년 왕위에 오른 그는 쿠스코를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동물인 푸마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푸마의 눈에 해당하는 곳엔 삭사우만 요새를 세우고, 푸마의 뒷발 부분에는 궁전 겸 신전을, 배꼽 부분에는 아르마스 광장을 두었다.

잉카 사람들은 건물을 지을 때 멀리 1000㎞나 떨어진 곳에서 돌들을 운반해 왔다. 그들은 아무 돌이나 쓰지 않고 같은 색깔, 같은 종류의 돌만을 사용했다. 그 솜씨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1950년 쿠스코 대지진 때잉카 사람들이 세운 건축물은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 반해 잉카 제국을 정복한 에스파냐 사람들이 지은 건축물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쿠스코는 해발 3566 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쿠스코’는 잉카 사람들의 말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1532년 에스파냐의 피사로가 정벌에 나섰을 때는 인구 10만 명을 자랑하는 대도시였다. 하지만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170명의 에스파냐 군의 공격 앞에 맥없이 무너져, 거대한 잉카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쿠스코는 1983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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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왕 파차쿠텍
 

“쿠스코에서는 해마다 태양제가 열린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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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6월 24일에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서 태양제가 열리고 있다. 잉카 사람들은 태양신을 믿어 매년 태양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잉카의 후예인 페루 사람들은 그 전통을 이어받아 순수 혈통인 원주민 가운데 왕과 시녀 노릇을 할 사람을 뽑아 태양제를 열었다. 축제가 열리는 날, 왕으로 뽑힌 사람은 고유 의상을 입고 태양 신전까지 행진했다. 그리고 태양 신전에서 태양신에게 제물을 올리고 절을 한 뒤, 산양의 일종인 라마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쳤다. 이 때 심장 빛깔이 붉을수록 그해 농사가 풍년이 될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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