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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장악…

신라를 속국으로 삼다


금석에 담은 천하제일의 대국
탑평리에 대 가람 힘찬 붉은 연화문와당 남겨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태교,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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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2 충주 탑평리
 


탑평리의 힘찬 고구려 와당
지난 1978년 수마가 충주시를 할퀴고 자나갔다. 남한강유역의 수재가 심각했다. 중앙탑면 탑평리 국보 칠층석탑 일대의 경작지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수해복구를 하는 과정에서 불도저 등 중장비가 절터 일대를 정비하면서 지하에 묻혀있던 많은 기와 조각이 드러났다. 전국 유적 조사에 나섰던 단국대 학술조사단은 불도저가 지나간 자리에 뒹굴고 있는 귀한 와당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조사단장 정영호 교수(작고)는 와편 가운데 매우 주목되는 것을 찾아 고심에 빠졌다.

경주 인근에서 조사되는 고(古) 신라와당을 닮기도 했고 은사이신 동국대학교 황수영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백제와당(?)과도 동일했다. 황 박사 소장의 와당은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백제와전도보(百濟瓦塼圖譜)>에 실려 있었다. 출토지는 분명치 않고 공주 탄천 일대에서 수습된 것이라고 전해져 온 와당이었다. 정 박사가 수습한 와당은 붉은 색이었다. 연판은 6개로 끝은 반전되어 흡사 해바라기 모양이었다. 이 와당을 만든 장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었을까. 정 박사는 며칠을 생각하다 이 와당을 고구려계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언론에 한반도에서 처음 찾아진 고구려 와당이라고 공표했다. 가장 확신을 가진 것은 충주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터였고 절터에서 많은 양의 붉은 색 와편이 수습되었기 때문이다.

이 발표가 보도되자 학계에서는 반론이 제기됐다. 백제 것이라는 학자들도 있었고 고(古)신라 와당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와당 국적 논쟁은 한참동안 지속되다 잠잠해졌다. 그런데 이로부터 몇 년후 탑평리 인근에 있는 가금면 입석리에서 고구려비가 찾아졌다. 가금면 일대가 고구려 세력의 중요 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필자는 서울의 한 수장가 집에서 중국 지안에서 수습되었다는 붉은 색의 고구려 와당 한 점을 조사할 수 있었다. 모양과 색깔 모두 탑평리에서 수습된 와당과 닮아 있었다. 와당의 크기는 비록 작았으나 지안(集安) 고구려 왕도에 사용되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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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문수막새(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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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산성에서 발견한 삼국시대 와편들. 고구려 시대로 추정되는 붉은 와편도 발견됐다.
 

이 와당을 조사한 후 필자는 당시 탑평리 유물을 고구려계라고 단정한 故 정 박사의 혜안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충주를 지배했던 시기는 고구려비에 기록된 5세기 말 장수왕~문자왕 대이고 그 중심세력은 지안에서 내려온 집단이었던 것이다. 충주 중앙탑면 탑평리를 중심으로 한 일대야말로 고구려 세력이 둥지를 틀고 국원(國原)으로 삼은 고대사 기록을 확실히 뒷받침하는 유적의 보고다. 이번에는 삼국 쟁패의 역사와 태양의 후예로 자처했던 고구려 전사의 혼이 어린 남한강 탑평리 일대를 여행해 본다.

충주 노은면에서 찾아진 ‘건흥’명 광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충주 노은에서 발견된 건흥명(建興銘) 광배는 불상의 뒷면에 장착하던 유물이었다. 불상은 없어지고 광배만 남은 것이었다. 이 작은 유물이 왜 주목을 받은 것일까. 바로 고구려 시기로 상정되는 ‘건흥’ 연호가 나오기 때문이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글씨는 다음과 같다.

建興五年歲在丙辰 佛弟子淸信女 上部兒庵造
釋迦文像願生生世世値佛聞法一切衆生同此願

‘건흥 오년 병진년 불제자 청신녀가 상부 아암에서 석가상을 조성하여 일체 중생들에게 세세토록 불법이 미치기를 염원한다’는 내용이다. 건흥은 476(장수왕 64)년설, 536(안원왕 6)년설, 596(영양왕 7)년설이 있으며 상부(上部)란 고구려 오부 중 하나였다.

필자는 이 광배가 발견되었다는 노은면 일대의 절터를 찾아다닌 적도 있는데 가장 높다는 표고 736 의 보련산성(寶蓮山城)까지 올라가 보기도 있다. 그러나 수풀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찾지 않은 탓에 와편도 줍지 못했다. 보련산성은 산세가 험준하여 오르기도 어렵지만 고구려 유적일 가능성이 있어 향후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이 광배의 존재는 일제강점기부터 충주의 고구려 유적 출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탑평리 고구려 절터의 확인이었다.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
1979년 봄 기적적으로 고구려비가 찾아졌다. 비가 찾아진 곳은 바로 탑평리 인근에 있는 입석리 동네 입구에서였다. 입석(立石)은 비가 세워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비의 발견과 고증에도 역시 故 정영호 박사가 나섰다. 남쪽으로는 탑평리, 북쪽은 장미산성, 서쪽으로는 건흥면 광배가 발견된 노은면과 인접해 있으며 보련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만주지안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금석문이다. 높이 2 3㎝, 폭 55㎝, 두께 33㎝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다. 앞면과 좌측면 일부 내용만 확인되었다. 자경(字徑)은 3~5㎝로 앞면에 23자씩 10줄, 좌측면에 23자씩 7줄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6줄, 뒷면에 9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 고구려의 왕이라는 의미의 ‘高麗太王(고려태왕)’이나 ‘使者(사자)’와 같은 고구려 관직명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보이는 ‘古牟婁城(고모루성)’등 고구려 영역의 성 지명들로 나타난다. 거기다 ‘신라토내(新羅土內)’ 같은 글자들도 나타나고 있어 고구려비라고 평가하는 데는 학계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 판독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울환노(多亐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상(尙)…상공간(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노객인(奴客人)…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大使者) 다울환노(多亐桓奴)와 주부(主簿) 도덕(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 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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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중앙탑면 용전리에 건립된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충주 고구려비
 



이 비를 고구려비로 단정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비문에 보이는 ‘고려태왕(高麗太王)’이나 ‘사자(使者)’ 같은 고구려 관직명이다. 또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보이는 ‘고모루성(古牟婁城)’ 등 고구려 영역의 지명 등도 있다. 여기에 ‘신라토내(新羅土內)’ 같은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를 부르던 글자들도 드러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비의 건립 시기는 장수왕(재위 412~491)과 자명왕(재위 492~519) 대로 추정된다. 장
수왕 시대로 보는 근거는 비문 속의 간지와 날짜, 당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따른 영역의 확장,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다. 문자명왕 시대로 보는 근거는 비석 앞면 첫째 줄의 ‘고려태왕조왕령(高麗太王祖王令)’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비의 건립과 목적도 학자들 간에 이론이 팽배하다. 고구려가 충주지역을 장악한 후 기념으로 세운 척경비 또는 정계비라는 주장이 있다. 한강 백제 위례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참수하고 남하하여 남한강을 장악한 장수왕의 공적비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보축한 ‘장미산성’
‘장미산성(薔薇山城)’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장미꽃을 상상하여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적 제400호로 지정된 이 성은 장미산의 능선과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전장 2040 에 달한다. 남한강 길목을 지키며 유사시 입석마을과 탑평리 일대에 거주했던 주민들을 보호했던 성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에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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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산성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편과 기와 조각이 찾아졌다. 토기들은 한성백제 시기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성의 초축(初築)도 백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리고 고구려, 신라의 와편 토기조각이 보여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경영하였음을 알려준다. 고구려는 한강변에 대한 지배 시기가 짧아 대개 백제가 구축한 자리에 석축을 쌓는 것이 상례였다. 경기도 포천시 반월성, 양구 비봉산성(要隱忽次.혹은 要隱忽此), 임진강 고모루성에서 보이는 양식이 그렇다. 할석과 흙을 이용하여 다져 쌓은 판축성 위에 견고한 석축을 보강한 것이다.
장미산성 외관에 나타나는 견고한 석축은 그야말로 장관이며 이는 고구려 지배 때 축조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일대에서 조사된 고구려 보축성 가운데 가장 완벽하며 잘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성에도 남매 축성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옛날 노은면 가마골 마을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았다. 그러데 둘 다 장수의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한 집안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게 되면, 한 명은 죽어야만 하는 비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남매는 생사를 건 시합을 하기로 했다. 장미는 장미산에 성을 쌓고, 보련은 보련산에 성을 쌓는 시합이었다.

시합을 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보니 보련이가 앞서고 있었다. 장미를 살리고 싶은 어머니가 떡을 해가지고 가서 보련에게 먹고 하라고 하였다. 보련이 떡을 한 접시 먹고 마지막 돌을 들고 가려는데 장미 쪽에서 축성이 끝났다고 하였다. 보련이 진 것은 떡 한 접시를 먹은 시간 때문이라고 한다. 내기에 진 보련이는 스스로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충북도내에는 이런 남매축성설화가 많이 내려온다. 청주시 구녀산성(九女山城)에는 딸 아홉 명이 등장하여 아들과 축성 내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은 딸들이 모두 죽는 것으로 설화가 엮어져 남아선호사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장미’의 ‘장(薔)’은 길다라는 ‘長’의 다른 표기이며 ‘미’는 ‘퇴미’의 약어로 성을 뜻하는 말이다. 길고 큰 성이라는 뜻에 남매축성 설화가 가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성벽과 치성, 배수로, 공격용 돌을 보관한 성곽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안쪽으로 양쪽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형태의 북돌을 넣고 빈틈에는 작은 돌들을 채워 올리다가 지형의 안과 밖이 수평이 되는 지점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쌓아올리면서 그 사이에는 다시 북돌을 가지런히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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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보축한 장미산성의 모습
 


글마루 취재반은 장미산성을 조사했다. 산성에 있는 봉학사까지 차량을 통해 올라갈 수 있어 매우 용이했다. 한눈에 남한강과 보련산 입석리가 들어온다. 발끝에 닿는 것이 모두 와편이다. 극소수의 붉은 색 고구려 와편 외에 연질 백제 와편과 토기편도 수습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삼국의 치열한 쟁패의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취재반은 여기서 치성(雉城)의 흔적을 찾았다. 공격해 오는 적들을 효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만든 치성은 고구려성의 독특한 방어시설이다.

국원에 꽃핀 신라 제2 수부 ‘중원경’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고구려 땅인 탑평리 일대를 장악하고 매우 중시했다. 장준식 박사(충북문화재연구원장)는 논문을 통해 이 일대를 국원소경의 고지(古址)로 해석했다. 인근 누암리에서 찾아진 신라 통일기 고분군과 탑평리 절터 주변의 많은 건물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도 이 견해에는 동의하며 가장 유력한 초기 국원소경의 고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탑평리 일대는 비만 오면 수재가 많이 드는 곳으로 증가하는 취락과 인구를 수용하기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 시기에 와서는 보다 넓은 지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충주시 안림동은 문무왕시기 구축한 남산성(南山城) 바로 아래 동네로서 현재 토성의 유구가 남아 있다.)진흥왕은 탑평리 일대를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소경을 설치했다(<삼국사기> 권 제35 잡지 제4 지리 2 中原京 本高句麗國原城 新羅平之 眞興王 置小京). 그리고 가야세력을 집단 이주시켜 방어토록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신라 통일기의 문장가였던 강수(强首)는 자신은 본래 임나가라 출신이며 중원경(中原京) 사량인(沙梁人)이라고 했다. 또한 우륵과 같은 가야계 백성을 거주케 하여 예능을 장려했음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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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내 안악 3호분 벽화의 250여 명으로 구성된 대행렬도를 재해석한 코너
 


진흥왕은 한강 지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군사들을 독려하여 계속 한강 상류로 진출했다. 용감한 망명 가야 왕자인 김무력(金武力)을 앞세워 한강지배를 완성하는 것이다. 탑평리 일대는 바로 신라의 북방 공략 제일 전초기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국원소경이 중원경(中原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것은 언제일까.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문무왕 때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步)였다. 경덕왕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지금(高麗)의 충주(忠州)이다(文武王時 築城 周二千五百九十二步 景德王改爲中原京 今忠州).’ 경덕왕 이전에는 국원경 혹은 국원소경으로 불렸던 것이다.

탑평리 절터에는 통일신라 중원경 시대의 유물인 국보6호 7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이 남아 있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속설에는 중원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이 석탑을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 속에는 신라에 대한 중원지역의 민심을 아우르는 비밀이 숨겨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785년경, 신라 문성왕대(文聖王代)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탑은 높이 14.5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최고(最高)의 것이다. 기단은 각부를 수매의 석재로 쌓았으며 상·하층 기단 모두 면석에 탱주(撑柱) 4주(柱)씩을 세웠다. 탑신부 역시 각부를 수매의 석재로 구성했으며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되었다.

상륜부는 노반을 2중으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 복발(覆鉢)·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세부 수법에 있어서 약식(略式)과 섬약한 경향이 보이며 전체적인 형태도 높이에 비해 너비의 비례가 적어 지나치게 고준(高峻)한 느낌이다. 글마루 취재반은 탑평리에 세워진 충주시립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소장품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탑평리 절터 출토인 고구려와 당들이다. 삼국 복합문화를 대변하는 유산으로 가장 힘 있고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이곳에 가야만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최고의 고구려 유물이다. 오늘따라 와당들은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태양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분명 고구려는 우리 한국민족의 역사이자 대륙을 제패했던 강자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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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6호 7층 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