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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울린

“대한 독립 만세”

탑골공원에서

시작되다.


글, 사진.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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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 독립선언서 中



일제에 주권을 뺏기고 10년이 되던 1919년 3월 1일.

조국의 빛을 다시 회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외쳤던 “대한 독립 만세”가 전국으로 울려 퍼진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3·1운동은 남녀노소, 신분, 계급, 지역 모든 것을 초월한 2000만 민족의 한이 서린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었다. 이러한 3·1운동의 만세가 처음으로 울려 퍼진 곳이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탑골공원이었다.

민족대표가 오지 않자 학생이
시작하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2월 8일 도쿄의 일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은 3·1운동은 3월 3일에 거행되는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전국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오후 2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은 학생들이 몰려있는 탑골공원에서 진행한다면 많은 희생이 생길 것이라는 판단에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독립선언식이 끝나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달라 부탁했다.

조선총독부는 전화를 받자마자 태화관으로 달려왔고,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일본 경찰에게 잡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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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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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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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내 3・1운동 동판화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4000~500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이 오지 않자 한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에 총·칼을
들이댄 일제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서대문 등을 향해 행진했다. 서울뿐 아니라 평양·의주·선천·원산·진남포 등에서도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 공약3장 中

공약3장에서 발표한 바와 같이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더군다나 초기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됐기 때문에 무기를 들고 행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는 군대와 기마경찰의 무력으로 평화적 운동을 하던 군중들을 향해 총과 칼을 들이댔다. 이로 인해 군중들은 강제 해산됐고 주동자 130여 명은 체포, 구금됐다.

끊이지 않던 “대한 독립 만세”
3월 1일 서울을 기점으로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이유는 3월 3일에 있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배하기 위해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와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참배를 하러 올라온 지방인들이 고종의 장례식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서울의 만세 운동을 확산시켰던 것이다. 물론 준비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의 성격상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방에 조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있었다.

지방으로 확산된 만세 운동은 각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구심점이 되어 규모있게 확대되어 갔다. 3월 2일에는 함흥·수안·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컸던 평안도·함경도·황해도 등에서 서울과 비슷하게 만세 운동이 시작됐고, 5일에는 평양과 광주 등에서도 시작됐다. 10일 이후에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됐다.

각 지방의 교사나 학생들과 같은 지식인들은 독립선언서 등의 유인물들을 배포했고, 일부 지방은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중들의 의식을 깨우기도 했다.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은 지식인뿐만이 아니었다. 상인들도 철시투쟁을 통해 항일 감정을 나타냈다. 평양과 선천은 4일에 철시투쟁을 하였고, 서울 시내의 주요 상점들도 9일부터 철시투쟁을 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로써 만세 운동은 농민·중소상공인 등 계층의 구분 없이 모든 민중들이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커졌다.

노동자들은 3월 20일 이후 참여하게 됐는데, 22일에는 남대문 앞에서 노동자대회가 개최됐다. 이후 경성철도, 전차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주변 농촌 지역의 시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 장날이 되면 농민들이 항일 시위에 참여했는데 행상들은 장을 돌아다니며 시위의 경험을 전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퍼진 만세 시위는 비폭력 만세 시위에서 경찰서나 헌병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월 1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4월 30일까지 전국적으로 1200회 이상 나타났고, 약 200만 명이 참여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통계에 따르면 시위 기간 75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 5000여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에 잡혀간 수 또한 약 4만 7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만세 시위에 전국적으로 많은 민중이 참여했으며 이를 저지했던 일제의 무자비함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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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의 모습이 담긴 그림
 

종교를 초월했던 민족대표 33인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중병으로 붕어(崩御)하자 국민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 퍼지면서 항일 분위기가 점점 거세졌다. 이러던 중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일본에서 유학하던 조선 학생들의 2·8독립선언 등이 발표되면서 조선에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3·1운동을 계획하게 됐다.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에서 각자 준비하던 독립만세운동은 점차 통합이 되기 시작했다. 천도교의 중진이었던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지도자 손병희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계획하면서 천도교가 중심이 됐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3대 원칙으로 내세웠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천도교 단독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한 이들은 최남선을 통해 기독교의 대표자격이었던 평안북도의 이승훈에게 연락을 해 연합을 꾀했다. 최린은 승려 한용운에게 연락해 불교측의 합의도 받았다.

이렇게 천도교 측 15인(이종일,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박준승, 나인협, 임예환, 이종훈,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최린)과 기독교 측 16인(이승훈, 양전백, 오화영, 박희도, 최성모,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유여대, 이명룡, 박동완, 정춘수, 신석구, 이갑성,길선주, 신홍식), 불교 측 2인(한용운, 백용성)으로 총 33인으로 민족대표가 구성됐다. 이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범종교적 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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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탑골공원 팔각정, 2.탑골공원 내 손병희 선생 동상, 3.승동교회 표석, 4.천도교 중앙대교당 인근 표석
 

첫 만세를 부른 탑골공원은
어떤 곳?

탑골공원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한국 최초의 공원이다. 원래는 고려시대의 흥복사, 조선 시대에는 원각사가 있었지만 연산군 때 폐사하고 중종 때 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이후 빈터로만 있다가 1897년에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됐다. 개원 당시 ‘파고다공원’으로 명명됐지만 1992년에 옛 지명을 따 탑골공원으로 개칭했다.

3·1운동 당시 공원 가운데 있는 팔각정에서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던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의 낭독이 끝난 후 모여 있던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휘날렸다. 하지만 아직 탑골 공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탑골공원이요? 어르신들 많은 곳 같던데….”
“그냥 다른 공원들과 똑같지 않나요? 큰 의미
가 있는 곳인가요?”
“인사동 지나면서 자주 보죠. 공원 안에는 글
쎄요. 자세하게 본 적은 없어요.”


위 답변은 탑골 공원을 지나가던 시민들에게 탑골공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들은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공원을 지나다니지만 그 의미까지 알고 있는 이가 거의 없었다. 공원 내부를 조금만 둘러보면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세운 기념탑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새겨놓은 조각들을 볼 수 있다.

매일같이 탑골공원에 방문한다는 어르신들조차 눈 여겨 보는 사람이 없었다. 팔각정에 앉아있는 몇몇 분들에게 “이 팔각정에서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시냐”고 물었지만 정확하게 대답하는 이를 찾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신문을 보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3·1운동 때 여기서 독립선언서를 읽었지”라고 답했다.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3·1운동 흔적들
탑골공원에서 처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 시각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먼저 독립선언식을 하고 경찰에 체포되고 있었다. 이들은 원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예정이었지만 군중들의 희생이 걱정돼 거사 직전 급하게 태화관으로 옮겼다.

태화관이 있던 자리에 현재는 태화빌딩이 세워져 1층에는 33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걸려있다. 그리고 태화빌딩 앞에는 삼일독립선언 유적지가 적힌 비석이 있어 당시의 일을 기념하고 있다.

3·1운동의 중심이 됐던 천도교의 중앙대교당도 그 흔적 중 하나이다. 현재 서울 종로경찰서 뒤에 있는 중앙대교당은 3·1운동 전후로 세워졌다. 당시 건축비를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해 공사가 늦어졌던 이곳은 항일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했다. 명동성당과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 3대 건물로 꼽히기도 했지만 현재는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옛날의 영광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외에도 서울 곳곳을 눈 여겨 보면 3·1독립운동 기념터로 지정된 곳들을 발견할 수 있다. 탑골공원 근처에서는 학생대표들이 3·1운동을 계획했던 승동교회가 있다. 또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과 종각역 3번 출구 근처에 있는 기독청년회관(YMCA) 앞, 세브란스 병원, 서울마포구 마포전차 종점, 보신각 앞,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등에서 3·1 독립운동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쳤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중략)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 독립선언문 中

어두운 그 시대에 조금의 희망도 잃지 않고 거리로 나갔던 그들의 그 정신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흘린 피와 울부짖음으로 지금 우리는 밝은 태양 빛을 보며 하루하루를 전진해 가고 있다. 그들은 이 밝은 날을 위해 목숨 하나 아끼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나이의 많고 적음과 남녀의 구분은 조국의 광복 앞에서 하나도 걸릴 것이 없었다. 독립선언문에 나와 있듯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그들의 희생을 돌아보며 앞길의 광명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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