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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가야와

거열성의 백제 항쟁


가야 땅 운봉, 거창의 백제복국의지

성왕 때 옥천으로 출전한 가야세력도 운봉가야인가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예진,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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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고원
 

우리 고대 역사에서 잃어버린 나라 가야(加耶). 왜 가야는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특히 백제의 별도(別都)인 익산지역과 가까웠던 전북 남원시 운봉지역, 경남 함안, 거창은 가야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남원 운봉 고원에서는 100기가 넘는 가야 고분과 다량의 각종 철기 유물이 찾아져 속칭 ‘운봉가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가야세력은 언제까지 백제와 연합관계를 형성했던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조에는 매우 주목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즉 거열성(居列城 . 경남 거창군)의 백제 복국군의 처절한 저항이다. 신라문무왕은 신라 정예군을 파견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복국군을 정벌, 700여 명을 참수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三年 春二月 欽純 天存 領兵 攻取 百濟 居列城 斬首 七百餘 級云云).

이 시기는 663년으로 이때 거창은 백제(가야)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백제와 서부 지역 가야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6세기 중반까지도 신라와 백제의 중요한 전쟁에서는 연합하여 대항하기도 했다. 백제 성왕때 신라는 삼년산성인 보은을 거점으로 백제와 변경인 옥천진출에 사활을 거는 형국이었다. 금강 상류는 바로 백제의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서 이곳의 점령은 신라로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주목되는 것은 가야군(加良)과 왜군(倭軍)이 연합하여 참여했다는 점이다. 금강 상류인 옥천지역까지 참전한 가야와 왜. 이들은 도대체 어느 지역에서 출전한 것일까. 우선 옥천 전투의 배경을 알아보자.

동성왕(東城王)시기부터 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갑자기 틀어진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은 60여 년을 지킨 견고한 동맹이었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맞서 백제와 신라는 함께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하류와 상류로 나눠 각각 차지한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백제를 기습 공격해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신라 진흥왕이 먼저 배신한 셈이었다. 먼저 성왕은 즉위 초기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동맹관계를 유지할 것을 간절히 바랐다.

성왕은 태자 부여창(扶餘昌. 후에 위덕왕)을 선두에 내세워 옥천 고리산에서 군사를 지휘토록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는 백제군이 신라군을 기습하려다 거꾸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문무왕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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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유물과 봉수호
 

백제 왕 명농(明襛, 성왕)이 가량(加良. 가야)과 함께 관산성에 와서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나가 싸우다가 이(利)를 보지 못하게 되자, 신주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와서 교전함에 이르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의 고간(高于) 도도(都刀)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제군(諸軍)이 승승(乘勝)하여 크게 쳐 이기고, 좌평(佐平) 4명, 사졸 2만 9600명을 베어 죽이니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다. (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以 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
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에는 관산성 성왕의 죽음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출병시켜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에게 왕을 목을 베게 했다.

“고도는 천한 노비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 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명왕이 호상(胡床. 중국식 의자)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智. 도도의 다른 이름)에게 풀어 주어 베게 했다”라고 하고 있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구덩이에 파묻었다.

또 “신라가 명왕의 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추어 백제에 보냈다 한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 한다.” 라고 하였다(日本書紀卷十九欽明紀 聖明王之死,威德王繼位嗣立 ‘...其父明王憂慮,余昌長苦行陳,久廢眠食.父慈多闕,子孝希成.乃自往慰勞. 新羅聞明王親來,悉發國中兵,斷道擊破.是時新 羅謂佐知村飼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 奴也,明王名主也.今使賤奴殺名主,冀傳後世,莫忘於口 ‘ 已而,苦都乃獲明王,再拜曰 ’請斬王首 ‘ 明王對曰 ’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 ‘我國法 違背所盟,雖曰國王,當受奴手’一本云,明王乘距 胡床,解授佩刀於谷知令斬.明王仰 天大息涕泣, 許諾曰‘寡人每念,常痛入骨髓.顧計不可苟活.」 乃延首受斬.苦都斬首而殺 掘坎而埋.一本云,新
羅葬理明王頭骨,而已送於骨於百濟於百濟.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名此廳曰-都堂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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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향토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가야 시대의 토기
 


그렇다면 금강 상류 옥천까지 진출한 가야세력은 어디에서 파견된 것일까. 필자는 바로 운봉과 함양 거창 가야세력이 올라온 것으로 상정해 본다. 즉 운봉에서 금강 상류로 올라오는 길은 지금의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첩경이다.

운봉-함양 거창-무주를 거쳐 금산으로 빠지지 않고 방향을 틀어 충북 영동 양산-옥천이원 길을 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산(助川城)은 신라 백제가 교대로 뺏고 빼앗기던 땅이었으나 이 시기는 백제가 확보한 곳으로 상정된다.

이 교통로는 개천을 끼고 있어 군대가 행군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진 고대 교통로이다. 이 길의 종착지점은 바로 백제 이산현(伊山縣)인 고지인 옥천 이원평야다. 이산현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태자 부여창이 진주했던 고리산(古利山. 옥천군 군북면 환산으로 비정되기도 함)과 음이 비슷하며 인근에 금강 상류와 접하고 있다. 마을 촌로들은 강변 지명을 ‘구진벼루’라고 했다. 이산성을 중심으로 한 서쪽의 넓은 땅은 아늑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 많은 백제 유지가 찾아졌다. 백제 기와를 비롯하여 특유의 연질계 토기편이 산란하고 있다.

바로 보은에서 출전한 고간도도의 무리가 매복이 가능한 지역이다. 혹 성왕의 군대가 이산성과 가까운 이곳에서 생포된 것은 아닌지. 현재는 구진벼루를 옥천군 군서면 서화천으로 비정하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해선 더 많은 연구조사가 따라야 할 것 같다.

혹독한 추위가 엄습한 1월 초순 글마루 조사단은 남원 운봉고원 가야 유적과 함양을 거쳐 경남 거창을 조사했다. 운봉읍 유적 답사는 지리산 자원연구소장인 향토사학자 김용근(공무원)씨의 소개로 여러 곳을 답사할 수 있었다. 남원시 운봉읍 수철리 속칭 주세뜸에서는 유구가 교란되어 제철 유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수철리 유적은 지난 1961년 수해 때 쓸려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곳은 학계의 확대된 조사가 필요함을 절실함을 느꼈다. 운봉읍 북편 황산일대의 성지에 대한 조사도 마찬가지다. 운봉가야의 치소를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번 답사에서 남원향토박물관에서 복제품인 가야계 투구와 많은 토기 등을 촬영할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은 가야유물임을 한눈에 알려준다. 목 가리개까지 갖춘 가야 갑주는 일본에서 많이 발굴되는 유물과 비슷하다. 거창 거열산성 조사는 필자의 오랜 친구인 향토사학자 임부륙(독립운동가유족. 거창신문사대표) 사장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대뜸 거창은 백제의 고토라고 정의한다. “우리 지역은 삼국시대 신라가 아닌 백제 가야이며 그 복국 저항 정신이 후대에 와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것”이라고 들려준다.

이 지역의 고대 역사는 신라가 아닌 가야-백제의 향기가 어린다. 그것이 신라의 무력통합에 저항하여 백제를 복국하기 위한 처절한 항쟁 역사로 남은 것이다. 가야와 백제의 역사적 유대를 증거하는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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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향토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가야 시대의 그릇받침 실체가
 

남원 운봉가야 땅을 가다
왜 ‘운봉가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인가. 이 이름은 근래에 붙여진 것이다. 1500여 년전 운봉고원에서는 놀랄만한 철기문화가 꽃피었다. 남원시 운봉읍 산덕리에서 제철 유적이 찾아 진 것을 위시하여 아영면 두락마을에서 약 50기의 가야 고분이 발견됐다. 그리고 최근까지 100여기가 더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운봉가야라고 명명할 만큼 중요한 유물이 쏟아졌다.

금동신발이 발견된 것은 2013년이다. 두락마을 32호분 발굴, 조사에서 찬란한 가야계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필자는 최근 이곳에서 출토되었다는 많은 양의 철기 유물을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서울의 한 소장가가 공개한 유물 가운데는 철제 낯 가위 등 생활도구와 철제 투구와 갑주를 입은 사람모양의 유물도 보였다. 지금까지 가야 지역에서 보지 못한 유물이다. 속칭 운봉가야가 고령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했다고 주장하는 학계 의견이 일리가 있다.

운봉고원 안에서 발견된 제철 유적은 모두 20여 개소나 된다. 충북도 충주에서 발굴 조사된 탄금대와 다인철소(多仁鐵所), 진천의 백제 철기유적에 버금가는 발견이다. 또 2010년 남원 운봉면 월산리의 가야계 M5호분에서는 중국계 청자인 계수호(鷄首壺)가 수습됐다. 이는 백제 왕실과의 유대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매우 주목된다.

계수호는 어떤 도자기 일까. 닭의 머리 모양을 닮은 계수호는 백제왕이 지역 지배자인 담로에게 내린 최상급의 중국산 위세품(威勢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물은 그동안 익산 입점리, 공주 수촌리, 천안 용정리 등 백제 영역에서만 출토됐다. 이 유적에서는 또 경주의 황남 대총에서 나온 철제 자루 달린 솥도 수습됐다. 운봉가야가 백제는 물론 신라와도 문물 교섭을 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1993년 전북 동부의 진안고원에서도 가야의실체가 조사되기도 했다. 진안고원은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무주·진안·장수에 걸쳐 있다. 이 지역에서는 무려 300기 남짓한 가야계 고분이 확인됐다. 특히 200기의 고총은 장수에 몰려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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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고분 금귀고리
 

이들 고분들은 모두 대형으로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다. 흡사 고령, 함안(아라가야)지역의 고분군과 비교된다. 학계는 가야 본고 장 가야묘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른바 ‘진안고원 가야’가 이 지역에서 상당 기간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진안고원에는 80곳 남짓한 봉수(烽燧)가 장수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된다. 충남 금산과 전북 남원, 무주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는 모두 이곳 장수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 봉수로는 성왕 때 신라세력을 제어하기 위한 고리산(혹은 고이산) 전투에서 운봉가야 세력의 북상루트를 말해 주는 것인가.

가야는 어떤 나라였나
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하던 나라였다. 1세기 무렵 낙동강 유역에 거주했던 수백의 집단부락이 연합하여 탄생된 부족국가로서 복수(複數)의 호족이 지배하던 국가였다. 고령에 있었던 대가야를 맹주로 하고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안라(安羅)가야, 진주 혹은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固城)의 소가야를 합쳐서 ‘6가야’라 불렀다.

처음에는 백제와도 국경분쟁을 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일본열도로 진출했다. 고대 일본을 지배했던 상무적 세력을 가야계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고대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이 소략하여 잃어버린 역사가 됐다.

가야의 본래 이름은 가라(加羅)였지만 ‘가야(伽耶)’라고도 불렸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기원후 48년 7월 27일, 김해의망산도(望山島)에 한 척의 배가 닿았고, 타고 온 여인은 아유타국의 공주로 김수로왕의 비(妃)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설화는 고대 아름다운 로망이다. 가야는 이미 2000년 전부터 중국 지역은 물론 인도, 동남아 지역과도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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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열산성에서 발견한 와편
 

이들 나라는 고려, 조선 시대 군, 현 정도의 영역으로 해안가나 강 중심의 영역을 다스렸다. 김수로왕이 건국한 금관가야는 현재의 김해포구에 있었던 ‘구야한국(狗耶韓國, 三國志 魏志倭人傳)’을 말한다.

가야의 운명은 신라 백제의 팽창으로 위기를 불러왔다. 작은 부족단위의 연맹으로는 우수한 군사력을 가졌던 신흥 백제와 신라를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경기 충청 전라도에 산재해 있던 토착 세력 마한(馬韓) 54국이 온조왕시기부터 백제에 병합된 것과 다르지 않다. 신라 왕도 경주와 가까웠던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에는 사실상 가야 제국은 분열로 치달았으며 백제 지역 인근의 가야세력은 백제에 편입되거나 지배를 받게 된다. 신라 진흥왕은 금관가야세력을 받아들여 혼인결속으로 유대를 강화했다. 가야인들의 상무정신은 구가야 왕족인 김무력(金武力), 김서현(金舒玄), 김유신(金庾信) 삼대(三代)의 용맹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은 신라의 전위에서 북진 정책을 도모하게 된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개척한 후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가야 왕자였던 김무력을 도독으로 임명한다. 아들 김서현은 백제 접경인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진천) 태수가 되고 백제 고구려 전쟁의 주역으로 삼게 하는 것이다. 명장 김유신의 어머니는 신라 갈문왕 입종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으로 이쯤에 와서의 유대는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운봉가야’는 금관가야세력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백제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제는 이 지역을 특별히 대우했으며 왕관을 내리고 중국제 봉수호를 하사, 충성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 시기 지리산 서쪽인 남원 장수 진안 등 전북지역 가야세력도 백제의 영향권에 들남원 고분 금귀고리 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라-백제 처절한 전장 아막성은 어디인가
아막성(阿莫城)이라고 했다. 일설에는 모산성(母山城)으로도 불린다. ‘아막’ ‘아양’ ‘아낭’과 모산은 어머니라는 뜻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성리, 아영고원에 있는 석축산성이다. 1977년 12월 31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와 백제는 이 성을 두고 엄청난 전쟁을 벌였다. 602년(무왕 3)에 이 성에서 가장 큰 전쟁이 벌어졌다.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여 신라 장군 무은(武殷)이 전사하자, 그 아들인 화랑 귀산(貴山)이 추항과 함께 나아가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둘 다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三年秋八月條).

일부학자들은 <삼국사기> 지리지를 토대로 아막성을 모산성으로 비유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에 아막성과 모산성을 각기 다른 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문학자들은 ‘아막’은 주성(主城) 혹은 주곡(主谷)을 뜻한다고 한다. 이 지역이 섬진강의 계곡분지를 나타내는 지형상의 특색과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데서 나왔다. 이 성은 총길이 633 에 달한다.

학술 조사보고서에 ‘성터는 동북쪽을 접한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4각형의 성은 백제보다는 신라의 축성양식이다. 보은 삼년산성도 정방형에 가깝다. 성은 북변 수구에 북문지(北門址), 서변 중앙에 서문지(西門址), 동남우(東南隅)에 가까운 동변에 동문지(東門址)가 남아 있다. 길이 208.1 , 주위 총632.8 에 이르는 북변은 곡선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 안에서는 백제 연질 기와편과 토기편 등이 발견되고 있다. 북문지 수구 동편에는 지름 1.5 의 원형석축(圓形石築) 정호지(井戶址)가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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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민 최후 항전지 거열산성 석성지


백제 유민 최후 항전지 거열성을 가다
거열성(居列城)은 경상남도 거창군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지에는 ‘읍의 북쪽 8리에 있고, 둘레가 3리나되는 석축산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성 아래에서 성곽이 보이지 않게 산의 지세와 능선의 기복을 이용하여 축성했다고 한다.

해발 572 의 건흥산 정상부와 앞쪽의 봉우리 양옆의 계곡을 둘러싼 형태로 축성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취재반과 임 사장이 확인한 것은 정상부분에 길게 나타나는 고식의 판축성이다. 이는 삼국시대 전형적인 축성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북쪽을 높게 쌓은 여러곳에 장대 혹은 보루가 산견된다. 이곳에서 가야 및 백제 토기가 수습되었다.

이 산성은 ‘건흥산성(建興山城)’으로도 불린다. 이는 아무래도 백제 복국운동과의 연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700명의 전사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복국운동은 좌절되었으나 후대사람들이 ‘건흥’이라고 높여 부른것은 아닐까.

이곳은 또 신라의 대당투쟁 때에도 주목된다. 673년 ‘거열주(居列州)에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을 쌓아 당(唐)과의 전쟁을 대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산성을 지칭한 것이다. 정상부 새로 복원된 석성은 신라축성 형태다. 충북단양 온달성, 보은 삼년산성 등에서 보이는 석성형태와 비슷하다. 이는 대당 투쟁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한 <삼국사기>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백제 멸망 직후 거열성 주민들은 신라에 저항했지만 외세인 당나라와 전쟁할 때는 통일신라를 도왔던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로 보아 호국유적임이 틀림없다.

이 성의 첫 지표조사는 1997년에 실시됐는데 거열성의 성벽 축조방식이 품(品)자형 쌓기를 주로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체성(體城)의 협축과 편축을 모두 확인하였으며, 내성(內城)과 건물지의 흔적도 확인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1115 이고, 높이 8 , 폭은 아랫 부분이 7 , 윗부분이 4 이다.

시굴 조사는 2004년에 실시됐다. 복원되지 않은 성벽과 성 내부의 추정 건물지 3개소를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체성의 현황, 축조시기, 축조방법, 현문식(懸門式)의 북문지 확인, 추정 제사건물지 등의 시설물을 확인하였다. 또한 2008년에는 북문지 서편 곡간의 서벽 내부 시설 등에 대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체성(퇴성구), 집수시설 2기, 내부 석축을 확인하였다.

현재는 경상남도 기념물로 되어 있으나 군민들은 사적(史蹟) 지정을 바라고 있다. 2016년에 거창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학술발표회를 가진 적도 있다. 백제복국운동의 거점이자 대당투쟁의 호국유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취재반은 성안에서 백제 시대의 와편과 백제 가야 토기편 등을 찾았다. 숱한 역사의 편린들은 이 성의 중요성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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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발생한 큰 수해로 수철마을의 제철 유적이다 떠내려갔을 뿐 아니라 물길도 바뀐 현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