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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을 예견한

‘오합사’는 어디


붉은 말 죽음과 북악 오합사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이예진, 이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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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본 오합사 터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멸망시기 이상한 사건이 많이 발생한다. 의자왕 19년(659) 2월 여우들이 떼를 지어 궁중으로 들어오고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5월 사비하(泗沘河) 서남쪽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 8월에 한 여자의 시체가 하천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나 되었다. 9월에 궁중에 괴수가 우는데 사람의 곡성과 같았고 밤에 귀신이 궁성의 남쪽 길에서 울었다는 등 기록이 있다.

당시 의자왕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신라의 여러 성을 공벌하고 국력을 과시할 때였다. 신라와는 원한이 극도로 쌓여만 갔다. 그런데 이보다 5년 전에도 이상한 징조가 나타났다. 의자왕 15년(665)에 왕은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궁전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지었다. 망해정은 아마 지금의 부여 궁남지 부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5월 붉은 말이 북악의 ‘오함사’로 들어가서 절에서 울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보인다(夏五月 騂馬入北岳 五含寺 鳴匝佛宇 數日死 云云).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서는 오합사가 ‘오회사’로 표기된다. ‘현경(現慶) 4년기미(己未)에 백제 오회사(烏會寺)에 큰 적마(赤馬)가 나타나 주야(晝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녔다(現慶四年 己未 百濟烏會寺 (亦云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遶寺行道云云).’라고 하여 백제 멸망의 징조가 나타난 장소로 나타나고 있다.

북악의 오합사. 북악은 어디이며 오합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백제 공주시기 창건된 사찰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많지 않다. 부여 왕도를 중심으로 여러 곳이 조사되고 있으나 10여 곳을 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익산 미륵사지가 가장 규모가 크다. 그런데 북악에 오합사가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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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합사 터
 

백제 성왕시기 북악은 어디인가
백제도 신라처럼 삼산오악(三山五嶽) 신앙을 가졌던 것인가. 사비시대 이전의 백제에서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성왕 대 사비도성의 축조에 부응, 이 신앙이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 초 기록은 ‘북악’이 지금의 북한산이다. 즉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땅을 바라보고 정착 이유를 삼은 것이 바로 이곳이다. 백제가 한강 위례성을 잃고 공주-부여로 천도한 이후의 북악은 지금의 북한산 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산이 백제의 북악이었을까.
북악을 상고하는 근거는 왕도 사비의 북쪽에 있는 신성한 산을 지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악에 대한 위치비정도 백가쟁명한 실정이다. 북악을 칠갑산(七甲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며 또 보령 성주산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보령과 홍성의 경계에 있는 오서산(烏棲山, 여지승람 남포현조에는 烏栖山으로 나온다)을 지목하고 싶다. 보령현조에도 ‘오서산 본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오서산은 높이 790m(성주산은 680m로 낮다)의 높은 산이다. 옛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오서산이라 불려졌다. 오서산은 바로 오합사와 발음이 비슷하다. 사비에서 북악이라면 성주산보다는 오서산이 더 북쪽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성주산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은 오서산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오자를 딴 오합사로 명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어문학자들은 ‘오(烏)’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까악’을 모방한 의성어라고 한다. 까마귀는 몸이 검은 색깔이기 때문에 ‘烏’자는 ‘까마귀’이외에 ‘검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검다는 것은 크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 검단산이나 충남 천안시의 흑성산(黑城山)도 같은 의미가 된다.

백제가 오악에 사찰을 건립한 것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천신에 제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의 국가 제사는 성왕의 사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남조인 양(梁)의 영향으로 유교식 국가 제사 체계로 재정비되면서이다.

백제왕은 매년 4월에 하늘과 오제(五帝)에 대한 제사를 시행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2년에 왕은 왕흥사를 창건하고 한재가 들자 칠악사(漆岳寺)에 행차하여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사가 보인다(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 三十人 大旱 王行 漆谷寺祈雨).

백제 오합사는 어디인가
학계는 오합사 또는 오회사(烏會寺) 유적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 밑에 있는 성주사를 지목하고 있다. 이 절터에 있는 숭암산성주사 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에 주목되는 기록이 있다.

“성주선원(聖住禪院)은 본래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大業) 12년 을해(乙亥, 616)에 백제국 28세인 혜왕의 왕자인 법왕이 오함사를 건립한 곳이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바라여 세운 원찰(願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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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혜화상비
 

또 김립지 찬 성주사비(金立之撰聖住寺碑)에서는 ‘나라가 왕태자에게 바쳤다(國獻王太子).’라고 하여 절의 태동 배경을 전하고 있다. <숭암산성주사사적>에서 전하는 오회사의 창건 시기는 대업 12년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백제 제30대 무왕 17년(616)에 해당한다. 이 해는 법왕시기보다는 늦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남포현조에 성주사(聖住寺)가 나온다. 불우조에 ‘성주사. 성주산 북쪽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의 탑비가 있다(聖住寺在聖住山 北有 崔致遠所撰 大 朗慧和尙塔碑).’라고 기록하고 있다.

남포현은 본래 백제의 사포현(寺浦縣)으로 신라 시대에 남포현(藍浦縣)으로 고쳤다고 돼 있다. 이 금석문을 감안하면 성주사의 전신은 백제 오합사이며 신라 때 성주사로 명칭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주사 터는 동국대 박물관이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건물 층에서 백제시대의 연화문와당이 출토되는 또 하나의 퇴적층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금당지에 백제시대 유구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오합사-성주산문의 법등
<숭엄산성주사사적>에 의하면 ‘대중 원년(大中元年.847) 정묘(丁卯) 11월 11일 낭혜가 오합사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눈이 허리 반쯤까지 내려 임시로 며칠 머물렀다. 승 유적(裕寂),법행(梵行), 지숭(志崇) 3인이 먼저 그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굳이 계속 머물기를 청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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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루 취재단이 발견한 와편
 
낭혜는 어떤 인물인가. 낭혜(801~888)는 통일신라 문성왕시기 고승으로 법명은 무염(無染)이다. 성주사를 구산선문의 하나로 중흥시킨 장본인이다. 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법을 물었고, 제자는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원장(圓藏)・영원(靈源)・현영(玄影)・승량(僧亮)・여엄(麗嚴)・자인(慈忍) 등이 그의 선풍을 선양하여 성주산문의 기반을 세웠다.

무염은 한때 영동 황간 심묘사(深妙寺, 옛날 상주 땅)에 머물면서 서라벌 여러 왕들의 법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심묘사는 지금은 폐사되어 절터로만 남아있다. 낭혜대사가 성주사에 있으면 왕도로 오는 길 멀어 황간에 머물 수 있는 왕찰(王刹)을 지어준 것이다.

오합사는 낭혜화상이 머물면서 향화를 이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 언급돼 있는 기록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흔이 무염화상에게 ‘웅천 주 서남쪽 모퉁이에 한 절이 있는데, 이곳은 나의 선조인 임해공이 봉지로 받은 곳입니다. 그 사이 커다란 불이 일어나 사찰이 반쯤은 재가 돼버렸으니, 자비롭고 현명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오합사에 주석할 것을 권하고 있다. 즉 무염이 주석하기 이전 오합사는 거의 폐사 지경에 이른 황폐한 사찰이었다는 것을 이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성주사 전성기에는 법당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이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주사는 16세기 중엽 무렵까지 법등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이후인 17세기에는 성주사가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숙종 대 노론계의 문인 임영(林泳)이란 분이 있었다. 임영은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송시열(宋時烈)에게도 수학하여,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하였다. 벼슬은 이조정랑・검상・부제학・대사헌・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남긴 <성주동(聖住洞)>이란 시는 이 절이 17세기에는 폐사되었음을 알려 준다. 다른 지역이 그렇듯 임진전쟁의 전화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인가.

어느 때 절이 기와와 돌만 뒹구는지
텅 빈 산에 철불만이 시름겨워라
고운의 비문은 닳아 가고 있는데
백월의 탑비는 여전히 서 있구나

백제 가람의 증거 뚜렷

동국대학교 발굴 당시에 부여 왕도기 제작된 정연한 백제 와당이 출토되었다. 법왕시기 창건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30여년 전 필자도 이 절터를 답사하여 완형의 와당을 수습했는데 지금은 청주시 문의 와당 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와당을 보면 초창당시 매우 훌륭한 건축물이 조영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동국대 박물관은 발굴시 금당지(金堂址), 삼천불전지(三千佛殿址), 회랑지(回廊址), 중문지(中門址) 등의 건물터를 확인했다. 또 통일신라시기로 추정되는 토제불(土製佛)도 다수 수습했다. 이 토제불은 삼천불전지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미의 재발견(불교건축, 2004. 11. 30. 솔출판사)>에 게재된 조사개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차 가람은 오합사가 창건되던 당시의 가람으로, 중앙에 목탑이 있고 그 뒤로 금당이 위치하는 백제의 1탑 1금당 형식이었을 것이다. 2차 가람은 오합사가 중창되던 시기의 가람으로 전돌과 돌을 혼합하여 구축한 기단이 발견되었고, 이미 회랑이 존재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3차 가람은 성주사로 재 창건되던 시기의 가람이다. 판석으로 기단이 구축되고 목탑 대신 오층석탑이 세워졌으며, 회랑도 더 넓게 건립되었는데 이때의 성주사가 가장 정형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기였고,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가운데 부분의 폭이 더 넓은 亞(아)자형 건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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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천불당초가 새겨진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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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만든 부처
 

4차 가람은 금당 동쪽의 회랑을 폐기하고 그자리에 정면 9칸, 측면 4칸의 삼천불전을 서쪽으로 향하여 세웠던 시기의 가람이다. 삼천불 전은 41.6m×18.1m의 대규모 건물로, 중앙에 불단(佛壇)을 두고 그 주위로 소형 불상 3000기를 안치할 수 있는 단을 두었다. 대략 16세기로 추정되는 5차 가람은 삼천불전을 더욱 확장하고 나머지 회랑의 일부를 승방 건물로 바꾸어 비정형적 가람으로 변화하였다.

성주사의 가람배치 가운데 가장 특이한 점은 오층탑 1기와 삼층탑 3기가 앞뒤로 나란히 배열된 유일한 사례라는 것이다. 조사 결과, 이들 석탑은 동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차이를 두고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의 오층석탑은 성주사 창건기인 신라 후기에, 뒤편 동·서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추정된다. 동·서 삼층탑 사이에 위치한 중앙 삼층탑은 다른 두 탑보다 약간 더 큰데, 14세기 이후에 다른 곳에서 옮겨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리하면 1탑 1금당식 가람으로 창건되었지만, 몇 백 년 후 금당 뒤에 동서 쌍탑을 세웠고, 다시 몇 백 년 후에 중앙탑을 더 세워 1탑-3탑식 가람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교리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가람이다. 성주사 가람배치의 비밀을 언젠가는 밝혀야 할 것이다.

성주사지에는 현재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 광탑비, 보물 19호 오층석탑, 보물 20호 중앙삼층석탑, 보물 47호 서삼층석탑, 지방문화재인 동삼층석탑과 석계단과 석등이 있다. 부도비는 절터 서북쪽 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이 부도비는 현존하는 통일신라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높이 4.5m, 폭 1.5m, 두께 42㎝로 거의 원형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의 재질은 보령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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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얼굴무늬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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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무늬 수막새
 

글마루 취재반은 12월 초 성주사지를 답사했다. 서울서 2시간 30분 거리, 절터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신라 5층석탑이다. 낭혜화상이 생존했을 당시 영화가 짐작이 간다. 1000년 풍우를 견딘 고색창연한 석탑은 웅장하며 빼어난 석조미술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잔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웅장했을 목조탑은 찾을 수 없다. 절터에 뒹구는 백제 시기 만들어진 와당의 파편만이 취재반을 맞는다. 회색 연질의 무수한 백제 기와 파편은 이 절의 백제적 영화를 증거하는 것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전기의 와편도 무수히 산란하다. 그러나 ‘오합’ 혹은 ‘오회(烏會)’, ‘오함
(烏含)’이라고 새겨진 명문 와편은 찾을 수 없었다.

최치원이 짓고 최언위가 쓴 낭혜화상비
낭혜화상비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 최언위(崔彦撝)가 글씨를 썼다. 최언위는 고운의 사촌 아우다. 890년(진성여왕 4)에 건립되었으니 고운이 서산의 대산 부성태수(富城太守)로 있을 당시가 아닌가 상정된다.

최언위는 885년(헌강왕 11)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나라에 가서 문과에 급제한 것은 고운과 같다. 909년(효공왕 13)에 귀국,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郎瑞書院學士)에 제수되었다. 그는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렸다.

부성은 서산시 지곡면에 있는 신라 때 치소로 필자에 의해 1970년대 후반 발견되었으며 토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성안에서는 통일신라기 많은 토기편과 와편이 산란하고 있다. 인근 산성리에는 최치원 위패를 모신 사당 부성사(富城祠)가 세워져 있다. 부성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며 고운이 ‘부성태수’로 있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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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터의 석조연꽃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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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운이 낭혜화상의 비문을 찬술한 것일까. 여기에는 낭혜를 지극히 존경한 신라 왕실의 의지가 엿보인다. 진성여왕은 당시 부성, 대산 태수로 있던 고운을 불러 낭혜화상의 비문을 명령한 것이었다. 비록 황음한 여왕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던 진성여왕이었지만 육두품에 불과했던 무호 최치원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못되었던 것이다. 고운은 이 비문에 <삼국사기>와는 다른 표현으로 진성여왕을 미화했다. ‘여왕의 은혜가 바다와 같이 넘친다’라는 표현도 있다. 진성여왕을 당대의 성군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낭혜화상비는 비신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이며 국보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대표적 금석문이다.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螭首), 4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생동감이 넘친다.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비문은 모두 5000여 자에 이르며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적혀 있다. 비문은 웅장하고 유려하여 당나라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고운의 문재가 넘친다.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없다. 당나라 연호를 적지 않은 것은 또 무슨 연유일까.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한 평가를 받는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당시 유행했던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체를 닮고 있다.

글마루 조사단은 이번 조사에서 오서산을 답사하지 못했다. 주변에 있는 절터들도 조사해야 한다. 오서산을 북악으로 상정한다면 어디선가 백제 가람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서산 주변에는 여러 곳에 절터가 있다. 이 절터에 대한 보령 홍성 향토사학자들의 조사가 이뤄졌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