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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제 회맹

취리산은 어디

‘전쟁하지 말자’ 금서로 맹약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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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가 주선한 나·제간 평화약속
신라와 백제는 663년 여름 오랜 전쟁의 악연을 끊었다. 한 때는 혼인 동맹으로 굳은 유대를 지켜왔으나 지속되는 국경 분쟁으로 전쟁을 시작하다가 옥천 구천(狗川)에서 신라군이 성왕을 잡아 참수(554년)하고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양국은 이후 여러 곳에서 복수혈전을 계속했다. 의자왕 시기 지금의 합천 대야성 전투는 가장 비극적인 살육전이었다. 백제 장군 윤충(允充)은 1만 군사로 대야성을 포위, 항복하고 나온 성주와 김춘추의 딸을 참수하여 왕도 경주로 보낸 것이다.

사위와 딸의 효수된 머리를 받은 김춘추는 드디어 백제 정복의 야망을 갖게 된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킬 생각은 이 시기부터다.

결국 김춘추의 의지대로 당나라는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여 13만 대군을 파병하였다. 서해를 넘어온 당나라군은 백강으로 올라와 기벌포에 상륙하였으며, 신라 5만 대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와 조우하여 힘들게 왕도 부여로 진격하였다. 백제 왕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다시 불길이 지펴진 복국전쟁은 향후 3년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로부터 5년 후 당나라는 신라와 백제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바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웅진도복 백제 왕자 융과 신라 문무왕에게 권유한 것이다. 665년 가을 신라문무왕과 웅진도독 백제 융 사이에 약정이 이루어졌다. 입회는 웅진에 남아있던 당장 유인원이었다. 이 회맹의 결과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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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한옥마을 전경
 

백마의 피로 입을 적시며 약속한 전쟁방지
665년 8월이었다. 취리산(就利山)에서 당나라 \ 장수 유인원(劉仁遠)이 입회한 가운데 신라 측에선 문무왕과 여러 대신이 참석하고 백제 측에서는 웅진도독 부여 융(隆)이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전쟁 종식을 위한 회맹(會盟)이 이루어졌다.

절차는 중국 고대의 방식의 예에 따랐다. 산에 신성한 제단(祭壇)을 쌓고 백마를 죽여 하늘과 땅의 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당사자들의 입에 발라 맹세하게 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당 인덕 2년 부여 풍은 신라왕과 함께 웅진성에 모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게 하고 유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만들었다. 이 글을 금서철계로 만들어 신라의 종묘 안에 두게 하였는데 그 글은 신라본기 속에 적혀있다(人德二年 與 新羅王會熊津城 刑白馬以盟 仁軌爲盟辭 乃作 金書鐵櫃 藏新羅廟中云云).”

맹세하는 글(盟文)은 유인궤가 지었는데, 내용은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6 문무왕 5년조에 기록이 나온다.

“그 맹문에 말하기를 ‘지난날 백제의 선왕이 순역의 이치에 어두워 인호(隣好)에 돈돈치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고 고구려와 결탁하여 왜국과 교통하여 잔인하고 포악함을 일삼아 신라의 성읍을 침범하고 노략하므로 편한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 한 사람이라도 살아갈 곳을 잃으면 민망히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효유하였으나 산하가 험하고 거리가 먼 곳을 믿고서 천경(天經)을 무시하므로 황제는 이에 노하여 삼가 정벌을 행한 것이다. 깃발이 향하는 곳에 한번 싸워 크게 평정하였으니 마땅히 그 궁궐을 헐어 늪을 만들어서 후손에게 경계시키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세에 교훈을 남길 일이나 순한 자를 품고 배반한 자를 치는 것은 전왕의 영전(令典)이요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지는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왕철의 통규이다. 일은 반드시 예를 본받아 낭책(史記)에 전하므로 전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 융(扶餘 隆)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고 옛 땅을 보존케 하니 신라와 서로 의지하여 길이 여국이 되고 각자 묵은 감정을 없애 화친을 맺을 것이며 각각 조명을 받들어 길이 번속(藩屬)이 되어야 한다. 사신 우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권유하고 이 뜻을 선포케 하니 혼인을 언약하고 맹세를 하여 희생함으로써 삽혈하고 함께 시종을 돈독히 하여 재앙과 환난을 나누어 걱정하며 은의를 형제와 같이 하라. 공경히 명령을 받들어 감히 어기지 말고 맹세한 뒤로는 서로 절의를 지킬 것이다. 만약 맹약을 어기고 다른 생각을 가져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신명이 굽어보고 백가지 재앙을 내리어 자손을 기르지도 못할 것이며 사직을 지키지도 못하게 하여 제사조차 끊어져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鐵卷)을 만들어 종묘에 보관하여 자손만대에 감히 어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신이여 듣고 흠향하여 복을 내려 주십시오.’하였다. 이는 유인궤의 글이다. 피를 바르는 일이 끝나자 희생과 폐백을 제단 위에 묻고 그 글은 우리 종묘에 보관하였다(원문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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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목 해동지도, 연미산은 표기가 보이지 않는다.
 

회맹문은 당나라 입장에서 쓰였다. 왕자 융을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만들어 사직을 보존케 하고 양국의 평화를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 문무왕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문구였다.

회맹이 이루어지고 유인궤가 다시 당으로 돌아가자 웅진도독 융은 신변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웅진도독부는 신라군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으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융은 서둘러 당나라로 돌아간다. 백제 본기 제6 의자왕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융은 이어 당경으로 돌아갔는데 당 고종은 그를 웅진도독 대방군 왕으로 봉하여 귀국을 종용했다.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융을 통치케 하였으나 신라는 강성하므로 융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구려 땅에서 있다가 죽었다. 융의 사후에도 당은 백제사직을 잇게 하기 위해 당의 무후(武后) 혹은 융의 손자경(敬)을 왕의 관작을 주었으나 신성마저 신라 발해와 말갈이 나누어 지배했으므로 결국 백제국계(國系)는 끊어지게 되었다(亦歸京師 儀鳳中以隆爲熊津都督帶方王遣歸安輯餘衆 乃以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時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基地已爲新羅渤海靺鞨小分 國系逐絶云云).”

이 회맹문으로 당의 야심을 간파한 신라는 대당투쟁을 결심했으며 은근히 융을 압박했던 것 같다. 백제 땅을 웅진도독의 지배하에 두고 내정을 간섭하려 했던 당. 신라가 수많은 피를 흘리고 통일을 획책했던 의도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융이 다시 웅진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정세는 판가름 나있었다. 이렇게 되자 당은 도독부를공주에서 신성(新城, 랴오닝 성 푸순 동북쪽 북관산 위에 있었던 고구려 성)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신성마저 발해, 말갈, 신라가 차지하는 바람에 더 이상 백제 웅진도독으로 지위를 지니지 못했다.

당나라는 융의 손자 경에게 도독을 임명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백제는 더 이상 역사를 잇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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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사직에 금서철궤로 보존되었던 역사적 회맹문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문무왕 시기 대당 투쟁을 하면서 없애버린 것은 아닌지. 당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한 675년 이후에는 금석 맹약이 사실상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취리산은 어디인가
신라 말에 백제 옛 왕도 웅진을 돌아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감회에 젖은 시를 적었다.

비단옷에 옥띠를 두른 듯 그림 같은 풍경
(襟帶江山似畵成)
기쁘도다. 오늘에는 고요히 병진 사라졌네
(可潾今日靜消兵)
음산한 바람에 홀연히 놀란 파도 일으키니
(陰風忽捲驚濤起)
그때의 북소리 아직도 들리는 듯
(猶想當時戰鼓聲)


전쟁은 어느 시대이건 비극이다. 고운도 격렬했던 나·제간 전쟁터를 찾아보고 고요해진 왕성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것이었다.

그러면 문무왕 시기 백마를 잡아 전쟁종식을 서약한 역사적 장소 공주 취리산이 어디인가. 취리산을 두고 여러 설이 존재한다. 공주시 신관동의 속칭 취리산, 인근의 연미산, 무령왕릉이 있는 정자산 등이 지목되고 있다.

또 지방 학계서는 복국운동 시기까지 나·제간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대전 동부 질티 즉 질현산성(迭峴山城, 고봉산성)을 취리산 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취리산으로 불리는 산은 공주시의 신관동(新官洞) 쌍신동(雙新洞)과 우성면 도천리(道川里) 사이의 고도 193m의 산이다. 산의 모습이 곡식을 고르는 키의 모습과 비슷한 데서 유래 했다고 하며, 학자들은 ‘키뫼’가 ‘치미’로 변화하였다가 ‘취리산’으로 음운이화한 것으로 해석한다.

1977년에 자원개발연구소에서 발행된<1:50,000 공주 도폭 지질도>에 따르면 쌍신들에 위치해 있는 취미산은 충적지로 표시되어 있으며 지명만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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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산 제단터
 

<동국여지승람> 공주목 고적조에는 ‘취리산 주북쪽 6리에 있다(在州 北六里云云).’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회맹에 관한 <삼국사기>를 인용하고 있다. 주에서 ‘북쪽으로 6리’라면 바로 이곳에 해당한다.

1955년 공주군이 발행한 <백제고도 공주의 명승고적>에 취리산 유적이 나온다. 6·25 전쟁당시 취리산 정상부에 판 참호 현장을 9·28 수복 즉시 답사했을 때 용이 그려진 장경병(長頸甁) 파편과 함께 산 아래 민가에서 백제토기 두점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1997년에는 공주대학교박물관이 취리산을 시굴했다. 이 시굴에서 다수의 백제 토광묘와 백제 토기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회맹단 유적은 밝혀내지 못했다. 마을에서 고로의 증언을 들어보면 일제강점기에는 갑옷과 무기를 비롯한 다양한 골동품이 출토되어 엿장수에게 팔려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연미산에서 발견된 제단 유적 그 다음 회맹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바로 북서쪽에 자리 잡은 해발 237m의 연미산(燕尾山)이다. 취미산(鷲尾山)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공주 일대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가장 높은 산으로 그 정상부에는 공교롭게도 방형 제단 같은 유적이 남아있는 점에서 취리산 회맹이 열린 장소라는 주장이 제기된 곳이다.

2008년 12월 1일 이후 같은 달 10일까지 공주대박물관이 문제의 취미산 정상부 방형 추정 제단터를 시굴 조사했다. 그 결과 이 석단은 석재를 이용해 안 채움을 한 유적이며, 그곳 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인화문 토기편을 비롯해 고려시대 토기편 등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를 보면 연미산은 백제시기부터 신라 고려시기 이르기까지 하늘에 제사를 지낸 신성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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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정자산에서 출토된 연꽃무늬수막새(공주박물관 제공) 우) 정자산에서 출토된 세발토기(공주박물관 제공)
 

제단 유적이 찾아진 것은 이곳이 회맹장소로 가장 유력하다는 증거이다. 특히 취리산으로불리고 있는 산은 취미산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글마루 조사단은 단풍이 아름다운 11월 중순 제단이 발견된 장소 연미산을 답사했다. 연미산은 자연미술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마침 ‘천년의 시간을 지나 書’라는 테마로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유명시인들의 짤막한 시화(詩畫) 걸리고 작가들의 설치미술품이 자리 잡고 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 <부탁> 한수를 옮겨본다.

너무 멀리까지 가지 말아라. 사랑아/ 모습보이는 곳까지만/ 목소리 들리는 곳까지만 가거라/돌아오는 길 있을까 걱정이다. 사랑아

가히 수 백계의 계단은 될 듯싶다. 가파른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시멘트 계단을 조성했다. 짙어져가는 만추 오방색의 단풍잎이 아직은 살아 있었다. 연미산은 한눈에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웅진 전체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제단이 있었던 곳은 민묘가 자리 잡아 유적을 훼손했다. 여기저기 고대에 치석하여 쌓은 축대 형태가 남아있다. 민묘를 조성했을 당시 축대의 돌은 그대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기와 조각이나 토기편을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험하고 고준한 산에 건축물이 있을 리 없다. 정상은 천제단(天祭壇)을 삼아도 손색이 없을 지형을 이루고 있다. 왕도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 아닐까. 취재반은 한참동안 정상 주변의 바위들을 살피는 데 주력했다.

혹시 바위에 당시의 사정을 기록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금석문을 발견하는 행운은 없었다. 취재반은 산을 내려와 연미산과 취리산을 연결하는 일대의 산 능선을 주목했다. 금강 변에서 본 취리산 정상에는 토루(土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토루는 혹 백제 복국운동 당시 공산성과 대치했던 성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또 하나의 주목되는 정자산 제사 유적
정자산은 취리산과는 금강을 두고 맞서고 있는 위치에 있다. <여지승람> 공주목 산천조에는 정자산이 아니고 ‘정지산’으로 기록되고 있다. 즉 ‘정지산 재주 서북 오리(艇止山 在州 西北 五里)’로 나온다. ‘정지’란 말은 배가 멈추는 곳을 말한 것인가. 왜 정지산이 ‘정자산’으로 이름이 바뀐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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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산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 공주목 고적조 부분
 

정자산은 금강 쪽으로 돌출되어 나온 구릉의 정상부에 있다. 바로 무령왕릉이 잠든 곳이다. 이곳의 제사 유적은 1996년 2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산의 형태로 보아 제단이 만들어 질만한 곳이다.

회맹장소로 비정되는 취리산에서는 지금까지 제사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곳에서는 대규모의 제사 유적이 찾아져 회맹 장소를 이곳으로 내다보는 견해도 있다. 정자산 유적 발굴 보고서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57m 내외이며, 남쪽을 제외한 3면은 경사도 60° 이상의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나 정상부(해발 57 · 58m 내외)는 약 800평의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다. 바로 이 곳에서 연화문 와당을 사용한 중심건물이 발견됐다. 돌출부는 생토면이며, 흙을 북돋운 것이 아니라 주변을 ‘L’모양으로 삭토해 만들었다. 이 유적 주변에는 공산성과 옥녀봉산성 등 방어시설이 있고, 송산리분묘군과 교촌리고분군(校村里古墳群)이 있다. 이 유적은 능선 정상부를 평탄하게 조정하고 내부에 건물을 세웠으며, 호(壕)와 목책(木柵)을 시설하여 외부와 격리시켰다. 중심부에는 기와를 사용한 지상식 건물 1동(棟)이 배치되고, 그 주변에 단층의 부속건물 7동을 세웠다. 기와 건물지는 능선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사방을 ‘L’자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그 돌출된 공간상에 건축하였다. 와당(瓦當)은 대통사지(大通寺址) 출토품과 비교되는 소형의 8엽단판연화문와당(八葉單瓣蓮花文瓦當)을 사용하였으며, 기와는 소문(素文)의 평와(平瓦)가 대부분이다. 대벽건물지(大壁建物址)에서는 뚜껑접시의 접시(杯), 적갈색 연질의 등잔(燈盞), 적갈색 연질 독편(甕片) 등이 출토되었다. 배(杯)와 개(蓋), 고배편(高杯片), 삼족토기(三足土器), 발(鉢), 옹편(甕片), 유공호 구연부편(有孔壺口緣部片), 장경호구연부편(長頸壺口緣部片), 호저부편(壺底部片), 철기편, 수키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목책열(木柵列)이 확인된 것이다. 나즈막한 산이었기 때문에 유사시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유구로 판단된다.

유적에서는 장고형그릇받침(長鼓形器臺), 세발토기(三足土器), 뚜껑접시(蓋杯), 토제등잔(土製燈盞), 사격자문벽돌(斜格子文塼)이 출토 되었으며 이는 제사와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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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산 출토 그릇받침(공주박물관 제공)

 
대전 동부지역 질현성 설
일부 성지 전문가들 사이에 또 하나의 취리산으로 비정되는 곳이 대전 동쪽에 있는 질현성(迭峴城)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662년 당나라의 유인원과 유인궤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무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윤성(尹城), 대산책(大山冊), 사정책(沙井冊)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지라성’을 질현성에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취리산으로 보는 견해는 바로 질현과 취리의 음이 비슷하고 백제 복국군의 저항이 강성했던 곳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회덕에서 옥천으로 통하는 옛길에 있으며 고도 300여 의 고개로 속칭 ‘질티’라고 불린다. 성왕이 태자 여창(汝昌, 후에 위덕왕)을 위무하기 위해 왕도 부여에서 고리산(古利山, 옥천)으로 나가다 전사한 구천이 이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왕도 사비의 외곽 요새로서 백제가 매우 중시했던 고개였다. 이 질티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많은 보루(堡壘)가 축조되어 있으며 계족산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백제 멸망 후 3년간 웅진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로서 이 길이 막힘으로써 당군이 큰 타격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질현성은 백제의 전형적인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수법은 내탁(內托)이나 동벽의 일부에서는 협축(夾築)한 곳도 있다. 둘레는 800 정도이고 면적은 1만 1107㎡이다.

협축한 부분의 성벽 안쪽 높이는 1.5 이고, 바깥쪽은 3~4 에 이른다. 네모난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모서리의 가공한 면을 맞추어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쌓으면서 군데군데 돌로 쐐기를 박았다. 이 축성방법은 고구려 성에서 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문지는 동·서·남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문터의 폭은 3.8 정도이며 성으로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성안의 물이 흘러나 오는 수구(水口)는 남문터의 동쪽 200 되는 곳에서 확인됐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못을팠던 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별한 시설은 남아있지 않다. 동문터의 문폭은 3.5이며 추동으로 연결되는 통로다. 성을 중심으로 북쪽 계족산에 이르는 능선 위에는 6개의 보루(堡壘)가 확인된다. 이렇게 작은 보루가 밀집되어 있는 곳은 서울 광진구 아차성에서도 조사되었다. 아차성은 매년 발굴 작업을 실시하고 있으며 보루에서 많은 구려계 유물이 수습되었다.

질현성과 일대의 백제 보루군은 향후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보루성은 고구려계 양식으로 한강 주변과 충주 단양 등지에서 찾아지는 유적이다. 백제는 공주 부여기까지 고구려식 방어시설을 구축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와 대적하는 지역에 철옹성을 쌓았으면서도 백제는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부여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왕도로 통하는 비밀도로 같은 직선로를 철저하게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시에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한 신라 5만 대군을 질현성 같은 요새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고금 수도로 통하는 경계망을 튼튼히 하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는 첩경임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