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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의 진실

95년 전 그날, 죄 없는 조선인들이 처참히 죽어갔다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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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철저하게 날조된 유언비어. 이로 인해 학살당한 조선인이 6000명(독립신문 발표)에서 많게는 2만 3000명 이상(독일 문헌 등)으로 파악된다. 이는 문헌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 지방에 발생한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은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을 낳았다. 설상가상으로 지진이 대화재로까지 번지면서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일대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다. 수많은 건물들이 붕괴되고 전기와 수도는 물론 전신, 철도까지 파괴돼 그야 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제 불황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지진까지 발생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민심과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릴 교묘한 방책을 하나 고안해냈다. 일본인들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조선인들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지진 발생 다음날 출범한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은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조선인이 도쿄시 전멸을 기도하여 폭탄을 투척할 뿐 아니라 독약을 사용해 살해를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일본 신문들 역시 이 소문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보도하기 시작했다. 불황과 대지진으로 피폐해진 일본인들은 민간인 자경단까지 만들며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분노를 죄 없는 조선인들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일본 군경도 합세했다. 이들이 얼마나 잔악무도한 방법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지진과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도시는 시체 태우는 냄새와 방치된 시신들에게서 나는 악취로 뒤범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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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면 일본인 자경단이 손에 죽창이나 쇠꼬챙이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경단은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며, 다른 사진에서는 그 학살의 현장을 즐기는 모습도 담겨 있어 충격을 안긴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관련, 당시 일본어 가로쓰기는 ‘오른쪽에서 왼쪽’이기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표기된 사진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 두 가지 방식으로 표기된 사진 두 장을 공개한다. 이 사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표기된 사진이다.
 


자경단과 군경은 일본식 복장을 입고 다녀도 의심이 가면 어려운 일본어 발음을 시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가차 없이 살해했다.

“쥬고엔 고 센(15엔円 50전錢)”
일본어에서 ‘쥬(十)’는 탁음이라고 해서 독특하게 발음되는데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를 ‘주고엔’ 혹은 ‘추고엔’이라고 발음한다는 데서 찾아낸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탁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일본인들도 상당수 살해당했다고 한다.

“일본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조선인 83명을 한꺼번에 죽였어요. 심지어 임신한 부인까지도 죽였는데 배를 가르는 과정에서 갓난아이가 튀어나오자 아이까지 죽였어요.”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일본인들의 목격담도 이어졌지만, 일본 정부는 군대와 경찰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 자경단에 돌렸다. 그마저도 형식상 재판에 회부된 것에 불과해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관동대지진 때 잔인하게 학살당한 우리의 동포, 우리의 선인들이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억울함과 원한을 이제라도 풀어줘야 한다. 우리가 온전히 관심을 갖지 못하고, 정부마저 제대로 해결하려는 움직임 없이 어느덧 95주기가 됐다.

100주기가 되기 전 진상을 규명해야 할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일본인들도 피해를 당했지만, 지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이에 본지에 사진을 제공한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은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대학살은 분명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을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국제법)’로 규정돼야 한다”며 “우리 동포가 이유도 모르고 처참히 죽어야 했던 그 원한을 이제라도 풀어드려야 한다. 또한 일본이 조선인들을 향해 저지른 만행을 밝히고 제대로 된 사과를 받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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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번화했던 거리가 대진진과 화재로 궤멸되다시피 한 모습이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관련, 당시 일본어 가로쓰기는 ‘오른쪽에서 왼쪽’이기에 ‘왼쪽에서오른쪽’으로 표기된 사진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 두 가지 방식으로 표기된 사진 두 장을 공개한다. 이 사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표기된 사진이다.
 

과거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사진을 증거로 내놓았을 때 일부에서는 “조선인 학살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사진이다” “(사진에 표기된 글씨를 보며) 1920년대 일본에서는 가로쓰기의 경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정 관장이 공개한 사진에는 ‘다이쇼 12년 9월 1일’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혀 있다. 전쟁이 끝나고 사진에 쓴 게 아니겠느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한 교수는 “일본의 문화도 잘 모르면서 사진을 공개해 일본에 혐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 아니냐”는 식의 공격을 해오기도 했다. 정 관장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에서 홀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95주기를 기해 본지는 두 장의 사진을 공개, 당시 일본에서 가로쓰기의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이 혼용되기도 했음을 밝힌다.

이와 관련해 정 관장은 “일본 잡지사에서 낸 책에도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서 “당시 대지진과 화재로 인해 인쇄소의 활자판도 다 소실돼 전에 쓰던 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인된 관동계엄사령부 공문(행정문서)에서도 가로쓰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된 것을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공인된 곳에서도 가로쓰기가 혼용됐다면 민간에서도 습관적으로 가로쓰기가 혼용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도 잘 모르면서 왜 공개된 사진을 보며 변명하고 반박하기에 바쁘냐”면서 “자신들의 만행을 인정하고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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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또래의 방직공장 여직원들이 지진과 대화재를 피해 큰 상수도관으로 피신해 온 모습이다. 지진의 공포 속에서 갈 곳을 잃은 이들이 이곳을 집 삼아 지내는 모습이 안타깝다. 큰 상수도관 앞쪽에는 등이 있어 밤낮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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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관동대지진과 대화재로 인해 소실된 전차의 모습, 오른쪽 - 기상청의 옥탑시계가 지진 발생과 함께 11시 58분에 멈춰 있다.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이기도 한 정성길 관장은 관동대지진 당시 처참하게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한(恨)을 풀어주기 위해 위령제 및 위령탑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처음에는 지진을 겪었던 경주나 포항에 위령탑 건립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진으로 인한 공포가 남아 있는 곳에 혹여 제2의 트라우마를 안길 것을 우려해 최종적으로 호국의 도시 ‘영천’에 부지를 마련했다.

“영천은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곳에는 호국영령들도 많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을 참배하는 뜻으로 이곳 영천에 위령탑을 건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분들뿐 아니라 전쟁 중 전사한 분들의 영혼도 함께 위로해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정 관장이 영천을 선택한 이유다.

정 관장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 만행을 규명하기 위해 증거사진을 찾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을 투자해 약 3000장의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은 카메라를 가진 이들이 많지 않았다. 혹 있다고 하더라도 지진과 대화재로 아비규환이 된 상황에서 집안에 카메라를 가지러 가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천우신조인가. 그 아비규환 가운데서도 일본으로 여행 온 외국인 부부에 의해, 혹은 일본에 머물러 있던 미군들에 의해 일본 대진진의 참사 속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인 대학살’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에게 이 사진들은 ‘제노사이드’ 범죄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과 정부의 관심과 노력도 함께 수반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 관장은 “일본은 1952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66년 동안 전사자 유해 발굴 및 유해봉환을 통해 127만구의 유해를 수습했다”며 “우리는 전사자 및 강제징용 유해봉환 등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가. 외려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또 한 번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편 정성길 관장은 ‘조선인 대학살’을 규명할 수 있는 증거 사진들을 모아 ‘95년 전 한국 동포 대학살 화보 <관동대지진의 실체>’ 출판을 앞두고 있다. 9월이면 세상에 나올 이 책을 통해 조선인 학살의 실체를 밝히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