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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발이 된

교통수단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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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던 날, 미국 NBC방송은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강점했던 국가지만, 모든 한국인은 발전 과정에 있어 일본이 문화 및 기술, 경제적으로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라는 해설자의 망언을 내보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으로 곧바로 한국 네티즌과 조직위 등의 항의가 이어졌다. NBC는 공식 사과 방송을 내보냈지만 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가 가져온 결과였다. 아니 어쩌면 어설프게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생각 없이 내뱉었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얘기지만 국력의 힘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과 대한민국 양국 중 어느 나라가 자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물밑작업을 더 열심히, 잘 해오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문제는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역사에 대해 바로 알고, 그 가치관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한‧ 일 양국 간에 청산하고 바로잡아야 할 역사 문제에 대해서 확실히 매듭을 짓고, 전 세계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요,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과업이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 즉 근대화에 대한 시기가 각자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조금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선의 근대화는 우리 안에서 자주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의 꽃을 피운 것은 우리 안에서 그 필요에 따라 수용하고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해 근대화가 되었다는 발언은 아직도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요, 우리 스스로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생경한 것을 보았을 때의 반응은 때로는 무서울 수도, 때로는 경이로울 수도 있다. 이번에 소개될 사진을 보면, 처음 접한 문물(기차나 전차)을 보고 놀라 넘어지거나, 해괴망측한 물건이라며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이를 두고 미개하다고 하는 것은 외려 스스로가 ‘닫힌 사고’를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에 소개될 교통수단은 기차를 제외하고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허나 이들도 한때는 시민들의 발이었고, 또 당시의 문화를 보여주는 진귀한 교통수단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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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철도 개통식 (1905)
경부선 철도 개통을 축하하며 세운 아치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 기차 앞면에 단 일장기와 욱일승천기가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주고 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 주위로 나부끼는 일장기와 욱일승천기가 시대의 아픔을 더하는 것만 같다.

일본은 1880년대 중반부터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지형탐사를 시작, 1896년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1901년 8월 20일 서울 영등포에서 북부 기공식, 9월 11일 부산 초량에서 남부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간 지 3년 4개월 만인 1905년 1월 1일 조선의 두 번째 철도선인 경부선(580㎞)이 운행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개통된 경인선이다.

일본은 자신들에 의해 조선이 근대화됐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조선의 근대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경부선 철도 또한 러‧ 일 전쟁을 앞두고 군사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절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철도를 놓기 위해 주변 토지를 헐값에 팔아야 했고, 백성들은 강제부역에 동원 돼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신식문물의 상징이었겠지만 이 역시도 우미 민족의 뼈아픈 역사다.


사진 왼쪽 하단의 뭉개진 흰색 덩어리는 기차의 큰 기적 소리에 놀란 한 구경꾼이 굴러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며, 바로 옆에 보이는 검은 그림자도 사람이 몸을 트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기차 앞으로 놓인 철로는 임시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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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제물포 여객선 (1900)
증기와 황포돛을 이용해 한강에서 인천 제물포까지 왕래하던 증기범선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한협동우선회사 소속선 등 연안해운선뿐 아니라 강운과 해운을 겸하는 배들도 정기적으로 운행했다.

뱃머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인천 제물포에 위치한 세창양행(마이어양행) 설립자인 독일인 에드워드 마이어(Eduard Meyer)로 사진 속 증기범선은 마이어의 전속 범선으로 보인다.

세창양행 본점은 독일 함부르크 시에 있으며 인천 제물포 외에 중국의 상해, 천진과 일본의 고베 등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무역업, 광산업, 해운업 등으로 그 상세가 대단했고, 고종황제의 총애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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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 등장 (1903)
1900년대 초 당시 수입된 자동차의 모습이다. 택시나 작은 버스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이 자동차는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FORD)사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대중적으로 성공한 모델(모델 T형)로 알려졌다.

당시 패트롤식 자동차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보닛 앞에 손잡이처럼 보이는 ‘크랭크 핸들’을 돌려야 했다. 이때 꽤 큰 힘이 들어가며, 역화현상이 발생해 팔이 부러지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사진 속 승합차는 택시나 공공버스(9인승)로 사용됐으며, 경북에서 3대가 먼저 운영된 것이 버스 영업의 시초다. 한편 공식적으로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1911년 왕실과 총독부 앞으로 들어온 리무진 승용차 2대다. 하지만 사진이 말해주듯이 1911년 이전 이미 자동차가 수입돼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고종 재위 40주년을 맞아 포드사의 T형 자동차가 최초로 돌아왔다는 설(說)을 뒷받침해주는 사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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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 도선 경북 금호강 (1910)
큰 강이나 깊은 냇가 등에서 사람이나 짐을 건너편으로 이동시키는 교통수단의 하나인 나룻배다. 나루터는 규모에 따라 진(津) 또는 도(渡)라고 했으며, 이곳에 배치된 나룻배를 진선(津船) 또는 도선(渡船)이라고 불렀다.

사진은 자동차(미국 포드사 모델T)를 배에 싣고 건너는 모습으로, 사진 속 자동차는 대게의 패트롤식 자동차가 그렇듯 차 앞쪽에 있는 크랭크 핸들을 돌려 시동을 거는 방식이다.

당시 나룻배는 사람이나 짐, 자동차 등을 실어 나르기도 했지만 주로 소와 같은 가축들을 나루질 해 반대편 기슭에 건네주는 역할을 했다. 강을 끼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운송 수단이었으며 선임(船賃)은 추수 때가 되면 곡식으로 치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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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헌을 탄 장군 (1900)
초헌은 세종대왕 시기 만들어진 조선만의 독자적이고 나름 획기적인 교통수단으로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는 수레다. 명거(命車), 목마(木馬), 초거(軺車) 등으로도 불렸다. 무엇보다 채가 아주 길고 외바퀴가 밑으로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바퀴에는 쇠를 덧입혀 강도를 높였으며, 앉는 곳은 발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제작됐다.

초헌은 두 개의 긴 채를 사람이 각각 앞뒤에서 잡아끌고 밀게 되어 있으며, 보통 여섯에서 아홉 명정도가 한 조를 이룬다.

도로가 좋은 상태에서는 바퀴를 이용해 끌면서 이동했지만 도로가 좋지 않을 때는 어깨에 메어 이동했다. 어깨에 올려 멜 때는 앞뒤에 있는 고리에 나무를 끼워 넣었으며, 바퀴는 접을 수 있도록 제작됐다.

초헌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궁중용은 주칠을 했으며, 사대부의 것은 검은 칠을 했다. 또한 좌석이 높게 올라가 있어서 초헌을 타는 관리의 집에는 솟을 대문과 함께 문턱을 없애 초헌을 타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거나, 문지방에 ‘ㄷ’자로 홈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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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교 탄 병조 (1900)
사인교는 가마의 한 종류로 앞, 뒤에 각각 두 사람이 메고 가는 형태다. 주로 판서와 같은 고위 관리가 타거나 혼례 시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탔다. 신랑, 신부가 모두 가마를 타기도 했다. 이때 신부의 가마에는 채색을 하거나 술을 달기도 하고, 잡기를 쫓기 위해 가마 위에 호랑이 가죽을 얹기도 했다.

사진 속 사인교에는 표범 가죽(보통 호랑이 가죽)이 깔린 것으로 보아 정2품 이상의 무관으로 보인다. 4인의 교군 외에도 단도를 찬 네 명의 호위병과 몇 사람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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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타고 나들이 (1903)
민간에서는 2명이 들고 가는 가마와 4명이 메고 가는 4인교 가마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사치풍조가 만연해지면서는 6인교, 8인교, 12인교까지 등장하는 등 화려함이 극치를 달하기도 했다.

사진 속 가마를 들고 가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앞에 있는 가마꾼(교군꾼)과 뒤에 있는 가마꾼의 모습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뒤에 있는 가마꾼이 더 젊으며, 무엇보다 신발에서도 차이가 난다. 앞선 가마꾼은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면 뒤에 있는 가마꾼은 덧버선을 필히 신어야 했다. 가마에 시야가 가려져 앞은 물론 가마 아랫부분도 시야 확보가 안 돼 돌부리와 같은 장애물에 발을 다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발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가마 왼쪽에 태극선(부채)을 들고 있는 여인은 아마도 가마를 타고 있는 마님의 몸종인 듯 보인다. 좁은 가마 안에 있다 보면 아무래도 더운 기운이 많아 부채를 들고 다니며 틈틈이 더위를 식혀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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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발 한성 전차 (1904)
남대문의 전차. 전차는 1899년 동대문과 흥화문(옛 서울고교 자리) 사이에서 개통된 것이 처음이다. 전차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운행, 신민의 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개통 초기에는 교통수단으로서가 아닌 ‘진기한 구경’의 하나로서 더 주목받았던 전차다. 당시에는 이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으며, 하루 종일 전차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정류장이 없어 손을 들기만 하면 태워주던 1900년대 초의 모습이다.

전차는 ‘서대문~종로~동대문~홍릉(청량리)’를 운행했으며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했다.

사진을 보면 전차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 상주다. 백립을 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삿갓을 쓴 사람과 갓을 쓴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당시는 전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로, 목적 없이 전차에 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전차 지붕의 광고도 새롭다. 은단이나 캐러멜 등이 광고판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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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신혼길 나들이 (1900)
2인교 가마를 탄 새 신부의 모습이다. 뒤에 있는 가마꾼은 시야가 가려지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장애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덧버선을 신발 위에 덧신었다.

가마는 앞쪽보다 뒤쪽의 끌채(가마채)가 더 길며 채를 잡는 위치도 앞 사람보다 길게 뒤로 잡는다. 이는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하기 위해서다.

사진을 잘 들여다보면 가마 안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집가는 딸아이와 어머니가 동행하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볼 수 있다. 좁은 가마 안에 두 사람이 타야 하기 때문에 딸이 앞쪽으로 바짝 당겨 앉아 있다.

서민들도 사인교 가마를 탈 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결혼할 때다. 친정에서 시댁으로 갈 때 사인교를 탈 수 있었으며, 친정엄마가 동행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이동거리가 먼 경우 가마 안에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작은 휴대용 요강이 준비돼 있었다. 보통 사기나 놋으로 만든 요강을 사용했지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지승(종이)으로 만든 요강을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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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전차 대기소 (1903)
전차는 개통 초기 남자와 여자의 좌석(좌측 남자, 우측 여자)이 구분되어 있었고 중앙 칸막이에는 양반들만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특실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일각에서는 남녀 좌석의 구분은 당시 풍습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898년에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정부에 전차 설립 허가를 받고 공사를 시작해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르는 전차 철도를 개설하고 이듬해인 1899년 개통식을 가졌다. 이후 전차의 노선은 용산까지 연장됐으며, 1968년 전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개통 초기 계속되는 극심한 가뭄과 5~6세의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죽은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흥분한 시민들이 전차에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독립신문> 1899년 5월 27일자에는 그날의 사건이 기록돼 있다.

“전기거라 하는 것이 대한에 처음 생겨남에 아직도 개명 못된 인민의 안목에 어찌 구경스러운 물건이 아니라고야 하리요. 그러한 고로 전기거 내왕하는 데 구경들 하려고 남녀노소 상하 없이 다투어 타기도 하고 구경도 하는데, 혹 실족도 하고 혹 실수도 하여 경색이 매양 좋지 못하다더니, 어저께 어떤 아이가 또 죽었다는지라. 오전 9시쯤 되어 전기거가 동편에서 올라오는데 인민이 많이 모여 있다가 전기거가 전동 병문 앞 종로에 당도하거늘 인민이 달려들어 그 전기거를 짓부시며 불을 놓아다 태우면서 하는 말들이 ‘전기거에 사람이 많이 상하고 죽고 또 날이 오래 가물고 전폐로 가계가 생겨 물가가 고등하여 인민의 정형이 점점 못살 지역이니 어찌하면 좋을는지. 정부에서는 이런 민정을 좀 살피지 않은지 밤낮 한다는 사업이 무슨 일들인지 공변될 공(公)자는 간 곳 없고 사사로울 사(私)자만 성행하니 그 정부 믿지 않는 백성들은 어떻게 안보하리요’하고 답답한 말들을 한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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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공사 전속 가마꾼 (1904)
사진 속 인물이 선교사인지 외국공사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체격이 크다보니 그 무게에 끌채(가마채)가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는 발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겨울의 추운 날씨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진 속 인물은 무릎 담요를 덮고 있으며, 손에 여성용
핸드백이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어준 사람은 아마도 그의 아내인 듯하다. 당시 사진은 외국인이 아니면 찍기 어려웠다.

한편 뚜껑이 없고 의자 같이 생긴 가마를 ‘남여(籃輿)’라고 하는데 의자 모양의 몸체에 기다란 끌채(가마채)가 양 옆에 앞뒤로 길게 뻗은 것이 특징이다. ‘남여’는 본래 왕과 세자가 궁궐 밖이나 궁궐 안가까운 거리를 갈 때 이용하거나 나이가 든 재상이나 대신도 타고 다녔다. 사진 속 가마와 흡사 ‘남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재료나 그 용도에서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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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푸트공사 등청 (1886)
1833년 5월 12일 초대 미국전권 공사(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1826~1913)가 입국했다. 이는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른 것으로 조약의 체결은 1882년 5월 22일, 비준은 1883년 1월 9일 이루어졌다. 푸트공사의 통역은 윤치호가 맡았다.

푸트는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가 사절단 파견을 환영한다는 의향을 전했고 고종은 여기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1883년 7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 報聘은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일)를 파견했다.

사진은 4인교 가마를 탄 푸트공사가 등청하는 모습이다. 사람의 무게에 긴 끌채(가마채)가 휘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