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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신분을 상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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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자의든, 타의든 사람은 옷에 따라 그 말과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옷이 특정 집단이나 소속을 상징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든가, 제복을 입은 경찰이 그 집단에서 정한 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정해진 틀(옷)을 벗어던지는 순간, 이들은 그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범법 행위를 한 사람을 잡고 보니 경찰이었다든가, 판사나 검사 등 고위층 인사였다는 내용의 뉴스를 접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제복을 입었을 때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그 어이없는 ‘용기’를 불어넣은 요인 중 하나는 사복이 자신의 신분을 감춰줄 것이라고 착각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옷’은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고, 동시에 힘과 용기, 담대함을 주기도 한다. 소방관들이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도 제복이 주는 힘이다. 물론 남들이 갖지 못한 투철한 희생정신과 사명감이 바탕이 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옷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옛날 양반들은 비가 와도 절대 뛰는 법이 없었다는 말처럼 말이다. 양반이 여차저차 하여 평민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갑자기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고 하면 그 양반이 뛰겠는가, 안 뛰겠는가.

구한말 기녀들의 옷과 일반 아녀자들의 옷에도 차이가 있었다. 같은 한복을 입는다고 해도 치마의 색을 달리 하여 그 계층을 구분했다고 한다.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복장 규정이 매우 복잡하고 엄격해 때에 따라 입은 옷의 색과 모양이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은 여성들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핑크(분홍)색이 조선시대에는 당상관(정3품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때는 꼭 이 분홍색 옷을 입어야 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복식 간소화와 사치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넓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던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 대신 두루마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널리 상용화됐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여염집 아녀자들은 장옷을 머리에 둘러 얼굴을 반쯤은 가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옷의 경우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으나 후대에 오면서 양반의 부녀자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뀐 점이라면 장옷 대신 쓰개치마를 썼다는 점이다.

이렇듯 옷의 용도는 같으나 그 색과 모양에 차이를 두어 신분과 계층을 구분하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의복 간소화를 통해 사치를 막고 실용성에 중점을 두기도 했다.

그렇게 길고 긴 역사를 거쳐 지금 ‘옷’은 특정 직업군을 나타낼 때를 제외하고는 제약을 두지 않게 됐다. 누구나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옷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개화기, 그 시절 우리의 복식은 어떠했는지 사진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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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여인(트레머리) 1900년

구한말 조선의 서민 여인을 찍은 사진으로 카메라를 향한 시선이 자연스럽고 당차보이기까지 하다. 자세와 표정에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여인의 복장을 보면 저고리는 짧고 품도 작다. 질끈 동여맨 치마 위로 젖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 당시 구한말부터 개화기에 이르는 시기에 이런 복장(가슴이 드러나는)을 한 여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미니저고리는 1700년대에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조선 후기부터 1930년대까지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복장이 유행했다.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다거나 성적인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복장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여인의 머리를 보면 당시 유행하던 트레머리(얹은머리)를 볼 수 있다. 트레머리는 두발을 땋아 앞 정수리에 둥글게 고정시키는 머리모양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참고: 글마루 2014년 9월(창간 4주년 특집)호 ‘조선여인의 아들자랑 풍습’에 젖가슴을 드러내는 복장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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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봉틀과 삯바느질 여인 (1920년)

손재봉틀과 손으로 바느질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사진 속 여인들의 치마와 저고리의 색이 화려하다. 당시 여염집 여인들은 황색이나 다홍색 치마를 주로 입었으며, 저고리의 경우 초록이나 노란색, 분홍색, 옥색 등을 사용했다. 사진은 인쇄 과정 중에 채색을 입힌 것이다.

* 참고: 조선시대 기생 중에는 바느질을 하는 침선비(針線婢)와 여인의 진료를 담당하는 의녀(醫女)도 포함됐다. 이들을 각각 상방기생, 약방기생으로 불렀는데 이들은 장악원 기생들보다 격이 높은 상등 기생으로 대우받았다. 당시 기생은 여염집 여인들과 구별되게 옷을 입었는데 보통 여염집 여인들이 황색이나 다홍색을 입기에 이 색을 피하고 옥색치마나 남색치마를 입었다. 반면 저고리의 색상은 일반 여인들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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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喪國) 상복(고종황제 국장 당시) (1920)

나라를 잃은 슬픔에 갑작스레 고종황제를 떠나보내야 했던 궁중 여인의 상복(喪服) 모습이다. 상국 중에는 지밀상궁만 어여머리를 할 수 있었다. 어여머리란, 가르마를 탄 뒤 뒤통수 아래쪽에서 쪽을 지고가르마 위에 어염족두리를 쓴 후, 가체로 땋아 만든 커다란 다리(月子)를 어염족두리 위에서 양 귓가와 목덜미 위에 눌러 얹은 다음, 머리 위와 양 옆에 화려한 떨잠을 꽂고 머리 위에는 붉은 댕기로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사진 속 여인(상궁)은 상국이라 흰옷과 흰 장갑으로 몸을 감쌌다. 보통 때는 옥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었다. 여인이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첩지’로 부녀자들의 머리장식의 일부다. 첩지는 화관이나 족두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며, 장식의 형태와 재료에 따라 신분의 상하를 표시한다.

왕후는 용첩지, 왕비와 세자빈은 광금(鑛金) 황첩지, 정경부인은 광금 개구리첩지, 정부인은 후미만을 광금한 개구리첩지, 상궁은 흑색 개구리첩지를 달았다. 영조의 가체금지령 이후 상궁은 어여머리 대신쪽을 지고 개구리모양 첩지를 가르마 앞부분에 얹는 것으로 간소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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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관복 (1900 혹은 1904)

사진 왼쪽에서부터 무관, 사대부, 문관이 차례로 서 있는 모습이다. 포도대장은 종2품 무관직으로 형조의 직속기관인 포도청의 우두머리다. 사대부가 쓰고 있는 정자관은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 유행한 관모로 실내나 가정에서 갓을 대신해 썼다. 오른쪽의 문관이 쓴 관모는 ‘금관’으로 문무백관들이 국가적 경사나 제사를 지낼 때 조복과 함께 착용했다. 금칠이 되어 있어 금관이라고도 하며 양관(冠)이라고도 부른다. 금관 앞쪽 뒷부분(사진으로는 위로 솟은 부분)에 그려진 줄의 개수로 계급을 구분했다. 사진 속 금관은 줄이 다섯 개로 오량관(五梁冠)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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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복식(장옷) (1920)

장옷을 입은 여염집 아녀자가 장옷을 입고 있다.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 모습은 조선시대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나들이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던 옷으로 앞은 마주 여며지도록 고름을 달았고 속에서 이중 고름 하나를 잡아서 여몄다. 장옷은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으나 후대에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는데 서민층과는 달리 치마와 유사한 쓰개치마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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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 예복 (1900)

진사(進士)란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시(예비고시)에 합격한 자를 말했고, 조선시대 과거제도 중 소과 진사과에 급제한 사람을 말한다. 1438년(세종 20)부터는 진사에게 합격증서로 백패를 줬으며,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게 된다. 이뿐 아니라 대과에 응시할 자격도 주어지며, 하급관원으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사진 속 남성(진사)은 정수리 위로 각진 형태의 건(사대문라건)을 쓰고 있으며, 검은 명주로 된 단령은 홑겹으로 돼 있어 안에 입은 직령포가 비친다. 단령의 끝부분은 천이 겹쳐져 검은 띠를 굵게 덧댄 것처럼 보인다. 사대문라건의 양쪽에 있는 긴 끈은 양 볼을 지나 턱 아래에서 매듭을 지었으며, 단령은 넓은 고름으로 오른쪽 겨드랑이 부분에서 매듭을 지어 여몄다.

* 사대문라건: 조선시대 진사가 썼던 건의 일종. 건은 헝겊으로 된 머리에 쓰는 물건의 총칭.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관모 중 가장 오래됐다.
* 직령포: 깃이 곧은 데서 나온 것으로, 말 그래도 직령으로 된 포(袍)를 일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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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복식 (1900)

흥선대원군의 복식 간소화와 사치 금지 이후 실용화되고 평등화된 복식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이다. 갓과 탕건 등이 실용화 됐으며 도포에서 두루마기로의 변화 등이 눈에 띈다.

사진 맨 왼쪽은 대한제국 시기 순검(포졸에서 바뀜)의 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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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동(박에스더)와 박유산 부부 (1900)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 겸 의사로 알려진 박에스더와 남편 박유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정동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뒤 이름을 에스더로 바꿨으며, 18세에 결혼 후 서양 풍습을 따라 남편의 성인 ‘박’을 사용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쪽을 지었고, 남편 박유산은 흰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모습이다. 두 사람 다 앞쪽에 신을 놓고 사진을 찍은 모습이 특이하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서약하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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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관 복장 (1900)

사모관대에 흉배를 단 문관의 관복 차림이다. 조선 초기에는 정1품에서 정3품까지는 홍색, 종3품에서 종6품까지는 청색, 정7품에서 정9품까지는 녹색을 입었다. 1744년(영조 20)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녹색과 청색 계통은 사라지고 당시 당상관의 관복 색깔이 분홍색이 되고 당하관의 관복 색깔은 적색으로 통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복장 규정은 매우 복잡하고 엄격해서 때에 따라 입는 옷의 색과 모양이 천차만별이었지만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 당상관(정3품 이상)은 반드시 ‘핑크’색을 입어야 했다.

* 당상관: 조선시대 관리 중 문신은 정3품 통정대부, 무신은 정3품 절충장군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를 말한다. 조정에서 조의(朝議)를 행할 때 당상(堂上, 대청)에 있는 교의(交椅,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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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부부의 복장 (1910)

구한말 서민 부부의 모습이다. 을미년(1895년) 단발령이 선포되고 망건 사용이 폐지되면서 머리 모양의 변화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관모도 달라지게 됐다. 상투머리 대신 짧은 머리, 중머리, 하이칼라 머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의관을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탕건이나 정자관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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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정장 (1910)

당의와 대란치마를 차려 입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모습이다. 대란치마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비빈이 대례복으로 입는 치마다. 금박을 찍은 단을 따로 만들어서 두 층으로 붙이는데 길이는 바닥에 한 자 정도 끌리게 하고 폭은 보통치마보다 한 폭을 넓게 만든다. 당의는 조선시대 여성예복의 하나로 간이예복 또는 소례복으로 평복 위에 입었으며,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입기도 했다.

당시 공주와 옹주는 10세가 지나면 처녀로서의 옷차림인 치마와 저고리를 착용했으며, 평상시에도 궁중의 품위와 체통을 지키기 위해 당의를 입었다고 한다. 머리에 쓴 족두리는 부녀들이 의식 때 예복에 갖춰 쓰던 관(冠)의 일종으로 영, 정조 때 가체 금지령이 내려진 후 성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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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부부 나들이 (1900 혹은 1904)

두루마기와 장옷을 입은 서민 부부의 모습이다. 구한말 신혼부부의 모습으로 보이며, 여자는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1890년 10월 기독교 선교사로 들어와 1940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될 때까지 50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았던 미국인 의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 일가가 집필한 <닥터홀의 조선회상(1978년. 김동열 역, 좋은씨앗. 2007)>에서는 조선 말기 의생활풍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 남자들이 입는 코트는 길고 무늬가 없는 흰색의 린넨으로 만들었거나 어떤 것은 실크, 또는 올이 굵은 무명으로 만든다. 어떤 곳은 양 옆을 쨌고, 어떤 것은 뒤쪽을 째는 등 일정하지가 않다. (중략) 가슴 위를 졸라매는데 약간 옆쪽으로 코트와 똑같은 천으로 만든 대와 같은 끈으로 모양 좋게 매듭을 지어 맨다. 그들은 크고 느슨한, 묘하게 만든 바지를 입는데 발목은 끈으로 매어 조인다. 바지의 색깔도 역시 흰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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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 예복 (1900)

해어화(解語花).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기생을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흔히들 기녀, 기생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나 조선시대 기생들은 노래와 웃음은 팔지언정 지조는 팔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멋과 풍류를 아는 자신들에 대
한 자부심이 있었다. 이들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와 춤은 물론 거문고와 가야금 등 악기를 다루는 데도 능했다. 또한 고관대작이나 상류층 인사들을 대하는 만큼 시서화(詩書畵)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기생은 교양 정도에 따라 명기로 알려진 초일류 기생들이 있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는 기생을 일컫는 ‘의기’도 많았다. 기생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 10세 안팎의 어린 기생은 ‘동기’라 불렀다. 또한 기생의 종류도 그 직책과 품위에 따라 ‘관기’ ‘약방방기생’ ‘1패’ ‘2패’ ‘3패’ 등의 등급으로 나뉘기도 한다.

사진 속 기녀는 관기로서 화관을 쓰고 몽두리와 한삼을 입었다. 화관에는 5색 구슬 등 여러 가지 장식품을 부착했으며 수공화들로 장식해 화려하게 꾸몄다. 소매 끝에 달린 한삼은 춤을 출 때의 그 운치를 더했으며, 치마, 저고리 위에 입은 몽두리 위에는 수대를 사용해 뒤로 매듭을 묶어 여밈 처리를했다.

*몽두리(蒙頭里): 조선시대 궁중에서 정재(呈才)를 출 때 여기(女妓)나 무당이 입던 무의(無依)로 몽두의(蒙頭衣)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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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학위복장 (1914)

이화여전 최초의 졸업생(왼쪽부터 이화숙, 김애식. 신마숙)들이 졸업식 가운을 입은 모습이다. 여성들은 교육에서 제외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어렵게 공부하고 그 결실을 맺은 이들의 모습이 당차고 아름다워 보인다. 사진을 유심히 보면, 졸업식 가운 안에 치마저고리를 받쳐 입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 모습이 서구문물과 서양학문이 우리 안에 서서히 녹아들고 있던 개화기의 시대상과 맞물리면서 묘한 분위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