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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솟아나온 신화의 섬
산토리니(η Σαντορίνη)


글, 사진. 김현우 평론가・사진작가


그리스는 인구 1100만 명의 3천 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삼면이 바다인 아름다운 섬이 많은 나라다. 동쪽으로는 에게해, 남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로 둘러싸여 있다. 외관상 비슷한 듯 보이지만 막상 섬에 첫발을 내딛을 때마다 전혀 다른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반기는 이야기 많은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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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의 아기오스 스삐리도나스 교회(앞), 아나스타세오스 투 크리스투 교회(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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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리니는 해저 화산의 끊이지 않는 화산활동에 의해 깊은 바다에서 솟아나와 생겨난 섬이다. 초기 청동기시대부터 기원전 1900~1600년까지 선사시대 전반에 걸쳐 삶의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의 번성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크로티리(Ακρωτήρι) 지역은 선사시대의 항구와 주거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지 마을이다.

기원전 1600년경 청동기 후기 시대의 화산폭발은 섬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으면서 섬 전체를 30m 아래 화산재 속에 묻어버렸다. 모든 지역 주민들이 이 자연재해로부터 피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놀리또스(Μονόλιθος) 마을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된 고대 주거지는 적어도 기원전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 역사학자 이로도토스(ο Ηρόδοτος, 기원전 484~425년)에 따르면 원래 산토리니의 고대 이름은 스토롱길리(Στρογγύλη)였는데, 섬의 아름다운 자태 때문에 후에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칼리스티(Καλλίστη)’라고 불렀고, 후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 왕 띠라스(ο Θήρας)의 이름을 따서 ‘띠라(η Θήρα)’라고 불렀다. ‘띠라’라는 이름은 현재까지도 그리스 현지인들 사이에 산토리니섬을 말하는 지명으로 쓰이는 동시에 피라(τα Φηρά)마을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칼리스티’와 ‘띠라스’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황금 양털을 찾아 원정을 떠나는 아르고(η Αργώ) 호의 원정대가 그리스 섬 할키다(ηΚολχίδα)에서 돌아오면서 포세이돈의 아들, 에브리삘로스(Ευρύπυλος)가 통치하는 리비아(η Λιβύη)를 방문했다. 에브리삘로스는 아르고 호가 그 당시 배들 중 가장 안전하고 가장 빠른 배라고 칭송하며 그들을 환대했고, 아르고 호의 원정대가 그곳을 떠날 때 그는 선원들에게 선물로서 부(富)를 낳는 ‘흙 한 덩어리’를 주었다. 하지만 아르고 호가 아나피(η Ανάφη) 근처에 도착했을 때, 부주의로 인해 그만 선물로 받은 귀한 ‘흙 한 덩어리’를 바다에 떨어뜨리고 만다. 그때 그 흙이 떨어진 자리에 지금의 산토리니인 칼리스티(Καλλίστη) 섬이 바다 속에서 솟아나왔다.

이 섬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는 제우스신이 하루는 꽃을 따러 나온 피니키(η Φοινίκη)의 공주이자 ‘유럽’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에브로삐(η Ευρώπη)의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유달리 질투가 심한 그의 아내 헤라의 복수를 피할 길이 없었던 제우스는 그녀의 눈을 피해 황소로 변해 에브로삐를 등에 업고 크리티(η Κρήτη)섬으로 납치해 그녀와 정을 통한다. 그러는 동안 피니키의 왕 아기노라스(οΑγήνορας)는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아들 카드모스(ο Κάδμος)를 세계 각지로 원정을 보내는데, 에브로삐를 찾기 위해 여행했던 곳 중 하나가 이곳 칼리스티이고, 카드모스를 따라 온 그의 수하들은 8세대 동안 이곳에 머물며 후손을 번창시켰다. 후에 기원전 12세기경 띠라스(οΘήρας)가 이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이 섬을 다스렸다. 띠라스는 카드모스의 후손이자 아브테시오나스(ο Αυτεσίωνας) 왕의 아들이었고, 그의 누이 아르기아(η Αργεία)는 그리스 남서부 펠로포니소스(Πελοπόννησος) 반도를 다스리던 도리아 인들의 왕 아리스토디모스(ο Αριστόδημος)와 결혼해서 두 왕자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하기도 전에 아리스토디모스가 죽게 되자 띠라스가 미성년인 조카들의 후견인이 되었고, 어린 조카들은 성인이 되어 도리아인들을 이끌고 칼리스티섬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 일은 훗날 띠라스에게 감당 못할 짐이 되는데, 섬에 이미 거주하던 옛 카드모스의 수하들, 피니키인들 그리고 림노스(η Λήμνος)섬에서 추방되어 온 신화 속 황금 양털을 찾아 여행하던 ‘아르고 호(οιΑργοναυτές)원정대’의 후손들까지 여러 민족들의 분쟁의 장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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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띠니오스 신항구에서 피라마을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와 지그재그 형태의 계단
 


아크로티리
(το Ακρωτήρι)


아크로티리는 섬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피라(τα Φηρά)마을에서 15㎞ 떨어진 마을로 산토리니 명소들 중에서 선사시대의 에게해 연구에 중요한 기초가 되는 고고학 유적지로 유명하다.

기원전 4500년경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최초 집터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면적 200에이커(0.8㎞)에 달하는 기원전 3000년경 초기 청동기시대의 집터, 기원전 20~17세기 청동기 중기, 후기 시대의 확장된 도시로 보이는 유적지 등 에게해 중심 도시로서의 중요한 유적이 밀집된 곳이다. 다층 건물의 우수한 도시계획과 하수도 시설, 정교한 벽화들과 장식품들, 가정 용품들 그리고 주변 섬들에서 들여온 물건들이 대거 발굴됨으로써 그 당시 미노아문명을 대표하는 크리티섬과 그리스 본토, 시리아, 이집트, 도데카니사(τα Δωδεκάνησα)섬들, 키프로스 등과의 대외 관계와 교역, 항해술을 엿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곳의 도시 유적은 기원전 17세기 후기에 막을 내리는데 화산 분출 전 강한 지진의 긴장감 때문에 주민들이 섬을 떠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후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섬과 도시 전체는 화산재로 덮여 있어 최근까지 보존돼 오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아크로티리 주거지와 주변의 유적지들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발굴은 고고학자 ‘스피로스 마리나토스(Σπύρος Μαρινάτος)’ 교수에 의해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아크로티리 유적지는 ‘생태 보호 쉼터’가 완공됨으로써 2014년 4월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일부 유물들은 피라마을에 있는 ‘선사시대 띠라 박물관(το μουσείο Προϊστορικής Θήρας)’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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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마을의 빠나기아 투 벨로니아 대성당옆의 재미있는 조형물
 



산토리니의
전통가옥


그리스 건축학에서 섬 특유의 산토리니 가옥과 건물들은 에게해 건축의 일부에 속하는 것으로 산토리니를 대표하는 상징 같은 것이며, 또한 여행객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사진 속에 담아 가는 것 중 하나다. 이는 동화 속 이미지를 연상케 하고, 다른 섬들과는 달리 화산 섬 등성이를 내려가면서 땅과 건물, 골목, 벽과 담의 경계가 없이 서로 하나가 되어 공존하는 계단식 반지하 건축형태를 띠며, 섬 특유의 화산이 주는 자연 환경과 특이성을 해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반영한 건축의 자율성을 표현한 대표적인 것이다.

중세시대 섬의 건축 설계와 도시 계획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섬 주민들의 안전이었다. 그래서 건물을 지을 때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자연재해 예방 등을 건물들에 모두 고려해야 했고, 특히 해적들의 공격을 피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방어요소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곳 주민들은 생존에 필요한 주거를 화산 섬 절벽 꼭대기에 터를 잡고, 화산 동굴을 이용해 숙련되지 않은 솜씨로 스스로 생계의 터전을 만들어갔다. 그러다가 18세기 말, 섬의 통치자와 부유층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이 해결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주거’라는 건축 목적은 흐릿해지고, 건축학적 미와 도시 계획을 고려한 정교한 집과 건물들로 변모되기 시작하는데, 르네상스나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해외 건축양식을 도입하고 숙련된 장인들을 불러와 비싼 재료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 건축은 석공들과 건축가들의 예술적 의도를 반영한 건물들로 섬을 채워 가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대형 교회나 학교, 박물관, 공공건물들은 산토리니 특유의 건축양식을 구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산토리니 주택의 기본 유형은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이아(Οία), 피라(Φηρά)마을과 같은 ‘선형’ 스타일과 삐르고스(Πύργος), 엠뽀리오(Εμπορείο), 아크로티리(Ακρωτήρι)마을과 같은 ‘정교한 요새’ 스타일 그리고 보또나스(Βόθωνας), 피니키아(Φοινικιά), 카르테라도스(Καρτεράδος)마을 같은 화산 절벽을 깎아 만든 ‘석사형’이 있다.

이들 마을은 시 정부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협력, 관리하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익명의 공동 주택단지’와 ‘공식 공동 주택단지’ 그리고 개별 건물들의 공존은 산토리니 섬의 새로운 사회 현실에 대응하는 결과로서 섬 전체가 공동 관리하면서 산토리니 건축의 독특한 미적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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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마을의 눈부신 하얀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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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마을의 파란색 항아리의 예쁜 꽃들이 관광객을 반긴다.
 



피라 마을
(Τα Φηρά)


피라마을에는 2개의 주요 항구 ‘아띠니오스(Αθηνιός) 신 항구’와 ‘얄로스(Γιαλός) 구 항구’가 있다. 타지역에서 배를 타고 처음 도착하는 곳이 대부분 피라마을의 ‘아띠니오스 신 항구’인데, 신 항구는 차량으로 접근 가능한 항구로서 자가용이나 버스, 택시 등 피라마을 시내로 가는 차량을 이용할 수 있다. 항구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수직의 바위로 된 절벽이라는 지형조건 때문에 좁은 지그재그형태의 구불구불한 도로로 이어져 있다.

반면 ‘얄로스 구 항구’는 산토리니의 전통 옛 항구로 피라 언덕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차량 접근이 불가능한 항구라서 20분가량 걸어 내려가거나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한다. 특히 카라볼라데스(Καραβολάδες)라는 이름이 붙은 600개의 계단으로 된 ‘얄로스 길’은 여행객들에게 ‘당나귀 택시 길’로 잘 알려진 도로로 구 항구와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는 장소로 인도한다. 케이블카는 피라마을의 중심 광장에서 약 500m 떨어져 있는 곳에 있고, 해발 220m 높이에서 시간당 1200여 명의 승객을 운송하는데, 1인당 요금은 6유로이다.

화산섬들을 관광하려면 이곳 ‘얄로스 구 항구’로 내려와 유람선(페리보트)을 타야 한다. 그리고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옆 계단에는 항상 당나귀가 대기 중이다. 당나귀는 산토리니의 명물로 민간 대중교통 수단으로 구 항구로 내려가는 택시 역할을 하며, 마부는 손님들에게 6유로를 받고 있다. 일부 크루즈 배나 개인 요트는 섬의 남쪽에 위치한 ‘블리카다 마리나(Βλυχάδα Μαρίνα)’에서 출발 하는데, 피라마을에서 그곳까지 자가용이나 택시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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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마을의 아기오스 요아니스 떼오로소스 교회의 종탑
 


피라마을은 ‘아띠니오스 신 항구’에서 북쪽으로 10㎞ 거리의 해발 약 260m 화산 절벽 위에 지어진 하얀 마을로 행정을 담당하는 산토리니섬의 수도이다. 칼데라의 독특한 위치 덕분에 ‘네아 카메니(Νέα Καμένη)’섬과 ‘빨레아 카메니(Παλαιά Καμένη)’섬을 한눈에 바라벌 수 있는 멋진 경치가 유명하며,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관광 인파로 붐비는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한다. 레스토랑, 클럽 같은 유흥시설, 박물관, 보석상, 각종 상점들이 모인 곳이고 또한 시외로 나가는 중앙 시외버스터미널도 이 마을에 있다. 피라마을에서 산책은 카페테리아와 식당들이 모여 있는 ‘중앙 광장 떼오토코뿔루(η κεντρική πλατεία Θεοτοκοπούλου)’에서 출발하면 좋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호화스러운 보석 상점들이 가득한 거리가 나오고, 계속해서 골목 상점들을 걷다 보면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에 잠긴 칼데라의 아름다운 매력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피라마을에서 주목할 만한 교회는 1827년 설립된 모자이크가 인상적인 이빠빤티스(ναός της Υπαπαντής) 대성당이다. ‘빠나기아 투 벨로니아(Η Παναγιά του Βελώνια)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 교회는 교구 신부 ‘마르코스 벨로니아(ο Μάρκος Κ. Βελώνιας)’가 세운 것으로 띠라(Θήρα) 시에 기증하였다. 하지만 1956년 7월 9일의 대지진으로 성당 건물은 크게 파괴되어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데, 무너진 성당 자리에 1963년 1월 19일 성당의 초석을 다지고 재건축을 시작해 1968년 ‘띠라스 가브리일(Θήρας Γαβριήλ)’ 주교에 의해 현재의 대성당으로 완공되었다. 현재 이 성당은 지방자치시 소유로 교회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화산 축제’와 결혼식 등이 거행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빠빤티스 대성당에서 조금 아래에 위치한 ‘아기오스 요아니스 떼오로고스(ιερός ναός του Αγίου Ιωάννη Θεολόγου)’ 교회는 1537년에서 1650년 사이에 세워진 성전으로 성전 안뜰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압도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에 피라마을 엽서에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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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마을
(η Οία)


이아마을은 1976년 이래 그리스의 첫 번째 ‘보호 주택단지’이자 산토리니섬에서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히는 명소로 유명하다. 피라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으며 이아마을로 향하는 주요 도로는 ‘동굴 주택 단지’가 있는 칼데라 전망이 보이는 지역과 매혹적인 전원주택인 선원들의 집이 모인 지역을 반으로 나누듯이 가로지르고 있다.

마을 구석구석에 둥근 돔 형식의 지붕이 인상적이며 이 마을에만 60여 개가 넘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이아마을을 대표하는 엽서와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아나스타세오스 투 크리스투(ΙερόςΝαός Αναστάσεως τουΧριστού)’ 교회와 ‘아기오스 스삐리도나스(ΙερόςΝαός Αγίου Σπυρίδωνα)’ 교회는 너무도 유명해서 여행객들이 엽서를 손에 들고 찾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피라마을과 마찬가지로 이아 마을의 건축도 경사진 암벽을 파내서 세운 건물에 백색 석회를 입히고, 다양한 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것이다. 1956년 지진으로 인해 마을에 큰 피해가 일어났으나 1970년대 그리스 관광청(ΕΟΤ)의 ‘전통 가옥 개발과 활용(Ανάπτυξη και Αξιοποίηση Παραδοσιακών Οικισμών)’의 시범사업을 통해 이아마을에 처음으로 하수도 연결망의 초기설치가 시작되었고, 직조 및 해군 박물관, 교회와 공장 등도 복원되었다. 공중으로 드러난 외관상 눈에 거슬리는 전선과 전화케이블 선은 지하배선 연결망으로 땅속으로 들어가고, 바닷물 담수처리 공장과 하수처리장이 현대적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스 관광청의 이러한 숙원사업은 1979년 ‘유로파 노스트라(Europa Nostra)’와 1986년 ‘소피아 건축 비엔날레(Biennale of SofiaArchitecture)’에서 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고, 이를 본보기로 이어져 호텔, 레스토랑, 상가 등으로 변환하는 옛 건물들의 복원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곳의 미로 같은 좁은 골목과 계단은 오직 보행자 전용으로 교회나 상점, 카페, 레스토랑, 호텔 등으로 그물망처럼 이어져있고, 간혹 길을 잘못 들어서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 되돌아 나와야 하거나 길을 헤매는 경우도 있어 이 마을에서는 길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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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마을 좁은 골목길의 관광객들과 풍차
 


이아마을은 황혼의 일몰로도 유명한데, 마을 끝자락에는 베네치아식 성 ‘카스트로 아기우 니콜라우(ΚάστροΑγ. Νικολάου)’성터 일부가 남아있어 그곳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바라보는 석양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특히 연인들을 위한 최고의 명소가 되었고,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의 저녁노을이 너무도 유명해서 일반적으로 이아마을이 산토리니섬의 칼데라 위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착각하는데 사실은 칼데라 위에 있는 산토리니 마을들 중 가장 낮은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흥미로운 것은 산토리니 섬의 어느 지점에서나 아름다운 황혼의 일몰을 볼 수 있지만, 폐허가 된 성터 카스트로에서 이아마을의 상징인 풍차가 보이는 배경은 관광객들이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게 하는 미끼 같은 요소들인 셈이다.

‘카스트로 아기우 니콜라우(κάστρο Αγίου Νικολάου)’성은 성터에 있는 15~16세기로 추정되는 ‘아기오스 니콜라오스(εκκλησία του Αγίου Νικολάου)’ 교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480년부터 이곳에서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의 축을 구축하였으나 1579년에 에게해 영해와 함께 성이 오토만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면서 250년 동안 주민들은 노예 신세로 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해적의 습격은 계속되었고, 성은 더 이상 주민들을 보호할 수 없을 만큼 피폐해지고 그와 비례해서 섬 주민도 급속히 감소되어 갔다. 1650년에는 이아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콜룸보스 해저화산(υποθαλάσσιο ηφαιστείο του Κουλούμπου)’이 폭발했고, 화산활동은 2개월 동안 지속되어 지진과 천둥, 화산재 등을 동반하는 대혼란을 겪으면서 겨우 성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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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모양의 하얀 종탑이 돋보이는 이아마을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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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보기위해 전망 좋은 카스트로 아기우 니콜라우 성터에 가득한 인파
 



산토리니섬에서의 결혼식은 이제 유행처럼 행해지는 관광 상품이다. 특히 이아마을을 산책하다 보면 골목 모퉁이마다 웨딩촬영을 하는 신혼부부들이 눈에 띄는데, 5~9월까지가 결혼 성수기로 매일 4~5쌍의 결혼식이 열리고 일 년에 평균 900쌍 이상 이곳 산토리니에서 영원한 사랑의 서약을 맹세하고 있다.

이아마을에는 암무디(Αμμούδι)와 아르메니(Αρμένη)라는 2개의 항구가 있다. 아르메니 항구는 차량 접근이 어려워서 걸어 내려가거나 당나귀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반면에 암무디 항구는 300개의 계단으로 된 길을 걸어가거나 당나귀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고,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접근이 용이한 포장도로로 연결된 옛 항구이다. 띠라시아(Θηρασία)섬을 가려면 이곳 암무디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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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마을의 당나귀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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