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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아(η Εύβοια)

역사의 향기가 깊게 서린 섬


글, 사진. 김현우 평론가・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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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실리게피라 에쁘리뿌 새다리
 



그리스는 인구 1100만 명의 3천 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삼면이 바다인 아름다운 섬나라이다. 동쪽으로는 에게해, 남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로 둘러싸여 있다. 외관상 비슷한 듯 보이지만 막상 섬에 첫발을 내딛을 때마다 전혀 다른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반기는 이야기 많은 섬이다.





에비아
(η Εύβοι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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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키다 광장의 ‘1989년 국방부 기념비’
“미덕을 원하고 자유를 구하다” - 안드레아 스칼보스
 



할키다
(η Χαλκίδα)



에비아는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지중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큰 섬으로 그리스 본토 내륙과 에비아섬 사이에 ‘에브리뽀스 해협(Ο Πορθμός του Ευρίπου)’이 지나가는 내륙에 가까이 접한 섬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으로 이루어진 섬은 면적 3670㎢, 길이 약 180㎞, 폭 8~50㎞로 제주도 2배 정도의 크기다. 2011년 기준 인구 20여만 명이 이 섬에 살고 있다.

에비아의 북부지방은 프띠오티다(Φθιώτιδα)와 마그니시아(Μαγνησία)로 나뉘고 남부지방은 ‘에브보이 코스만(Ευβοϊκος Κόλπος)’을 기준으로 비오티아(Βοιωτία)와 아티키(Αττική)로 분리된다. 에비아의 남동쪽에는 안드로스(Άνδρος), 북쪽과 북동쪽의 해안선은 에게해와 맞닿아 있다.
아름다운 섬이면서도 ‘할키다 옛 다리(η παλαιά γέφυρα της Χαλκίδας, 42m)’로 그리스 반도와 연결돼 있어 사실상 섬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이며 육지 사람들이 배가 아닌 자동차로 손쉽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다.

에비아를 자주 찾는 이유는 손쉬운 접근성이라는 이유 외에도 아름다운 산과 강, 하천과 고운 모래가 빛나는 아름다운 해변들을 들 수 있다. 특히 에비아섬의 명물인 에브리뽀스 해협의 ‘트렐라네라(τρελά νερά, 미친물이라는 뜻)’와 그윽한 연기를 뿜어내며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애딥소스의 온천수(τα ιαματικάτης Αιδηψού)’를 빼놓을 수 없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며 타 지역에 비해 숲이 무성하고 비가 많이 오는 편이다.

역사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경에 전성기를 누렸으나 바닷길과 해상무역의 이권을 놓고 벌어진 할키다(Χαλκίδα)와 에레트리아(Ερέτρια)의 싸움인 ‘릴란티노스 전쟁(Ληλάντιος πόλεμος)’이 발발하면서 그 영광이 종결되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함대가 에레트리아를 파괴했고 그로부터 수십 년 후에 ‘펠로포네소스 전쟁(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πόλεμος)’에서 연합하여 함께 싸웠던 아테네에게 에비아섬이 점령되었다.

그리스 반도 내륙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인 할키다는 에비아섬 중부지방에 위치한 섬의 수도이다. 아테네에서 차로 2~3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아테네 수도권 지방에서 짧은 휴식을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예쁜 옛집들과 현대 도시의 편의시설이 공존하는 이곳은 특히 할키다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디르피스 산(όρος Δίρφυς)과 키미(Κύμη) 마을 근처에 있는 카스트로발랴(Καστροβαλιά) 숲의 영향으로 공기 좋고 풍경이 아름답다. 할키다 지역의 아름다움은 산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애게해(Αιγαίο)에서 바라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해변들, 즉 힐리아두(Χιλιαδού)해변, 아기이 아포스톨리(Αγίοι Αποστόλοι), 아흘라데리(Αχλαδερή)해변의 아름다움도 할키다의 매력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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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키다 광장의 레나 카라야니 흉상(1898. 7. 24~1944. 9.8)
전쟁 당시 Bouboulina 비밀요원의 리더로 활동하다가 특별보안에 걸려 해방 전에 독일군에 의해 사형됨
 



잎실리 게피라
에브리뿌 새 다리
(新橋, Υψηλή Γέφυρα Ευρίπου)



할키다의 에브리뽀(Εύριπο) 마을에 있는 두 개의 항구는 고대 그리스의 가장 활동적인 교역이 이루어진 곳 중 하나로 지리적·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어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식민지를 형성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또한 할키다의 남부 ‘타바실리카(τα Βασιλικά)’ 마을 가까이에는 ‘불화의 사과’라는 의미의 고대 도시 ‘밀로 티스 에리도스(μήλο της έριδος των αρχαίων πόλεων Χαλκίδας)’와 ‘에레트리아(Ερέτρια)’라는 비옥한 평야가 있다. 비옥하여 복 받은 평원임에도 그 이름이 ‘불화의 사과’인 것을 보면 과거 이 지역에 대한 찬탈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할키다의 에레트리아 마을이 고고학적 관심사가 많은 이들의 발길을 모으는 마을이라면 키미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과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들에 경탄을 자아내는 곳이다. 알리베리(Αλιβέρι) 마을에는 ‘열전 공장(θερμοηλεκτρικό εργοστάσιο)’이 있고 베네치아식 탑과 고대도시의 성벽이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할키다, 아니 에비아섬에 들어가고 나가기 위해선 ‘잎실리 게피라 에브리뿌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흔히 ‘할키다 신교(Νέα γέφυρα Χαλκίδας)’로 불리는데 이 새 다리를 기점으로 에비아섬을 남부와 북부로 구분한다.

그리스 내륙이나 아테네로 출퇴근하는 유동인구와 도시로 향하는 차량들의 병목현상으로 인한 교통 혼잡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에브리뽀스 해협 위를 건너는 이 다리는 할키다의 우회도로를 연결하는 부분과 ‘스키마타기우-할키다(Σχηματαρίου-Χαλκίδα)’ 고속도로로 통하는 바타리아(λόφο Μπαταριά) 언덕에 있는 시멘트 공장 근처 ‘비오티키 해안(βοιωτική ακτή)’을 잇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길이 694.5m, 폭 12.5m 그리고 다리 아래 여유 공간 높이 34.5m, 포장도로 두께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45㎝이다. 다리 건설 작업은 1985년에 시작해 1993년에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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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호수 같은 풍경의 할키다
 




할키다의 옛 다리
(舊橋, η παλαιά γέφυρα της Χαλκίδας)



2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할키다의 구교는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가깝게 맞닿은 부분인 에비아섬의 수도 할키다 시내에 있다. 설립연도는 알 수 없으나 할키다의 옛 다리가 언급된 서면기록을 찾아 올라가 보면 기원전 5세기경 ‘엘가 캐 이메래(Έργα και Ημέρα)’라는 문서에 이시오도스(Ησιόδος)가 언급한 글 중 ‘배로 비오티아(ΒοιωτΙα)에서 에비아를 통과했다’는 보고로 보아 이때에는 다리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할키다 구교 근처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넋 놓고 눈여겨 봤을 ‘에브리뽀스 해협’의 거친 물살에 놀랄 것이다. ‘미친물’이라는 뜻의 ‘트렐라네라’라고 불리는 이 해협의 해류현상을 보면 한 달 중 22~23일간은 규칙적인 방향으로 6시간마다 조류의 변화가 일어나고, 나머지 6~7일간은 24시간 동안 14번의 불규칙한 조류변화가 일어나므로 소용돌이 현상이 여기저기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상 배로 이 해협을 건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다리 건설이 부득이했다. 이 구교의 기원이 된 다리의 존재가 처음 언급된 것은 기원전 5세기 말이다. 즉 기원전 410년에 아테네 동맹에서 할키다 주민들이 아테네 사람들의 출전을 두려워하여 해상 봉쇄를 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예방하고 마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양쪽 제방에 2개의 나무탑을 구축하고 나무다리를 놓았었다. 그러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지날 무렵인 기원전 334년, 같은 축조물에 새로운 관문과 탑을 축조하였고 로마시대에 다시 한 번 해협 폭이 60m에 달하는 다리와 탑을 건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96년 4월 17일에 이탈리아식 수동 회전다리가 완공되었으나 오작동으로 인해 해협을 지나는 배들뿐만 아니라 다리 위를 건너는 인파와 운송수단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러다가 1963년 수동이 아닌 전기 개폐다리로 변신하는데 회전식이 아닌 서랍처럼 방둑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의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다리 위의 교통뿐만 아니라 다리 아래를 지나는 배들의 교통이 수월하게 되었다.

1963년 건설 당시 이 개폐식 구교는 길이 42m, 폭 11m의 2차선도로와 인도로 설계되었다. 골격은 철과 나무 갑판으로 되어 있었으나 1996년 나무갑판에 아스팔트를 깔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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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로뽀타모스 계곡에서 에게해를 바라보면 한국의 남녘 다도해의 섬들이 연상된다.
 


알미로뽀타모스
(ο Αλμυροπόταμος)


바위 계곡의 경사면이 아름다운 산세를 이루는 지형에 500여 명 이상의 거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 알미로뽀타모스가 있다. 빠나기아(Παναγιά) 해안 주택가와 작은섬 카발리아니(Καβαλλιανή)도 이 지역에 속하는데 알미로뽀타모스란 이름은 미호스(Μυχος) 북동쪽에 위치한 동명(同名)의 작고 희한한 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소금기 있는 강’이란 뜻이다. 지형의 암반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침식되는 과정에서 지하터널이 형성됨으로써 사실상 지하로 흐르는 강을 형성하게 됐다. 낮은 해수면 근처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지만 지중해의 바닷물이 섬의 이 지점에서 암반의 지하층 터널을 통해 에비아의 샘물인 단물과 섞이므로 표면에 올라가면서 짠맛이 감도는 것이다.

빠나기아 주택가 근처에는 빨료호리(Παλιοχώρι)라 부르는 고대 마을이 있는데 해적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나 그 흔적이 남아있는 성벽이 오늘날까지 보존돼 있다. 마을 안에는 절반이 파괴된 베네치아식 타워가 있고, 만의 북서쪽에 있는 ‘아기오스 디미트리스(ΑγίοςΔημητρίς)’ 교회가 세워진 우뚝 솟은 암벽에서는 고대시인 호머(Όμηρος)의 비문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알미로뽀타모스 계곡에 형성된 고생물학 연구지대이다. 소위 ‘빠니다 투 삐켈미우(πανίδατουΠικερμίου)’라 불리는 곳이며 포유류 동물화석들의 발견과 연구가 이루어진다. 발견된 화석으로는 주로 각 발에 3개의 발가락을 가진 키 1.3m가 넘지 않는 작은 체구의 말들이다. 화석 전문가들에 따르면 ‘빠니다 투 삐켈미우’ 고생물학 연구지대는 시간상 1억 3천만 년 전의 고생대 지대로 아시아에서 기원이 된 대초원의 환경에 속한다고 한다. 이 지대의 동물화석이 사모스(Σάμος) 섬과 중국의 것과 유사하고 같은 종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에비아섬뿐만 아니라 에게해의 섬들이 그리스 본토와 하나로 연결된 광대한 대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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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요한의 유골, 매일 수 많은 성지순례자들이 이 성자의 유골을 보러 교회를 방문한다.
 

성 요한 로수 교회
(ο Ναός του Αγίου Ιωάννου Ρώσο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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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키다에서 48㎞ 떨어진 곳에 ‘네오 쁘로코삐(Νέο Προκόπι)’ 마을이 있다. 소나무 숲속을 뚫고 아름다운 가로수길에 이끌려 가다 보면 ‘러시아인 성자 요한’의 유품과 유골이 모셔진 교회 ‘오 나오스 투 아기우 요안누 로수 교회’에 다다른다.

매일 수많은 성지순례자들이 이 성자의 유품과 썩지 않은 신성한 유골을 보기 위해 방문한다. 할키다 대성당이 이 교회의 직속운영을 담당하고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러시아인 성자 요한은 대략 1690년에 소러시아(현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해 1730년 5월 27일에 사망한 그리스정교회의 성인이다. 1710년에 발발한 러시아-터키 전쟁에 참가하여 전쟁포로가 되었고 후에 터키군 장군의 노예가 되었다가 장군을 따라 쁘로코삐에 오게 되었다. 그는 최소한의 것으로 연명했으며, 동물들과 함께 헛간에서 자고 먹고 맨발에 누더기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든 간에 매 순간 신에게 드리는 기도와 감사를 생활화했었다. 그런 생활 가운데 그에게 기적의 힘이 생겨났고 40세가 되던 해인 1730년에 사망에 이른다. 많은 전쟁과 오스만제국의 기독교 탄압의 시기를 거치면서 성자의 썩지 않는 유골은 크리스천들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었고 터키인들에겐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32년 결국 마흐무드 2세 술탄의 명령으로 성자의 유골을 태우려고 불속에 던져 넣었으나 타지 않고 그대로 있는 시체를 보고 놀란 터키군은 깜짝 놀라 도망을 갔다. 현재 교회 안에 안치된 유골의 검은색은 이때 불에 그을린 흔적이라고 한다. 그의 사망 후 287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썩지 않은 채로 이 교회에 안치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동시에 방문객이나 병든 환자들에게 많은 기적이 나타나면서 정교회 신자들의 유명한 성지순례지가 되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터키군의 후퇴 후 1834년에 쁘로코삐에 왕실교회가 세워지면서 그곳에 성인의 유골을 안치해 오다가 할키다의 대주교 흐리소스토모스 베르기스(Χρυσόστομος Βεργής)에 의해 1977년 교회가 재건되어 1989년부터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 교회는 160석의 예배실과 강의실 박물관 등이 있고 성직자의 후원 아래 컨퍼런스홀에서 정교회 회의나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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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로뽀타모스 계곡의 풍력발전기들이 능선을 따라 기렉 늘어서 있다.
 


쁘로코삐
(το Προκόπι)

쁘로코삐는 할키다에서 48㎞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키레아 강(πόταμος Κηρέας)’을 가로지르는 비옥한 계곡이 있는 에비아섬 중앙 북쪽의 가장 큰 시골마을이다.

역사적으로 17세기 이후에 생긴 마을로 정착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1927년 터키의 주둔 아래 ‘아흐멧 아가(Αχμέτ Αγά)’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스가 해방되면서 터키군은 물러갔으나 아름다운 경관과 마그네슘 원석으로 인해 외부 침략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 정부는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쁘로코삐의 25만 평을 외국에 팔았다. 19세기 초 외국 지주들은 주민들의 권리와 생활의 질에 좀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그리스 정부는 외국 지주들로부터 일부 토지를 몰수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24년 소아시아에서 난민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러시아인 성자 요한의 유골을 함께 모셔오면서 쁘로코삐는 매우 커져 갔다. 오늘날 쁘로코삐는 아테네에서 당일 여행에 적합한 장소로 주목받고 있을 뿐 아니라 북부 에비아에서 돌아오는 여행객들이 할키다를 거쳐 ‘러시아인 성자 요한(Ιωάννης του Ρώσσου)’의 유품과 유골이 모셔진 교회 ‘오 나오스 투 아기우 요안누 로수 교회(ο Ναός του Αγίου Ιωάννου Ρώσου)’를 방문하기 위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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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토스항구에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선원기념비. 안전 향해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난다.
 

카리스토스
(η Κάρυστ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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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토스항구 광장의 세계대전 참전용사 기념비
 

 

할키다에서 남동쪽으로 124㎞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삐레아Πειραιά)’ 항구에서는 61해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굽 모양의 카리스토스만(灣) 10m 고도에 형성된 도시이다. 카리스토스만의 서쪽 끝을 ‘팍시마다(Παξιμάδα)’라고 부르고, 동쪽 끝을 ‘카보만델로(Κάβο Μαντέλο)’라 한다. 그곳에 등대가 세워진 작은섬 ‘만틸리Μαντήλι)’도 어부들에겐 중요한 랜드마크이다.

카리스토스 마을 뒤로 밤나무가 울창한 오히(Όχη)산맥이 바람막이가 되어 그 아래 남향으로 늘어선 주택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다. 특히 ‘오또나스왕(βασιλιάς Όθωνας)’의 주문으로 ‘바바로스 미르바크(Βαυαρος Μίρμπαχ)’가 설계한 이곳 마을의 도시계획은 유명하다. 신고전주의 건물들과 카리스토스 귀족 저택들은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전통가옥과 카페테리아 음식점들에서는 이 지역 전통음식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도시의 서쪽으로는 약 20㎞ 길이의 예쁜 해변이 있다. 해안 동쪽은 암벽으로 형성된 반면 북쪽과 서쪽 해변은 고운 모래사장이 깔려 있어 동쪽에서는 다이빙을, 북서쪽에서는 일광욕이나 수영을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주요 낚시터 중의 한 곳으로 ‘카보도로(Κάβο Ντόρο)’ 해류 덕분에 여느 지역보다도 이곳의 생선과 해산물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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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토스 지역의 높은 꼭대기에 있는 꼬끼노카스트로의 웅장한 모습
 


붉은 성
꼬끼노 카스트로
(το Κόκκινο Κάστρο)



에비아섬 카리스토스 지역을 지나다 보면 황량한 높은 언덕 꼭대기에 바다를 내려다보며 외로운 세월을 버텨 온 3세기 초에 세워진 중세시대의 성을 볼 수 있다. 붉은 성(Κόκκινο Κάστρο) 혹은 카스텔로 로쏘(Castello Rosso)라 불리는 이 성은 335m 고도 위의 오히산맥에 세워진 것으로 성벽의 재료로 쓰인 붉은 돌에서 이름을 따왔다. 계곡이 흐르고 숲이 무성한 시골 마을 ‘밀리(οι Μύλοι)’ 산책로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 밀리 산책로에서 45분 거리에는 BC 1세기에서 AD 2세기까지 초록빛 대리석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던 로마시대 채석장이 있다.

꼬끼노 카스트로에 가기 위해선 언덕 아래 차를 주차해 놓고 도보로 경사진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는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자란 소나무들의 모습이 바람의 세기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북서방향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성의 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에비아 건너편 섬들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는데 광활하고 아득한 전경과 바람이 환상적이다.

성안에는 두 평 남짓의 아주 자그마한 ‘선지자 엘리야(Προφήτης Ηλίας) 교회’가 있는데 아직도 누군가 홀로 찾아와 올리브유에 촛불을 켜놓은 흔적을볼 수 있다.





오히산
(Όχη)



오히산은 에비아섬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으로 최대고도가 1398m이다. 1960년 등산로에 산장이 운영되면서 자연애호가들과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은 에비아섬에서 역사상 첫 번째 인류문명이 발견된 곳으로 2500년 이상 자연재해와 지질학적 격변으로부터 버텨온 산꼭대기에 있는 신비스런 고대 석조구조물인 ‘드라코스피타(Δρακόσπιτα)’가 유명하다. 오히산의 자연환경은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히 신비스럽고 거친 아름다움이 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과 태양의 신 아폴론 그리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리는 산인데 ‘오히’라는 단어는 ‘성교와 교배’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오키아(οχεία, 교배·성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헤라 여신과 제우스 신의 만남을 암시한다. 헤라는 오히산을 포함한 카리스토스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신들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에비아섬의 요정 마크리(Μακρή)의 손에서 키워졌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제우스는 그녀에게 매료되었고 도도하고 새침한 헤라의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제우스는 감기에 걸려 벌벌 떠는 뻐꾸기로 변신해 그녀 앞에 나타나서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헤라는 처량한 뻐꾸기를 따뜻하게 해주려고 품에 안았다. 그때 제우스는 그녀의 품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려 했으나 도도한 헤라는 결혼 약속을 한 후에만 자신의 순결을 주겠다고 하여 제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선사시대에는 에비아섬 전체가 헤라 여신을 숭배하였으나 오늘날은 선지자 엘리야를 경배하는 곳으로 여전히 신성한 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 외에도 고대 역사서에 자주 언급되는 이 산은 역사학자 이로도토스(Ηρόδοτος, 기원전 480~420년경)에 의해 많은 기록에 등장했다. 고대 시인 호머(Όμηρος, 기원전 8세기경) 또한 할키다가 참여한 트로이전쟁에서 그리고 에레트리아(Ερέτρια)가 참여한 페르시아전쟁에서 오히산맥이 지나는 스티리스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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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코스피타( Δρακόσπιτα)

 

‘공룡의 집들’
드라코스피타
(Τα Δρακόσπιτα τηςΕύβοιας)



‘드라코스피타’는 ‘공룡의 집들’이란 뜻이다. 초기 헬레니즘시대인 기원전 6~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에비아섬 남쪽 오히 산꼭대기에 세워진 석조건축물들이다. 드라코스피타는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회색돌로 얇고 긴 직사각형의 석판들이 부착제 없이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형태로서 석판 사이의 빈틈은 작은 돌들로 메워져 있다. 12.7m x 7.7m 면적에 문설주와 상인방 일체식 구조로, 지붕이 따로 없는 듯한 장방형의 천정구멍을 남긴 채 블록을 쌓아서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게 만들어졌다.

고고학자 ‘니콜라오스 무초뿔로스(Νικόλαος Μουτσόπουλος)’는 드라코스피타 근처 지하에서 동물들의 뼈와 도자기 조각들과 제물로 바친 잔해들을 발견했고, 현재까지도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발굴 유물들과 고대 증거들을 바탕으로 볼 때 이 건축물들은 제우스와 헤라 여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집으로 여기는 종교적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산 외에 에비아섬의 스티리스(Οι Στυρείς) 지역과 님보리오(Νιμποριό) 지역에서도 드라코스피타가 발견되고 있으며 대체로 잘 보존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