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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가 들려주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다랭이마을, 금산으로 떠난 봄맞이


글, 사진 김일녀




햇빛이 쏟아진다. 바다를 마주한 산비탈 골골마다 조용히 스며들어 봄을 채운다. 그 온기 가만히 전해진다. 이른 봄날 볕바른 툇마루에 앉아 있는 듯, 겨우내 얼었던 몸과 마음이 녹는다. 그 빛 찬란하여 바다와 하늘의 만남에는 경계조차 없다. 천성이 밝고 따뜻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섬, 남해. 잔잔한 여유로움은 시간도 잠시 머물게 한다. 그러니 이곳에서만큼은 서두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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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다랭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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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는 남쪽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남해를 대표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 거제, 진도, 강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이곳으로 조금 일찍 봄을 맞으러 나섰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가량 달려 경남 사천을 지나 삼천포대교를 건넜다. 드디어 남해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명성답게 어디에 눈을 두어도 기대 이상이다. 한려수도로 둘러싸인 만큼 보는 곳마다 그림이다. 잔잔한 쪽빛 바다는 한낮의 기운을 받아 온통 찬란하고, 그 위에 68개나 되는 크고 작은 섬들이 아스라이 떠 있다. 범선의 움직임은 한가롭기만 하다. 바다는 섬을 품었고, 그 섬들은 양지바른 곳을 향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인생들을 품었다. 평화로움을 떠올리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 봄을 맞으러 갔는데, 오히려 봄이 일행을 맞아주었다. 봄이 벌써 왔다기보다 겨울이 발조차 들이밀지 못한 모습이다. 가로수의 초록 잎사귀는 여전히 풍성하고 비탈마다 일궈놓은 밭에는 시금치, 마늘이 푸릇푸릇함을 키워가고 있었다.

   

다랭이마을이 가르쳐준 삶을 대하는 자세
우선 가천 다랭이마을에 들렀다. 작은 밭떼기를 의미하는 ‘다랭이’는 이 마을의 뿌리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 위 경사진 산비탈에 자리한 마을. 이 척박한 곳에 집을 짓고, 밭을 일궈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랭이 덕분이다. 큰 돌을 기단 삼고 그 위에 크고 작은 돌을 쌓은 뒤 땅을 다졌다. 산비탈이라 폭은 좁고 길쭉한 계단식이다. 대부분 나지막하지만 지형에 따라 높이가 어른 키를 훌쩍 넘는 것도 많다. 이곳에선 땅이 곧 생명이니 한 평이라도 더 넓혀야 했다. 한 뼘 자리에도 작물을 심고 한 그루의 나무를 키웠다. 삿갓으로 가릴만큼 작은 크기의 삿갓다랭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억척스러운 삶이었다. 오로지 두 손으로 주어진 운명에 맞섰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을 대하는 자세를 가르쳐주는 다랭이마을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바다를 마주하면서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구석구석 바다를 닮은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마을 아래쪽에서 시작된 밭둑은 바다로부터 파도의 물결을 전달받아 마을 위쪽까지 파동을 치며 이어진다. 또 청록의 바다빛에 물든 땅에는 마늘, 시금치, 봄동, 유채 등의 초록이 물결을 친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하면 벼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이미 거름과 비료포대들이 쌓여 있는 밭도 있다. 때를 한 발 앞선 농부의 부지런함이다. 하지만 묵혀진 땅도 적지 않다. 농부의 발길이 끊긴 곳마다 덤불이 제 땅인 양 우거진 것이다. 하나 둘 마을을 떠난 이들의 자리를 누군가 채우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바라보는 마음조차 어수선해졌다.

다랭이마을 뿐만 아니다. 남해군의 70% 정도가 산악지대이기에 대부분의 마을이 이런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돌무더기 위에 지어진 집과 밭을 터 삼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척박한 땅인 데다 또 멀기는 얼마나 먼 곳인지. 지금이야 서울에서 차로 반나절이면 올 수 있지만, 옛날에는 대표적 유배지 중 하나일 만큼 쉽게 올 수 없는 곳이었다. 40여 년 전 남해대교(1973년)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뚝 떨어진 거대한 섬에 불과했다.

남해는 호국충절의 고장으로도 불리는데, 남해대교가 가로지르는 노량해협은 충(忠)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선조 31, 1598)이 치러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제독과 연합하여 왜군을 크게 무찌른 뒤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채 순국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충(忠)으로 임한 충무공이다.

노량해협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버려진 충(忠)’으로 한이 맺힌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많은 유배객들이 귀양지로 배를 타고 이곳을 건넜다. 충(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쉽게 버려지지도 않았다.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어떻게든 표현되고 전달됐다. 그렇게 유배지에서 인류사의 많은 고전들이 탄생했다. 중국의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가 좌천되어 유배 아닌 유배형을 살다가 <적벽부>를 지었다. 도스토 예프스키의 <죄와 벌>,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실락원>,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로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도 유배문학에 속한다.

남해에서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나왔다. 머나 먼 타지에서 억울하고 한 많은, 홀로 죽음을 앞둔 유배객들의 손에서 고전이 꽃을 피웠다. 대표적 인물이 서포 김만중(1637~1692)이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 3대 고전문학가로 꼽히는 김만중은 숙종 15년(1689) 남해로 유배되었다. 당쟁 속에서도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충신답게 그곳에서도 장희빈에 빠져 있는 숙종을 회심시키기 위해 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인현왕후를 복위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김만중은 지극한 효자이기도 했다. 모든 부귀영화가 한날의 꿈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쓴 작품이다. 이는 <홍길동전> <춘향전>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3대 고전 소설로 꼽힌다. 유배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불효자에게 문학은 효의 통로가 돼 주었다. <사친시>는 어머니의 생신날 쓴 한시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히 전해진다. 김만중 이외에도 남해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화전별곡>을 비롯해 70여편의 한시를 남긴 자암 김구, <광암집> <남천록>에 400여 편의 한시를 일기 형태로 쓴 겸재 박성원, 남해의 풍속을 담은 <남해견문록>을 기록한 후송 류의양 등도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다양한 작품을 남긴 인물들이다. 화전별곡의 화전은 남해의 별칭이다. 바다와 섬이 빚어낸 천혜의 절경을 위로 삼아 고독함과 절망을 글로 승화시킨 것이니 훗날의 격찬은 누구에게 공을 돌려야 할까.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남해읍에 있는 유배문학관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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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망대에서 바라본 남해
 



금산이 온통 남해로 빠져 든다
남해 금산(錦山, 681m). 지리산맥이 뻗어 내려오다가 남해의 절경에 빠져 이곳에 눌러 앉은 모양이다. 원래 이름은 금산이 아니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어 보광산으로 불리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은혜를 갚기 위해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자를 써서 금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름처럼 된다’는 말은 금산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절경이 38경이나 된다. 금강산을 빼닮아 소금강, 남해 금강으로도 불린다.

두모마을 쪽에서 시작된 산행. 초록 잎사귀 쟁쟁한 나무들의 행렬에 겨울 흔적을 찾기 어렵다. 30여 분을 오르니 거북 모양의 큰 바위가 나타났다.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의미의 글씨가 새겨진 양아리 석각이다. 서불과차, 말 그대로 ‘서불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꿈꾼 것이다. 이에 시종 서불에게 멀리 동쪽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 서불(서복)은 이곳까지 왔으나 결국 불로초는 구하지 못하고 사냥만을 즐기다 떠나면서 자신의 발자취를 남겼다. 바로 이 거북바위에 말이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문제다. 그런데 땅에서 구하고자 했으니 서불이 찾지 못했을 수밖에. 부소암까지 가는 길은 하늘이 열리기 전이라 산행의 묘미는 크게 없지만, 주변에 널린 기암괴석 덕분에 지루할 틈도 없었다. 금산의 비단 품에 안겨 있어서인지 크든 작든 부드럽게 깎이고 다듬어져 바라보는 눈빛도 다정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1시간 정도 올랐을까. 부소암을 코앞에 두고 시야가 트였다. 발 아래쪽으로는 나지막한 능선들이 비단 물결치듯 흐르고, 눈앞으로는 수평선과 맞닿은 섬들이 연이어지며 겹겹이 비단 물결을 풀어냈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눈이시렸다. 시선을 돌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어디서 왔는지 산등성이를 따라 크고 작은 기암괴석들도 옹기종기 무리지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금산 38경을 찾는지 두리번두리번, 종알종알 저들끼리 분주하다. 제법 덩치 크고 웅장한 몇몇 암석은 절경을 찾았는지 바다를 향해, 또는 보리암을 향해 우뚝 멈춰 섰다. 함께 즐기는 맛을 아는 모양, 구경 자리가 될 만하다 싶으면 어디든 작은 암석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버릇없이 머리에 앉은 암석은 물론, 소나무와 까마귀들도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구경 중이다.

부소암에서 잠시 상사암으로 빠졌다가 다시 정상을 향해 가는 길. 시시각각 천태만상의 조화를 부리는 통에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마치 카메라 줌렌즈를 서서히 당기며보는 듯하다. 향로봉,제석봉, 일월봉, 대장봉, 좌선대, 사선대, 만장대 등 보리암 주변으로 이름난 기암괴석들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 갈 수록 앞태, 옆태는 물론 뒷태까지 보여주니 눈이 쉴 새가 없다.

끝까지 당겨진 렌즈 안에는 오밀조밀 모여 저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이름 없는 암석들도 저마다의 매력으로 발길을 붙잡는다. 그 매력이 곧 이름이 된다. 아무래도 금산 38경은 수 많은 비경을 다 셀 수 없어 비유한 말인 듯하다. 그중 1경만 소개한다면 바로 망대(봉수대)에서 남해를 바라본 모습이다. 1경답게 38경을 볼 수 있다한다.

금산에 빠져 올라오는 사이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정상 부근에서 일몰을 눈에 담고 보리암에 들렀다가 복곡탐방지원센터로 하산했다. 다음날 새벽,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아쉽지만 보리암에서의 일출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남해작(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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