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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따라 걷는다

변함과 변함없는 그 사이를


글. 사진. 김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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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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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무판이 덧대진 계단을 오르내린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짧은 계단이다. 차로와 인접한 쪽으로는 좁은 너비의 길거나 짧은 수십 개의 나무 조각을 조각보처럼 잇댄 벽이 서 있다. 조형물인 듯 아닌 듯 주변과 잘 어우러진다. 안규철 작가의 ‘보이지 않는 문’이라는 작품이다. ‘돈의문 터’의 흔적을 담았다. 서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직진으로 올라오면 볼 수 있다. 돈의문(敦義門)은 한양도성의 4대문 가운데 서쪽 문으로 흔히 서대문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사직단 부근에 있었는데 태종 때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폐쇄되고, 돈의문 남쪽에 서전문이 세워졌다. 이후 세종이 도성을 고치면서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새로 문을 세웠는데 이 문이 돈의문이다.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새로 세운 문이라 하여 ‘새문’ 또는 ‘신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1915년 일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강제로 헐리고 이 터만 남았다. 한양도성 대문 중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문이기에 보이지 않는 문이라 했을까. 눈엔 보이진 않지만 계단을 오고가는 이들의 발걸음에선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03.jpg돈의문 박물관 마을 조성사업 현장
 
   

돈의문 터 계단 끝에 올라서니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도로 입구부터 골목 안쪽까지 청록색의 높은 가벽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돈의문 박물관마을 조성 사업’ 현장이다. 사업의 핵심 키워드는 ‘새문안동네’ ‘옛길’ ‘도시재생’. 그답게 가벽에는 중절모를 쓰고 한껏 멋을 낸 중년의 신사와 도도한 걸음의 아가씨, 검정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고 재잘거리는 단발의 소녀들 등 100여 년 전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공사가 마무리 된 후 가벽을 벗고 나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공사 현장 바로 맞은편이 강북삼성병원이다. 병원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경교장(京橋莊)이 나온다. 서대문 부근에 있던 경교라는 다리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환국해 1949년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가 서거한 후 이곳은 외국 대사관저, 미군 시설,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몇 년전 원형대로 복원해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된 건물에는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침실이며 귀빈식당, 응접실 등이 잘 보존돼 있다. 내·외부 모두 소박하고 단아하다. 둘러보는 발걸음도 마음도 반듯해진다.

2층의 집무실 한쪽 창문에는 그가 저격 받았을 때 흔적으로 보이는 2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지하공간에는 김구가 서거 당시 입고 있던 저고리가 전시돼 있는데, 혈흔이 그대로 묻어 있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통일자주독립 노선을 지향하며 이승만의 단독 정부수립 노선에 대립하다가 끝내 암살당한 김구. 그때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남북 분단이 이리 오래 이어질지 말이다. 그 옆에는 서거 당시 책상 위에 있던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도 표구돼 있다. ‘愼其獨(신기독)’. 홀로 있을 때도 삼간다는 의미다. 김구 선생의 풍채만큼 큼지막한 글씨체는 전체적으로 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둥글어 보인다. 김구 선생의 둥그스름한 얼굴과 동그란 안경 그리고 옅은 미소도 함께 떠오른다. 한 자 한 자 ‘愼其獨’을 써내려가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다짐했던 그 순간, 그는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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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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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창문의 총탄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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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고 있던 저고리
 


그가 생전 좌우명으로 삼고 즐겼다는 서산대사의 한시 앞에서는 한참이나 걸음을 멈추고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새로운 한 해를 맞아 나 또한 하얀 도화지처럼 펼쳐진 새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지금 걷고 있는 나의 발자국은 어떤 모습인가. 또 앞으로는 어떤 발자국을 남길 것인가.

경교장을 나와 홍파동 ‘홍난파 가옥’으로 향했다. 길 오른쪽으로는 경희궁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새로 들어선 주택지구에 더해 아파트 단지 공사까지 한창이다. 개발과 보존의 경계가 이어지는 퍽 마뜩잖은 길이다. 시멘트 먼지와 볼썽사나운 개발의 흔적들은 홍난파 가옥 바로 앞 도로까지 밀고 들어와 있었다. 때문에 골목길만의 오밀조밀한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는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아쉬운 마음에 가옥 곳곳을 더 뜯어보고 들여다봤다. 집 전체가 붉은 벽돌과 붉은 지붕으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실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어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이 집만 남고 다 헐렸다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홍난파는 이 집에서 6년간 말년을 보내며 그의 대표작 중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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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홍난파 가옥에서 행촌동 딜쿠샤로 가는 길은 그나마 골목길의 정취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붉은 벽돌담장과 나무 대문이 이어진 골목 저 안쪽으로 머리에 까치집을 인 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권율 장군의 집터에 심겨진 은행나무다. 수령은 420년,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나무가 인연이 되어 바로 옆쪽에 자리 잡은 딜쿠샤(Dilkusha). 딜쿠샤는 힌디어로 ‘이상향, 기쁨’이라는 뜻인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지은 건물의 별칭이다. 그의 아내 메리 테일러가 1920년대 초 서울성곽을 산책하다가 이 은행나무를 보고 이곳에 집을 지어 살자고 남편을 졸랐다고 한다. 딜쿠샤도 메리 테일러가 지었다. 생소한 이름만큼 외관도 전형적인 서양식 가옥이다. 규모 또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제법 크다. 가옥 전체를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벽돌의 긴 면과 짧은 면을 번갈아 쌓아올린 모습이 특이하다. 프랑스식이라고 한다. 아치형 창문도 여럿이다.

건물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바닥과 가까운 부분에서 ‘DILKUSHA 1923’이라고 쓰인 것을 발견했다. 그 옛날 앨버트 테일러 부부를 만난 듯 반가웠다. 100여 년 전 앨버트에게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비록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 살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그는 무엇을 기쁨으로 삼고 싶었을까. 혹시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이 글을 새기지 않았을까. 실제 앨버트는 3·1운동 독립선언서,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외국에 처음 보도한 주인공이다. 1919년 당시 금광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던 그는 AP통신사의 한국 특파원을 겸임하며 항일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러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20년간 아내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미국에서 작고(73세) 했지만 그의 유해는 우리나라에 묻히도록 해달라는 생전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안타깝게도 세월의 흐름과 오랜 방치 때문인지 건물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낡아질 대로 낡아진 모습이었다. 지붕은 이미 검은 천막의 보호 아래 있었고, 장판과 나무 등으로 덧댄 흔적도 많았다. 곳곳에 철기둥을 받쳐놓은 것은 물론, 건물의 안전이 위험하다는 안내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전선줄과 가스배관들, 담벼락 한구석을 차지한 온갖 잡동사니가 제 모습을 헤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겐 여전히 유일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는 딜쿠샤. 하지만 이젠 역사적 의미를 되찾기 위한 ‘경계(警戒)’가 필요해 보인다. 하루 빨리 문화유산으로 복원돼 본래 모습을 되찾길 바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딜쿠샤에서 다시 월암근린공원 쪽으로 나와 인왕산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양도성을 만날 수 있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에 이르는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1396~1910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500년 넘는 세월 동안 수차례 고쳐 쌓거나 무너진 곳을 새로 쌓았는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래쪽의 울퉁불퉁 자연석 그대로의 돌부터 위로 갈수록 자로 잰 듯 반듯한 돌까지 축성 시기별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산 교과서나 다름없다. 걷다 보니 눈길은 바빠지고 걸음은 느려진다. 수백 년이 잇닿아진 성벽의 경계, 그 속에 녹아 있는 역사의 흐름은 이렇게 걸어야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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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