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고대 문화 유적의 보고

생거진천生居鎭川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국내 최대 구석기터·백제 제철 및 토기 가마 유적지


01.jpg
 진천농다리
 



고대사 유적의 보고

충북 진천은 고대사 유적의 보고다.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옛말은 ‘살아서는 진천이고 죽어서는 용인에 간다’는 뜻이다. 진천을 흐르는 미호천과 백곡천 유역은 이미 10만 년 전부터 인간이 터를 잡고 살기에 가장 적합한 땅이다. 천변 유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붉은 홍적토층은 어디를 파도 선사시대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커 주목받고 있다.

진천에서는 구석기 유적 외에 청동기 유적과 초기 철기시대 제철지가 다량 조사되었다. 제철지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왜 삼국이 그토록 치열하게 전쟁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진천에서는 초기 백제의 토기요지도 발견됐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 토기들이 백제 왕도로 지목되고 있는 한강 몽촌토성 유적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토기들이 마차에 실려 한성으로 진공(珍貢, 진귀한공물)된 것인가.

진천은 고구려가 남하한 6세기 초반에 그들의 땅이 되었다. 고구려군은 지리적으로 요충인 진천을 점거하고 만뢰산(금물노)에 진지를 구축했다. 고구려는 진천을 ‘금물노’ ‘신지’ 혹은 ‘수지’라고 불렀다. 신지란 새로운 영역(新知, 혹은 新支) 즉 새 성(新城)으로 해석되며 수지는 머리성(首支)이라는 뜻이다. 진천읍에 있는 ‘대모산성’은 평지 토성으로 이 시기 ‘수지’라는 명칭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는 이곳과 음성 망이성, 국원(충주)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또 한편으로는 천안 흑성산의 백제군과 대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런데 신흥 신라는 소백산 죽령을 넘어 고구려 땅국원을 점령하고는 제일 먼저 진천을 공략했다.

진흥왕대 한주(漢州)를 장악한 시기에 진천은 완전 신라의 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이곳에 가야 세력의 이주를 단행하고 백제 공략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이 시기 한강의 가야 세력을 대표하는 김서현(무력의 아들) 장군은 이곳 태수를 맡아 장차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되는 명장 김유신을 낳았다. 상계리 태령산은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은 곳으로, 그 아래 생가터는 가야 군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로서 진천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02.jpg
 



중부지역 최대 구석기 유적
진천 구석기 유적은 이미 오래전에 조사되었다. 30년 전 필자는 진천IC 부근 언덕에서 구석기 유물 몇 점을 채집한 적이 있다. 이후 지난 2004년 고속도로 확장공사 당시 송두리에서 큰 유적이 발견됐으며 약 2159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습했다.

송두리 유적은 진천IC 확장·포장 공사 구간의 구석기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석기들은 대부분 유적지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맥암이나 규암질로 구성됐으며, 주먹도끼와 사냥돌 등이 다량으로 수집됐다. 인근에는 중기에서 후기 구석기 유적이 출토된 장관리 유적지가 있고 오창 여천리 유적, 진천 상신리, 신정리, 가산리 일대에서도 유물이 수습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매우 광범위하게 구석기 유적이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송두리 유적을 그동안 조사해 온 이융조(전 충북대 교수) 박사는 “송두리 유적은 대단히 방대한 구석기 유적지다. 도로 개설로 인한 절개면을 살펴봤을 때 유적층이 10만 년, 5만 년, 3만 년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미호천을 배경으로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와 글마루 답사팀은 진천IC 부근 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점의 석기들을 수습했다. 이 일대에 대한 보다 확대된 조사와 국가적인 보호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고구려 유적 만뢰산성
만뢰산은 해발 611.7m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만리산, 만노산, 아흘산으로도 불린다.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청도 진천현(鎭川縣) 조에는 ‘만노군은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으로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하며 경덕왕 때에 흑양군(黑壤郡)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만노군(萬弩郡)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김유신 조에 처음 나타난다. ‘진평왕 때 김서현(金舒玄)을 만노군 태수로 파견하였는데 여기서 김유신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노군은 신라가 ‘금물로’로 불렸던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바꿔 부르던 지명이었던 것이다.

산성에 대한 기록은 여지승람에 ‘고을 서쪽 2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03.jpg
 



04.jpg
보탑사
 



병자호란 당시 이 성에서 유창국(柳昌國)이 조감(趙瑊)과 함께 적과 맞서 수천 명의 피란민을 구했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만뢰산이 ‘보련산(寶連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는 기사가 있다. <여지도서>에는 ‘협탄령에서 뻗어 나와, 떨어진 줄기가 성산(城山)이 된다’는 내용이 있다.

연곡리 백비와 보탑사의 위용
만뢰산 자락에 자리 잡은 연곡리 보탑사는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백비(白碑, 보물 제404호)로 유명하다. ‘백비’란 아무런 각자가 없는 비석이란 뜻이다. 왜 이 절터에 백비가 유존된 것일까. 고승의 행적을 기록하려다 그만둔 것일까. 아니면 <반야심경>의 가르침대로 ‘세상사 모든 것이 공(空)’임을상징한 것일까. 궁금증이 더해가는 유물이다.

이 절에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바로 경주 황룡사 9층탑을 본뜬 목조 대탑이다. 지광·묘순·능현 비구니의 발원으로 고건축 전문가인 신영훈 씨를 비롯한 여러 부문의 장인들이 참가해 1992년께 완성했다. 사찰에는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갖추고 있다.

3층 목탑의 높이는 42.71m,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무려 52.7m로 14층 아파트와 맞먹는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로 강원도산 소나무를 사용했으며 단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1층은 대웅전, 2층은 법보전, 3층은 미륵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사방불이 배치되어 있으며, 법보전에는 윤장대(輪藏臺: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를 두고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했다. 특히 한글법 화경을 총 9톤의 돌판에 새겨놓았다. 미륵전에는 화려한 금동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2층과 3층 외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장수왕릉(장수총)을 재현해 만든 지장전이 있으며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이 있다. 부처가 500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해 만든 영산전, 와불 열반적 정상을 모신 적조전, 법종각·법고전·불유각·삼소실 등의 건축물이 조성되어 있다.

최고의 석교‘농다리’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진천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가 백제를 공벌할 당시 초평과 진천을 잇는 교통로로서 이때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농다리는 주변에 산재한 사력암질의 자석을 옮겨 28칸의 교각으로 쌓아 만들었다. 천수 백 년 온갖 홍수와 비바람에도 버티고 있는 농다리는 진천의 자랑이다.


05.jpg
 



농다리 주변에는 현재 ‘미르숲’이 조성되고 있다. 미르숲이란 용의 순 우리말인 ‘미르’와 숲의 합성어다. 진천군이 자연환경국민신탁과 함께 2012년부터 숲 조성 사업을 시작했으며 현대모비스가 총 100억 원을 지원했다.

농다리부터 미르숲의 산책로가 시작된다. 2~2.5㎞ 길이의 다양한 트레킹코스가 마련돼 있는데 초평호를 따라 걷는 수변로, 탁트인 풍광을 누릴수 있는 농암정, 고라니 서식지 등 코스별로 풍성한 볼거리가 있다.

백제 최대 철 생산지 삼용리 토기요지
덕산면 석장리(石帳里)에 있는 제철 유적은 백제시대의 유적 중 제일 크다. 국립청주박물관이 실시한 진천군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찾아진 유적으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차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 지역에서는 모두 36기의 철 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과 관련된 노적(爐蹟)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낮은 구릉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정된 공간에 다양한 노적이 밀집해 있었다. 이 제철 유적은 3세기부터 5세기초까지 이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철 생산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이월면 삼용리와 덕산면 산수리 일대는 삼국시대 토기 가마터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가마터들은 1987년에 중부고속도로 건설공사 때 한남대학교 발굴단이 발견,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벌인 바 있다. 이 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초기의 토기 제작기술을 규명할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수습되었다. 이 유적들은 한반도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한 타날문 토기를 굽던 가마터로 삼국시대 토기의 모델이 되었다.




06.jpg
보탑사 3층 목탑
 



삼국통일의 원훈 김유신 생가터
진천읍 상계리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 위쪽에는 이곳에 살던 신라인들이 마셨다는 연보정(蓮寶井)이 있다. 30년 전, 설화와 여러유적을 조사해 김해김씨 중앙 종친회장이었던고 김준철 청주대 총장과 박상진 충청일보 사장, 진천에 사는 한학자 김병천 선생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성역화 되었다.

김 장군의 태(胎)를 묻었다는 태령산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은 신라군이 주둔했음직한 곳이다. 태령산과 상계리 협곡을 이룬 이곳은 수원이 풍부하고 일단 유사시 만뢰산으로 올라가 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천혜의 요충이 된다.

출생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치마대(馳馬臺)가 있다. 치(馳)는 ‘달릴 치’로, 말을 달리며 놀던 터(臺)를 뜻한다. 김유신이 승마 훈련을 하던 곳을 말해주는 것인가.

신라 만노군 치소 도당산성
신라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했을 당시 치소는 어디였을까. 처음 상계리에 진을 쳤던 신라 세력은 후에 치소를 지금의 도당산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성은 둘레 823.5m이며 평지와 연결되어 고대 치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여지승람에는 ‘성은 둘레가 1836척이며 우물이 2개 있었으나 폐정되었다’고 나온다. 현재 성내에는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吉祥祠)가 있다.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판축형태로 고대 성곽 축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성안 여러 곳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 신라 토기가 수습되고 있어 오랫동안 치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성 안에는 문지(門址) 및 수구문지(水口門址)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1975년 길상사를 중건할 때 입구의 왼쪽에서 높이 2.4m, 너비 1.9m의 석루지(石壘址)가 발견되었으나 조경공사로 다시 묻혀버렸다고 한다.

송강 정철의 묘소와 송강사
송강의 제자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벼슬보다는 시주(詩酒)로 낙을 삼은 시인이다. 스승의 묘소를 지나면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빈 산에 낙엽지고 비 쓸쓸히 내리는데
송강 재상 풍류는 이곳에서 적막하네
섭섭타, 술 한 잔 올리지도 못하나니
그 옛날 장진주사 오늘을 말한 듯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묘소와 위패를 봉안한 송강사가 진천에 있다. 왜 그의 묘소가 문백면 봉죽리에 있는 것일까. 묘소는 원래 고양시 원당면에 있었는데 현종 6년(1665)에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금의 위치에 묏자리를 정하고 후손 정양(鄭瀁)이 이장하고 사당도 이때 건립하였다고 한다.

송강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 이외에도 100여 수 이상의 시조를 지은 문호로 유명하거니와 대쪽 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이조좌랑직에 있을 때다. 그가 덕망 있는 사림들의 기용에 앞장서자 김개 등이 어전에서 송강을 비난했다.

“오늘날 사류의 폐습은 거의 기묘(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기묘사화) 연간과 같습
니다.”


불같은 성품의 정철은 즉석에서 김개의 발언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선조는 언성을 높이면서 정철을 힐책하였는데 정철은 굽히지 않고 다시 말했다.

“아무리 뇌정(雷霆)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
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강은 김개 등을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과 심정 등에 비교하며 비난하였다. 이 일로 결국 정철은 삭탈관직 되었다. 불의와는 한 치의 타협도 없던 송강은 수차례 간관의 비난을 받는다. 송강을 귀양 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칠 때마다 선조는 이렇게 하교했다.

“정철은 그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나 다만
그 말이 곧아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
로부터 미움을 샀노라. 그러나 그가 힘을 다
해 직무에 충실했던 점과 맑고 충직한 절의
때문에 초목조차 그 이름을 다 기억한다. 정
말 이른바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
라 할 만하다. 이런 사람을 죄주면 주운(朱雲:
중국 한나라 때 충신) 같은 충신을 목 베어야
한다는 말과 같으리라.”


묘소는 정송강사(鄭松江祠: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9호)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한다.

보재 이상설 애국의지 숭렬사
애국지사 보재 이상설 선생은 진천읍 산척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다.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출계하여 그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제촌이라는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독학으로 도달한 인물이었다. 보재는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고 시도했다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자 러시아로 건너갔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보재는 연해주를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만들고 싶었다. 보재는 이곳에 온 우국지사들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보재와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 권업회의 핵심 인물들은 1914년 연해주를 비롯하여 북간도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을 규합하여 국외에서 최초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보재는 망명정부의 대통령격인 정도령(正都領)이 되어 부도령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운영하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일부학자들은 이 대한광복군 정부를 초대 임시정 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재는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보재는 임종을 지키는 애국지사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 보재의 유품이 하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이 1972년 진천읍에 교성리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로 확장, 이건하였다. 당시 이건할 때 초가집인 생가도 함께 복원되었다. 진천읍 산척리 일대에 조성될 이상설 선생 기념관은 생가와 사당(숭렬사) 등 기존 시설을 포함해 전체 1917㎡ 규모로 2018년 10월 완공을 목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