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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자연이 주는
위로가 있었다


글. 김일녀 사진. 김일녀, 정선군청·순천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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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저물어가고 눈앞에 가을이 깊어질수록
마음만 안달이 난다. 길을 나서야 할 때다.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헛헛함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만큼 행장은 간단해야겠다.
발길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
복잡다단한 일상을 멈추고,
하루쯤은 스스로에게만 시간을 내주자.
기차로 떠나는 늦가을 여행.
그곳엔 자연만이 주는 위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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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민둥산

 


하늘 아래 민둥산 억새는 그리움에 물결치고


지난 9월 말 어느 한 날, 아침 9시쯤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민둥산역으로 향했다. 제천을 지나 강원도가 가까워질수록 기차의 속도는 느려졌다. 영월역에 들어서자 청령포, 어라연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한 번 와 보고 싶었던 영월이기에 기차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반가웠다. 차창 밖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영월역 주변을 눈도장 찍었다. 강원도 땅을 밟은 기차의 느릿함은 갈수록 더했다. 대신 아찔한 재미가 있었다. 지역 특성 탓인지 산중턱 높이에서 달리는 구간이 상당했다. 괜스레 덜컹거림도 더 심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 느릿함으로 높고 깊은 산등성이 아래 골골마다 들어선 작은 마을들의 모습이 더 다정스럽게 다가왔다. 누런 벼와 마른 콩 잎사귀, 검붉은 수수밭 그리고 산중턱에 자리 잡은 너른 배추밭에는 이미 가을이 짙게 깔려 있었다.

3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민둥산역. 열차 칸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내렸다. 역사를 나와 식당과 주점 등이 늘어선 큰 길로 들어섰다. 한 전봇대 위쪽에 궁서체로 쓴 듯한 ‘민둥산가는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한식당에 들러 곤드레밥 한 그릇을 간장에 비벼 된장찌개와 함께 후딱 비웠다. 민둥산으로 향하는 큰 길을 따라 쭉 걸어오다 보니, 어디선가 쿵짝쿵짝 노랫소리가 들렸다. 가만보니 하늘에는 소박한 애드벌룬도 띄워져 있었다. ‘억새꽃 축제(9월 24일~11월 13일)’의 시작과 함께 장터가 열린 모양이다. 거기서 삼거리교를 지나면 횡단보도 건너편에 ‘민둥산 가는길’이라고 쓰인 글귀와 민둥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려진 벽화가 보인다. 그 위쪽으로는 증산초등학교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시작하는 코스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역에서 민둥산 입구까지는 넉넉잡아 20분 정도 걸린다.

은빛 물결치는 억새군락지만 생각하고 온 초행객에게 민둥산은 결코 쉽게 그 장관을 허락하지 않았다. 입구부터 ‘억’ 소리 나오게 가파른 오르막에다 이게 등산로가 맞나 싶을 만큼 돌투성이 산길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점심을 먹고 바로 헉헉대며 산을 오르다보니 소화가 안 돼 가다서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밥을 먹고 시작했을까.’ 후회막심이었다. 때문에 다음 산행에서는 꼭 지키리라 다짐한 것이 있다. ‘산행 전 밥을 먹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소화를 시킨 후 오를것!, 아니면 아예 먹지 말 것.’ 그렇게 힘겨워하며 한참을 걷다 보니 문득 비단 입으로 먹는 밥뿐만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단순히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그래서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내 것으로 얼마나 소화 시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2.6㎞짜리 급경사 코스와 3.2㎞의 완경사 코스 중당연히 후자를 선택해 올랐음에도 지속되는 오르막에 소화불량까지 겹치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열 발짝 가다가 서고, 또 열 발짝 가다가 서기를 무한반복 했다. 또 스틱 없이 오르다보니 급경사 구간에서는 90도로 인사하듯 허리가 절로 구부러졌다. 굽히지 않고는 오를 수가 없었다. 꺾어진 등허리와 땅바닥은 ‘ㄷ’자를 만들었다. 몇 번씩 ‘ㄷ’자를 쓰면서 나아갔다. 나 자신은 잘 알지 못하는 나의 자만과 이기심을 이 민둥산은 잘 안다는 듯, 이참에 제대로 꺾어주겠다는 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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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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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정상(1119m)
 

‘산이 또는 삶이 험하고 가파를수록 고개는 물론 허리까지 구부리지 않으면 오를 수가 없다.’

민둥산의 한수 가르침은 물론 감사하지만 정상은 언제 보여주겠다는 말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할 것 같은 마음이 차오를 때쯤 정상까지 1㎞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오르다 보니 빽빽한 나무숲이 사라지고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드디어 산행 중 가장 반가운 순간, 하늘이 열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싶었다. 때마침 중년의 남성과 여성이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저기, 얼마나 더 가면 되나요?”

산행 중 이런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힘들어서 말할 힘조차 없으니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해달라는 말투와 표정으로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씩 웃으며 하는 말이,

“앞으로 세 번만 숨 크게 내쉬면 됩니다. 세 번만”

하지만 열렸던 하늘은 나무숲에 막혀 다시 닫혔고, 그 뒤로도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느라 20번, 아니 셀 수 없이 멈춰 섰다. 다행히 그쯤 하산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띄었다. 역시나 드디어 억새군락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날이 덜 흐릴 때 억새를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는 마음에 손이 바빠졌다. 민둥산은 이름 그대로 ‘대머리산’이다. 과거 농민들의 화전으로 산불이 나면서 정상 일대의 나무가 사라졌다. 하지만 1974년 이후 화전 경작이 금지되면서 민둥산 능선에 억새가 군락을 이루게 됐다. 날씨는 많이 아쉬웠으나, 사람들이 많지 않아 풍경을 담아내기엔 좋았다. 그럼에도 다음에는 꼭 저무는 노을에 억새밭 전체가 물드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 맑은 날씨에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1119m 고지에 드넓게 펼쳐진 억새는 바람이 부는 대로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마치 저 하늘에 그리운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가을이 되면 더욱 짙어지는 그리움 때문에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가을을 맞는 것일까. 이름은 ‘억새’지만 그 몸짓에서는 그리운 이를 향한 수줍은 부드러움이 묻어난다. 울긋불긋 단풍처럼 보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는 화려함은 없지만 해 뜰 무렵엔 은빛으로, 저녁노을엔 금빛으로 물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훔친다. 그 은은함 가득한 빛깔은 그리움의 빛깔이요, 바람을 맞아 서로를 스치며 내는 선선한 소리는 그리움의 소리다. 그래서 억새는 가을이 무르익을 때 절정을 이룬 뒤 스러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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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순천만도 나도 하늘 위로에 붉게 물들었다


10월 4일 오전 9시쯤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순천역으로 향했다. 2시간 40여분 만에 도착해 바로 순천만습지로 이동했다. 순천역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는 ‘순천만 가는 버스 타는 곳’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순천만정원도 가까웠다. 순천역에서 버스로 5정거장 정도 거리였다. 순천만습지도 20여분 만에 도착했다.우선 입구 근처 식당에서 꼬막비빔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식당 간판마다 적힌 짱뚱어탕도 유명한 듯했다.

본격적인 순천만 갈대숲 탐방은 작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이름을 딴 ‘무진교’에서 시작된다. 무진(霧津)은 ‘안개에 쌓인 나루’라는 뜻으로 <무진기행>의 배경이 된 순천만 대대포 앞바다와 그 갯벌을 가리킨다. 김승옥이 소년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상 무진은 가상의 공간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무엇 하나 뚜렷함이 없는 공간으로 당시 현대인이 처한 위치를 암시한다.

그리 높진 않지만 무진교에 올라서면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빽빽이 들어선 갈대는 장정 키보다 높아 탐방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의 머리가 보일 듯 말듯 하다. 뜨거운 햇볕과 바람에 지난 여름 내내 머금었던 물기를 부지런히 털어내고 있는 갈대, 그 삼박자가 만들어내는 가을 정취에 푹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갈대가 터 잡은 이곳은 갯벌이다. 세계 5대 연안 습지 중 한 곳인 순천만. 강물을 따라 유입된 토사와 유기물 등이 바닷물의 조수 작용으로 퇴적되면서 넓은 갯벌이 형성돼, 자연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다양한 생물이 살아가고 있다. 여기엔 갈대의 공이 크다. 속은 물론 뿌리까지 비어 있는 통기형 구조인 갈대를 통해 갯벌 속까지 산소가 전달돼 갯벌 또한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실제 갈대밭 바닥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 구멍으로 게가 드나드는데 대부분 몸통이 작고, 갯벌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집게 다리 등 일부분은 분홍빛 등 눈에 띄는 색을 하고 있어 찾기에 어렵지 않다. 때문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들뜬 목소리로 구경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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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에 붉게 물든 순천만 S자 갯골
 



탐방로 갈림길마다 용산전망대로 향하는 길이 표시돼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천만까지 왔다면 용산전망대는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다. 왕복 40분 거리지만 걷다 보면 땀이 저절로 날 만큼 오르막이어서 결코 만만한 길은 아니다. 다만 잘 정돈된 숲길과 나무 데크 구간이 반복되면서 이어져 지루하지 않다. 산중턱까지 올라온 게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사람들이 볼라치면 때론 재빠르게, 때론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뭇잎 아래에 슬쩍 몸을 숨기는데 집게다리 때문인지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용산전망대에 이르기 전에도 중간중간 마련된 쉼터에서 순천만을 내려다볼 수 있다. 어디든 그곳만의 풍경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용산전망대에 도착하니 이제까지 올라오면서 봤던 순천만 풍경들이 마치 퍼즐조각이 맞춰지듯 하나로 맞춰져 드러났다. 저 멀리로는 나지막한 산들이 겹겹이 순천만을 감싸고 있어 누군가는 어머니의 품 같다고 했다. 오른쪽으로는 각기 다른 크기의 원형 갈대 군락이 자리 잡고 있는데, 마치 누군가 가위로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오린 듯 아기자기하다. 건축가 또는 정원사의 기질이 다분한 순천만이다. 이렇게 원형 모양으로 자기 영역을 확장하다가 다른 군락과 만나 넓은 갈대 군락을 형성한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갈대는 바람의 손길이 간지러운 듯 바람이 부는 대로 잔잔한 물결을 친다. 그 옆으로는 밀물과 썰물의 반복으로 갯벌에 생긴 물길, 즉 갯골(갯고랑)이 대대포구에서 시작돼 S자를 그리며 해안선까지 뻗어 있다. 이 S자 갯골을 통해 갯벌생물들은 육지로부터 유기물을 공급받는다. 해양 생물들에겐 탯줄인 셈이다.


갯골 왼편으로는 갖가지 모양의 갈대 군락을 제외한 온 갯벌에 붉은 단풍이 물들어 있다. 붉은 점을 수없이 찍어 채운 듯한 칠면초 군락이다. 칠면초란 새싹이 자줏빛을 띠다가 자라면서 초록색으로 변하고, 가을이면 다시 자줏빛으로 바뀌면서 색깔이 7번 변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따라 내려오니 칠면초 군락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칠면초 군락 안쪽으로 나 있는 나무 데크에 서서 갯벌 단풍 구경에 푹 빠져 있는데, 붉은 칠면초와 그 사이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하얀 황새 두 마리가 한 프레임에 잡혔다. 어느 순간 황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오르자 사진을 찍는 이들의 손이 바빠졌다. 겨울에만 130여종, 연간 230여종의 철새가 찾아오는 순천만은 철새들의 겨울 보금자리로 잘 알려졌다.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흑두루미도 볼 수 있다.

내려갔던 산길을 다시 올라와 전망대에서 일몰을 기다렸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지만 다행히 일몰시간이 가까울수록 서서히 온 하늘이, 아니 온 천지가 붉게 물들었다. 아니 붉게 빛났다. 온 하늘을 수놓은 양털구름까지 더해져 신비롭고 황홀했다. 산등성이도, 갈대밭도, 칠면초도, S자 물길도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 황홀경에 빠졌다.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황홀하다’는 표현을 입 밖으로 내뱉어 본 듯하다. 짧지만 강렬한 순간,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진경(珍景)이었다. 다양한 생물들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곳을 하늘도 기특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과연 순천만은 ‘하늘이 내린 정원’이었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갈대밭을 빠져나오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내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어린 시절 탈곡을 앞두고 일손을 거들기 위해 늦은 저녁까지 볏단을 날랐다. 그때 볏단끼리 스치면서 서걱대던 소리와 푸석했던 먼지 내음이 지금 이 순간과 꼭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