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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의 눈부신 풍경,

그윽한

문향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조선 여류시인 이매창-신석정으로 이어지는 시맥
복국의지 많은 백제유적, 자연・문학・풍류로 점철
‘부래만복(扶來滿福)’ 정명 600년… “꼭 르네상스 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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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포만자연생태공원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의 향이 한데 어울린 문화의 고장 전북 부안. 일찍이 백제 땅으로 나라를 잃었을 때는 복국을 위해 최후까지 항전했던 곳이다. 서책을 쌓아 놓은 듯 절묘한 채석강, 눈부시게 아름다운 서해 바다의 풍광은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찾아 노래한 곳으로 유명했다.

조선 영조 때 표암 강세황(1713~1791)이 변산을 유람한 후 두 편의 산문을 그의 유고집 <표암유고(豹菴遺稿)>에 남겼는데 감동 일색이다.

“(중략) 누대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넓고 넓은 푸른 바다가 하늘에 닿을 듯 끝이 없었다. 남쪽과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해가 비치니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서 위도에 있는 일곱 산(七山)을 지적할 수 있었으나, 모두 분별할 수는 없었다. 멀리 검은 콩 같은 몇 개의 점이 보이는데 모두 고기잡이배라 했다. 황홀하고 괴이하여 내 몸이 진짜 신선이 되어서 구름 밖에서 높이 나는 것 같았다.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오래머물 수 없으므로 서로 옷을 잡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임성여가 ‘고요한 밤 삼만 리 파도, 밝은 달에 지팡이 휘두르며 하늘서 내려오네’라며 왕양명의 시를 읊었다.”

어디 표암뿐인가.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부안에서 태어났다. 부안의 대표적 시인은 아무래도 조선시대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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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출신 최고의 문명, 이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매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娘家在浪州)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我家住京口)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相思不相見)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腸斷梧桐雨 )
-유희경


매창과 그녀의 연인이었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이 주고받은 절구다. 유희경은 천민 출신이었지만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시를 잘 지었다. 진달래꽃이 만발한 봄날, 유희경은 부안을 여행하는 길에 김제부사 이귀(李貴)가 마련한 주연에 초대된다. 유희경은 이 자리에서 매창을 처음 만났다. 매창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중에서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물었다. 당시 유희경의 나이는 47세이고, 매창은 19세였다. 유희경은 학문에 뜻이 있었던 터라 평소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결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희경은 매창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시 ‘증계랑(贈癸娘)’을 지어 건넨다.


일찍이 남쪽 땅의 계랑 이름 들었는데
(曾聞南國桂娘名)
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흔들었지
(詩韻歌詞動洛城)
오늘 그대의 진면목을 가까이 대해보니
(今日相看眞面目)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却疑神女下三淸)


매창은 거문고를 탔다. 낭랑하고 처연한 음악이 좌중에 가득했다.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가 있어서(我有古奏箏)
한 번 타면 온갖 감회가 일지요(一彈百感生)
세상에 이 노래를 아는 이 없으니(世無知此曲)
임의 생황 소리에나 맞춰 보리(遙和謳山笙)


유희경이 생황도 잘 분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읊으며 자기의 마음을 드러냈다. 매창의 노래를 듣고 사내는 또다시 한 수를 읊는다.


나에게 선약이 하나 있으니(我有一仙藥)
고운 얼굴 찡그린 것도 고칠 수 있다네(能醫玉頰嚬)
비단 보자기에 깊이 감추어 두었다가(深藏錦囊裏)
정다운 임에게 주고 싶어라(欲與有情人)


두 연인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임진전쟁(임진왜란)이었다. 유희경이 의병으로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부안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매창은 눈물로 ‘자한(自恨)’이란 시를 짓는다


봄바람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東風一夜雨)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柳與梅爭春)

이런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對此最難堪)
술동이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네
(樽前惜別人)

마음속에 품은 정을 말하지 못하니(含情還不語)
그저 꿈인 듯하고 바보가 된 듯하네(如夢復如痴)

거문고로 강남곡을 타 보지만(綠綺江南曲)
이 심사를 묻는 사람이 없네(無人問所思)
(하략)



당대의 문장가이며 최고의 지성이었던 허균도 매창을 알고 있었다. 허균은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왔다. 이때,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는데 평소 염원이었던 매창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이 허균의 문집에 남아 있다.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하였다. 고홍달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매창)은 이옥여(李玉汝: 李貴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계생의 조카를 침소에 들였으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허균이 지목한 매창의 정인 이귀는 누구인가. 바로 유희경과 매창을 연결시켜준 김제부사다. 이 귀는 야망이 있던 관리로 한때 매창을 좋아했으나 유희경에 빠진 매창을 눈감아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에 살던 허균은 매창을 이귀의 정인으로 알고 있었다. 매창은 서른여덟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매창은 평소 “나는 거문고와 시가 참말 좋아요. 이후에 내가 죽으면 거문고를 함께 묻어주세요”라고 했다. 실제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에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전해진다. 허균은 자신의 문집에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을 남겼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介潔)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지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시를 지어 슬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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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이 지은 ‘임생각’ 시비와 그의 묘
 


연면한 시맥 목가시인 신석정의 고향

가을날 노랗게 물들은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며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그믐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부안 동중리 출신 고(故)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임께서 부르시면’이라는 시다. 시인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근대사의 시대적 아픔을 시로 표출한 불멸의 서정 시인이었다. 아직도 많은 문학 애호가들이 그의 시를 사랑한다. 시인은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4년 11월 24일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 문단에 데뷔했고 첫 시집 ‘촛불(1939년)’에 이어 ‘슬픈 목가(1947년)’를 펴냈다.

신석정의 문학정신을 기념하는 석정문학관이 부안읍 선운리에 세워졌다. 여기서는 시인의 작품과 꼿꼿했던 삶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설 전시관에는 시인의 좌우명이었던 ‘높은 산과 흐르는 물처럼 지조 있게 살리라(志在高山流水)’는 문구가 눈에 띈다. 격동의 시기,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담고 자연을 벗 삼아 의연하게 살아온 시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백제의 한(恨) 안은 우금산성 주류성이 여기인가

우금산성은 백제 최후 풍왕(豊王)이 복국 의지를 갖고 나당 연합군과 항쟁했던 마지막 왕성인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주류성 부안설’을 주장한 이는 고(故) 전영래 교수였다. 그는 우금산성을 주류성으로 비정하며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제시했다.

주류성은 3년 동안 지속되었던 백제 복국군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당・신라연합군에 의해 백강전투에서 패함에 따라 주류성 시대의 역사가 종식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주류성의 백제 유민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언제 이 땅에 묻힌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볼 것인가.’
이 성은 둘레 3960m로 전형적인 포곡식 백제 치소성(治所城)이다.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개암사(開巖寺) 뒷산에 있는데, 현재 수구(水口) 등의 시설과 석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은 약간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다.


천년고찰 개암사, 궁전터라는 속설도

개암사 전각은 백제의 궁궐의 모습인가. 고대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사전(寺傳)에 따르면 백제무왕 35년(634) 시기 묘련대사가 궁전에 절을 지으며 동쪽의 궁전을 묘암사, 서쪽의 궁전을 개암사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에 와서는 문무왕 16년(676)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허물어진 전각을 중수했다. 불교가 가장 흥성했던 고려시대에는 건물이 30여 채에 이르는 대 도량이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보물 제292호인 대웅보전과 응진전, 월성대, 요사채 등을 갖추고 있다.


기암절경 채석강

채석강의 기암절경은 물이 빠지면 온전하게 드러난다. 흡사 수만 권의 책을 겹겹이 쌓아 놓은 듯하다. 85.7m나 되는 닭이봉 한 자락이 억겁의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면서 형성된 퇴적암층이다. 이곳의 지질은 화강암, 편마암이 기저층을 이루고 있으며 약 7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의 성층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명소 ‘채석강’과 모습이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간조 때는 물 빠진 퇴적암층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다생물과 해식동굴의 신비로운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간조 때 해식동굴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노을은 황홀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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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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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백제가람 내소사, 소정방에 대한 설화

내소사는 <사기>에 따르면 백제 무왕 34년(633)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來蘇)’라 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소래사(蘇來寺)’로 기록되어 있으며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고려 인종 때 정지상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에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 인조 때 청민(淸旻)스님이 대웅전(大雄殿)을 지었다. 건축양식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건축물은 고건축 전문가들 사이에서 조선 중기 사찰 건축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후기 1865년에 관해(觀海)가 중수하고 만허(萬虛)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이 중창했다.



‘명품 정원도시, 아름다운 부안’ 조성

부안군은 도심에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변공간과 산책로마다 화단을 조성, 명품정원도시로 탈바꿈시켰다. 부안 시내 중심 ‘물의 길’에는 물고기를 거꾸로 세워놓은 모자이크 조형물을 세워 아름다운 예술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하여 ‘너에게로’ 산책길은 영국 첼시정원박람회 수상 경력의 황지혜 작가가 꾸몄다. 군 관계자는 여수정원박람회에 전시된 공원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공원과 예술’의 접목이라고 자랑한다. 현재 추진 중인 ‘매창 사랑의 테마공원’은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을 테마로 조성되고 있으며,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운동시설도 갖추어 놓았다. 시비에 각자된 주옥같은 매창의 시와 그녀를 추모한 유명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2023년 잼버리대회 유치에 행정력 집중

지난해 9월, 2023년 잼버리대회 국내 유치 후보 도시로 선정된 전북 새만금은 현재 폴란드 그단스크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전북 새만금 지구 현장을 실사한 세계스카우트연맹 위원들이 시설과 프로그램 등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최지는 내년 8월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리는 제41회 세계연맹총회에서 결정된다. 대회를 유치하면 5만여 명이 방문해 총 800억 원의 경제 효과를 낼 것으로 전북도는 예측하고 있다. 실사단은 부안 잼버리공원을 비롯 수려한 경관과 체험 프로그램을 갖춘 줄포만 갯벌생태공원, 내소사, 모항해수욕장 등을 답사했으며 새만금 준비 과정에 흡족해 했다고 한다.



생태공원・청자박물관 등 볼거리 다양

부안은 다른 곳보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곳이 많다. 그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줄포만자연생태공원은 지난 2005년 방영됐던 TV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찍은 명소다. 공원 총 면적은 20여 만평. 부안군은 이곳에 갈대숲 10리길, 야생화단지, 은행나무숲길 등을 조성했다.

고려시대 부안은 전남 강진요와 더불어 최상품의 청자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청자가마터는 보안면 유천리와 진서면 진서리 일대에서 찾아졌으며 70여 곳의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청자를 생산하여 뱃길로 홍성, 태안, 강화를 거쳐 개경으로 운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1년 개관한 청자박물관은 고려청자 30여 점을 비롯, 유적지에서 출토된 청자편과 고려 도자기 발달사 등의 자료를 전시해 교육장으로 활용 되고 있다.



부안의 먹거리, 곰소 젓갈과 오디

부안의 자랑은 천일염으로 빚은 곰소 젓갈과 서해바다의 청정 수산물이다. ‘곰소 젓갈 발효 축제’는 올해로 10회째다. 10월 초에 3일 동안 부안 곰소 젓갈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수백년 전통의 ‘곰소 천일염’은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는다. 간수 농도를 25~27도로 유지하여 염화미네랄이 적고, 풍부한 천연 해수로 증발시켜 쓴맛이 덜한 것이 특징이다. 한때 궁중에 진상되기도 했으며, 천일염으로 김장을 담그면 김치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밖에 부안의 먹거리로는 ‘오디’를 빼놓을 수 없다. 변산반도 청정지역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뽕나무 열매, 오디를 원료로 만든 부안 뽕주는 인기가 높다. 오디와인은 청와대 건배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오디는 간장을 튼튼하게 하고, 정력을 돋우며, 고혈압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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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