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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유교문화자원의 보고


조선 예학의 산실 사계 배향한
‛돈암서원’
양명학의 거두 명재 윤증
배출 고택 남아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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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
 




 

충청유교문화의 본거지로 자리매김


충남 논산시는 유학의 성지로서 유교문화자원의 보고(寶庫). 3개의 향교와 10개 서원, 3개 고택등 기호유교문화 자산이 산재돼 있다. 이 가운데 6건의 국가지정문화재와 54건의 충남도지정문화재가 있으며 비지정 문화재까지 합하면 논산의 유교문화재는 180여 건이다. 조선 중기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중심지이자 대유학자들이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역사적 무대였다.

유학의 성지를 대표하는 돈암서원(遯巖書院: 사적 제383호. 논산시 연산면 임리)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이 서원은 사계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지방 사림들의 발의에 따라 인조 12년(1634) 창건됐다.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우암 송시열(宋時烈) 등 네 분을 모셨으며 조선 현종 1년(1660)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 서원은 대원군 시기 전국의 많은 서원이 철폐될 당시에도 헐리지 않았다. 그만큼 유가의 중시를 받은 서원이다.

돈암서원의 면적은 5590㎡로서 안에는 강당·동재·서재·사우·장판각(藏板閣)·양성당(養性堂) 등 건물 10여 동과 돈암서원비·관리사 등이 있다. 이 중사우인 유경사에는 사계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그의 아들 김집(金集), 송준길과 송시열 등을 배향하였다. 또 장판각에는 김장생·김집·김계휘(金繼輝)의 문집을 출판할 당시에 사용했던 많은 양의 판각과 왕실의 하사품인 벼루·전적 등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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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은 어떤 인물인가

사계는 예학(禮學)의 종장(宗匠)이며 동국 18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도 부친을이어 17세기 예학시대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사계의 문인들도 모두 거유와 관료로서 이름을 날렸는데 송시열과 송준길, 이유태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김장생은 13세 때 구봉(龜峯) 송익필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20세 때부터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나이 31세(1578, 선조11)에 관직에 나갔으나 벼슬보다는 학문과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유가에서는 사계의 유학 사상이 이이(李珥)의 적통(嫡統)을 계승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특히 임진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학자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김장생의 삶과 사상은 17세기 이후 예론(禮論)과 의리 실천의 전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사계는 임진전쟁이란 미증유의 와중에서도 학문연구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51세에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이듬해에는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한다.

그의 정치사상의 근간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治國)이란 인간사회의 조화를 성취한다’는 목표였다.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고 하여, 예(禮)를 국가 치란(治亂)의 근본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예론(禮論)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뭘까.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계를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했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고 기록했다.

김장생은 지독한 효자였다. 그는 일상에서 ‘효우(孝友)와 부덕(婦德)’을 중시하였다. 중국 사신으로 가는 부친을 수행할 때 매 끼니 몇 수저씩을 드시는지 마음속으로 헤아려서 아버지의 건강을 보살폈다고 한다. 부친의 거처하는 방이 부실하면 직접 흙 판을 들고 수리에 나섰고 부친이 병환에는 생선을 잡아 부양하였다. 이런 사계의 돈독한 예(禮觀)는 후에 제자이면서 거유였던 우암 송시열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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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영정
 





소론의 거두 명재 윤증의 유적

논산 출신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은 숙종 때 백의정승이라는 경칭을 받은 소론의 지도자였다. 본관 파평(坡平),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으로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사계의 아들 김집(金集)의 제자로 송시열·윤휴 등 당대의 명유들과 교유하였다. 명재는 젊은 시절 송준길,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정통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세자시강원진강·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의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명재는 일체 사양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적 배경은 임진전쟁과 양 호란 이후 변화한 조선 사회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스승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그는 특히 양명학(陽明學)의 거두였던 정제두(鄭齊斗)와 친했는데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에 두 인물의 사상이 담긴 왕복 편지가 실려 있다. 이들의 주장은 주자학적 이론과 의리론 만을 가지고 변모하는 조선의 미래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는 모두 사문난적으로 치부했던 우암과는 숙명적 대결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친 윤선거의 행장 찬술을 계기로 스승과 제자는 더욱 반목하여 소위 ‘회니시비(懷尼是非: 회덕과 논산의 시비)’라는 역사적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 후기까지 노론 편에서는 스승인 우암을 배신한 패륜학자로 비판했지만 지금은 양명학에 밝았던 명재의 탁견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다.


‘백의정승’ 윤증이 살던 고택(古宅)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위치하고 있다. 교촌리는 옛이산현(尼山縣)으로 파평 윤씨들의 세거지이다.윤증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충청도 사대부가의 위엄이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충남도 중요 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고택은 인공 연못과 그 안의 석가산, 사랑채, 안채, 광채로 나뉘어져 있다. 대청마루가 남쪽으로 향한 남향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주변의 경치가 수려하며 4백년 고풍을 잘 간직한 탓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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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역사 문화의 고장 놀메

마한의 옛 땅 ’놀뫼‘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백제시기에는 놀뫼를 황등야산(黃等也山)이니 황산(黃山)이라고 표기했다. 지금의 논산이란 지명도 따지고 보면 무두 놀뫼에 대한 한자식 다른 표현이 된다.

왜 놀뫼라고 한 것일까. 어문학자들은 들이 넓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금강변 드넓은 놀뫼 평야는 자금도 풍요로운 곡창지대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많은 부족이 집단을 이뤄 살았다. 신기리 고인돌군은 이를 뒷받침한다.



은진미륵 관촉사

고려 초 세워진 관촉사는 은진 미륵으로 유명하다. 사적기에 따르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혜명(慧明)이 불사를 짓기 시작하여 100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386년(우왕 12)에 불당이 증축 건립하였으며, 1581년(선조 14) 백지(白只), 1674년(현종 15)에는 비구 지능(知能)이 중수(重修)하였다.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에서 아이우는 소리가 들렸다고한다. 나라에서는 그곳을 신성하다고 여겨 가람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옛날 중국의 지안(智安)이라는 명승(名僧)이 이 절에 세워진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을 보고 미간의 옥호에서 발생한 빛이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고 하면서 예배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런 연유로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을 비롯하여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사리탑(舍利塔)·연화배례석(蓮花拜禮石, 충남유형문화재 제53호)·사적비(事蹟碑)·관음전(觀音殿)·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解脫門)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1914년에 만든 반야교(般若橋)라는 현대식 구름다리도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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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왕찰 개태사 석불, 철확 남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개선한 왕건태조를 기리는 왕찰 개태사가 바로 계백장군의 투혼이 어린 연산에 있다. 황산에서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이라 부르고 그 밑에 개태사를 지은 것이다. 고려 초기 왕찰로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잦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방치되어 온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 일제감정기 1930년 도광사(道光寺)로 복건되어 법등을 이어 왔으며 이름을 고쳐 태광사(泰光寺)라고 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석불입상(石佛立像.보물제219호), 개태사철확(鐵鑊.충남민속자료제1호), 5층 석탑(충남문화재자료 제247호)과 석조(石槽, 충남문화재 제275호)가 있다. 철확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이다.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입상(보물 제219호)은 경내(境內)에 위치하고 있다. 본존불은 높이 4.15m 크기로 복연(伏蓮: 아래로 향한 연꽃) 의 방형 기단상에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부에 만들어진 방형의 불대(佛臺) 후면에 2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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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철확
 




청동기 귀중 유물 발견

지난 60년대 논산훈련소에서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 발견됐다. 이것이 바로 국보 제141호인 다뉴세 문경과 국보 제146호인 청동방울이다.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청동방울은 8각형 별모양으로 2점이 각 모서리에 방울을 달았다. 또 간두령 2점,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조합식 쌍두령 1점, 아령 모양의 쌍두령 2점이나 됐다.

놀뫼는 백제 왕도 부여에 가리어 있으나 실지는 많은 유산을 지니고 있다. 660년 백제 장군 계백은 신라침공에 맞서 5000결사대로 진을 친다. 신라대병 5만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결사대의 구국 투혼은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 전적지가 연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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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선 논산시장
 




황명선 시장 인터뷰

논산을 충청유교문화의 본거지로 자리매김



황명선 논산시장이 논산을 중심으로 한 충청 유교문화 재조명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황 시장은 “논산은 조선후기 한국유학사의 중심지이며 충청유교문화원이 충청유교문화권 종합개발 사업의 연구기관으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충청유교문화권 종합개발을 논산시가 주도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돈암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등을 추진, 충청유교문화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한다는 복안이다.

충청유교문화원은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일원 4620㎡에 총 280억 원을 들여 건립된다. 이 기관에는 교육관, 연구관, 놀이마당 등 교육연구전시관람·수련체험 시설과 공원, 주차장 등 휴식 및 부대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특히 기본적인 유교문화 자료 수집 및 보관은 물론 동아시아 유교문화 연구사업과 정신문화 교육, 국제 규모의 문화컨벤션 사업, 심신 힐링 문화사업 등을 수행하게 된다.

황명선 논산시장은 또 충·효·예가 살아있는 논산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유적지 관리와 효자, 효부상 수여도 확대할 것임을 밝혔다. 황 시장은 조례제정을 통해 효자·효부상 수여를 추진하고 관련 유적지에 대한 정비 등을 통해 충효사상을 널리 고양시키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