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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테러리스트다.” 일본 정부의 대변인 격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의 이 황당한 발언은 대한민국을 분노케 했다.
이에 질세라 이번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불난집에 기름을 붓는 격의 발언을 했다. “안중근은 사형수다.”
 
참으로 역사를 돌아볼 줄 모르고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 해도 지나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당시부터 불법적이고 부당한 방법으로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단 5개월 만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일본의 그 시커먼 속내가 또 다시 드러난 것이다.

일본이 망언을 쏟아낼 때마다 분노만 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하얼빈의거’와 관련된 사진을 통해 그날의 역사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왜 일본법으로 처리하는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울려 퍼진 일곱 발의 총성. 그중 세 발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흉부 및 복부를 관통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그는 나라를 빼앗은 침략의 괴수이자 평화의 공적 이토를 향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브라우닝 권총을 빼들었다. 이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은 이토는 20여 분뒤 절명했다.

거사에 성공한 뒤 안 의사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장교 미치올클로프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그날 저녁 일본영사관으로넘겨져 하얼빈 영사관 지하 감옥에 구금됐다.
 
“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하는 중이고 그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였다. 따라서 나는 형사범이 아니고 전쟁포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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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쏜 것이므로 나에게 적용할 법은 일본, 청국, 한국 어느 한나라의 법이 아니라 육전 포로에 관한 국제법이요. 왜 나를 일본법으로 처리하는 것이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한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과정에 적용돼야 할 법이 그 어느 나라의 법이 아닌 국제법이라고 말했다.이는 안중근 의사의 신분이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미 대한의군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재판장에서는 이를 모른 척 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이토를 죽인 것이 인정된다면 대한제국의 국민이 일제의 통치를 바라고 있다는 자신들의 새빨간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제는 재판과정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정치적 목적이 아닌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이토를 죽였다고 말한다면 사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했으나 안 의사는 거듭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이토 저격은 독립전쟁의 일환이고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안의사는 뤼순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이는 모친인 조마리아 여사의 교훈과 안 의사의 결연한 뜻 때문이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 소식을 들은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세상 그 어느 부모가 자식의 죽음 앞에 의연할 수 있겠는가.
찢어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흐르는 피눈물을 애써 감추며 이 편지를 보냈을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 또한 어떠했겠는가.
허나 조국과 민족 나아가 동양평화를 위해 선택한 장부의 길. 어찌 조국과 민족의 원수 앞에 목숨을 구걸할 수 있겠는가.
안 의사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후회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만 <동양평화론>에 대한 집필을 끝낼 수 있도록 사형 기일(期日)을 연기해 달라 요청했지만 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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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다
 
“나의 (의거)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은 한국의 독립만을 위한 결단이 아니었다. 조국과 민족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그 죄를 물은 것이다. 동양의 평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큰 뜻을 품었기에 사형을 앞둔 상황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었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사형이 앞당겨지면서 미완성인 채 남아있지만 그의 뜻만은 길이 남아 ‘평화’의 씨를 뿌릴 수 있었다.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의례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 이, 못난 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라.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라.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길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닐 것이냐.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가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등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 <한국인 안응칠 소회>
 
 
누가 죄인인가
 
일제는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거짓의 탈을 쓰고 전쟁과 찬탈과 침략을 일삼았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불허한 조약을 불법적으로 체결(을사늑약)하고 강제로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대한제국의 국민이 일제의 통치를 받기 원한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세계를 기만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 이토를 척살했기에 마땅히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건만, 당시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일제의 눈치를 보느라 안중근 의사를 바로 일본영사관에 넘겼다.

일제 또한 자신들의 음흉한 속내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 하얼빈의거 5개월 만인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했다.

이 재판이 불의한 것이었음을 일본만이 모르고 있다. 아직까지도 제국주의의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안중근 의사의 사형 집행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자신들의 불의와 거짓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스트’ ‘사형수’ 그들이 어떻게 부르든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망언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고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장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누가 죄인인가?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대한의 황제를 폭력으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조선의 토지와 광산과 산림을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화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 보호를 핑계로 대한의 군대를 강제 무장 해제시킨 죄, 교과서를 빼앗아 불태우고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외교권을 빼앗고 유학을 금지한 죄,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대한의 사법권을 동의 없이 강제로 장악 유린한 죄, 정권을 폭력으로 찬탈하고 대한의 독립을 파괴한 죄, 대한제국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한다며 세계에 뻔뻔스런 거짓말을 퍼뜨리며 세계인을 농락한 죄, 현재 대한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이고 밖으로는 세계 사람들을 모두 속인 죄, 동양의 평화를 철저히파괴한 천인공노의 죄! 과연 누가 죄인인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밝힌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이다. 과연 누가 죄인이란 말인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를 토대로 만든 뮤지컬 <영웅>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기사를 마무리짓는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죽는 것. 이것이 참된 영광이니 나 기꺼이 받아들이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저들의 거짓과 야욕에 속지 마시고 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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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사늑약 체결 후 기념사진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는 일제 앞에 우리의 조국과 민족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다.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를 여러 번. 경술국치를 당하기 5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어진 을사늑약으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고종황제는 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망국이므로 결코 승인할 수 없다고 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 결국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외부대신 박제순 간에 이른바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에 찬성했던 이들 다섯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 조약(늑약)은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 일부 학자들에 의해 무효라는 의견이 제시됐으며, 이후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사진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에 찍은 것으로 앞줄 한 가운데 검은 복장이 이토 히로부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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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사위와 함께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미명(美名) 아래 그가 행했던 모든 행동은 동양의 평화를 위협했으나 이토 자신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족과 함께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

사진 속 이토 가족의 모습과 조선의 현실이 대비되면서 더욱 암담한 기분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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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앞 상점

안중근 의사가 많은 정보를 얻은 곳이다. 러시아인이 경영하던 이곳 상점에서 안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몇 시에 도착하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안 의사는 거사 일주일 전인 1909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꼬레이스카야(신한촌)의 계동학교 앞 이치권의 집에서 이토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철도를 경유해 하얼빈으로 간다는 정보를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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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조선은행

항일 구국운동, 독립운동을 위해서 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하얼빈 조선은행은 독립자금을 환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금융기관이었다.
지점장은 러시아인으로 한국인을 상대로 많은 비자금을 쉽게 관리해주고 높은 금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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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앞 풍경(1909년 8월)

사진 속 하얼빈역의 모습은 한가롭다 못해 평온해보이기까지 한다.
당시 하얼빈역은 러시아 풍으로 지어졌으며 예술적으로도 균형이 잘 이루어져 보기에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사진이 찍힌 두 달 후 한가로워 보였던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우리 민족 최대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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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플랫폼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특별열차로 방문하게 된 하얼빈역 플랫폼이다. 일본의 만주 침략 경영이 실적을 올리던 무렵 러시아의 재무대신(대장성대신) 코코프체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극동지방 방비와 동청철도 이남의 만주 경영을 점검하고자 극동 순시 차 하얼빈에 머물 때였다. 코코프체프를 만나기 위해 이토는 하얼빈으로 가는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진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11시경 이토가 도착할 것을 대비해 러시아 군인들이 민간인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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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하얼빈역 도착 모습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드디어 하얼빈역에 멈춰 섰다.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는 수행원을 거느리고 열차 안에 들어가 이토를 영접했다. 그로부터 약 20분 후 이토는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렸고, 인사를 받으며 모자를 벗는 순간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안중근 의사가 준비하고 있던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들고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제1탄은 이토의 가슴을 명중시켰으며 제2탄도 이토의 흉부를 맞췄다. 제3탄이 이토의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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