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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원경은 어디?

역사의 베일을 벗긴다


충주 안림동에서 토성고지 발견


남쪽엔 문무왕대 쌓은
남산성 경주와 비슷하게 경영
오래전부터 고신라 와당 등 출토…
본격적인 조사 필요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충주시청
사진. 글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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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안림동 대원고등학교 앞 토루 동편 구릉에 있는 암반층 위에 쌓아 올린 판축. 옮겨온 흙에 자갈과 할석을 섞다어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중원경의 전신
국원경


‘국원((國原)’은 4~6세기 충주지역을 장악했던 고구려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다. 국원이란 이름은 어떤 의미로 붙였을까. ‘나라의 넓은 들’이라는 뜻에서 붙인 것인가. 고구려는 중요한 지역에 국(國)자를 붙였는데 지안(集安)의 ‘국내성’과 충주의 ‘국원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4세기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이 백제를 축출하면서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기록을 보면 충주의 고호는 ‘완장성’ ‘예성(蘂城)’이다. 이 이름을 백제시대로 상정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단정할 수는 없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국원을 매우 중요시 했다. 충주지역에 대한 중요성은 탑평리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은 백제에서 축조한 장미산성을 보완하고 탑평리에 최대의 가람을 조영했으며 기념비적인 척경비를 마을 어귀에 세웠다. 그리고 속국 신라에 대한 충성 약속을 비석에 담았다. 신라는 한동안 숨을 죽이고 살다 5세기 중반에 들어 대륙이 혼란한 틈을 보이자 한강유역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법흥왕은 가야의 중심세력인 금관가야를 혼인동맹을 통해 아우르며 통합의 기반을 마련하고, 그 뒤를 이은 진흥왕은 가야 구형왕의 아들 무력(武力)을 기용함으
로써 혈맹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강유역에 대한 신라의 공격은 신라 이사부(異斯夫)와 가야 망명 왕자 무력(武力)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들은 죽령을 넘어 고구려의 남하 거점인 적성(赤城)을 공격하여 일대의 수로를 장악한 후(단양 적성비) 온달성으로 불리는 단양 영춘까지 점령하는 것이다. 진흥왕의 정예로운 젊은 전사들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상류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당시 경상도 상주(古名은 上州)에는 정예군이 진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수시로 고구려 영토였
던 청천(薩水)을 공격하여 고구려 군사력을 타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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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안림동 대원고등학교 앞 토성 벽에 쌓여 있는 석축
 

   


처음에는 고구려 세력이 강해 견아성(상주)에서 출전한 신라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청천과 인근에 있는 백제군의 응원을 요청한다. 백제 동성왕은 군사 3000명을 보내 신라를 도왔고 고구려군은 견아성의 포위를 풀기도 했다. 진흥왕 시기 신라는 다시 국원을 공격한다. 이 시기 백제는 중국의 남조인 양(梁)나라가 쇠퇴하여 강력한 후원자를 잃었다. 진흥왕은 551년 급기야 국원 땅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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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안림동 대원고등학교 북편에 있는 긴 토벽
 




삼국사기에 보면 이 해에 진흥왕은 낭성을 순시, 가야악사 우륵을 만나 하림궁에서 음악을 듣고 그를 국원에 안치했다고 돼 있다. 당시 국원에는 많은 가야 세력이 진주해 있었으며 진흥왕은 이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이같이 특별한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흥왕의 젊은 군사들은 백제와 충돌하면서 고리산(옥천)에서 성왕(聖王)을 시해(554년)하게 된다.

성왕의 시해는 백제와 신라의 숙원관계를 지속하는 계기가 됐으며, 양국의 동맹관계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이 시기 진흥왕은 가야전사를 주축으로 한 무력의 군대를 앞세워 청천-달천-장미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진격로는 달천-주덕-이천-한양으로 통하는 교통로이며 예부터 요통(要通)으로 불리어 왔다. 진흥왕은 백제 성왕 전사 3년 후인 557년 국원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왕경인 서라벌 다음 가는 부도(副都)로 삼아 중요시한 것이다. 국원소경의 설치는 훗날 전국을 방위 개념으로 나눈 5소경 설치(신문왕 685년)보다 128년이나 앞선다. 국원경은 후에 중원경 혹은 중원소경으로 개칭되며 신라 전 시기를 통해 국중의 제2수도 기능을 했다. 신라를 계승한 고려시기에도 중원경은 매우 중요시 된 행정의 중심지였다.




중원경의 위치
지금까지의 학설


학계는 고구려 세력이 진주했던 탑평리 일대를 진흥왕 초치(初置)의 국원소경으로 비정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몇 해 전 발굴결과 큰 규모의 관아 건물 등이 찾아져 그 주장을 뒷받침했다. 탑평리 주변에서는 1992~1993년 한국교원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도 규모가 큰 건물터가 여럿 확인된바 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토기와 와당도 상당수 나왔다. 실제로 중원고 구려비가 있는 용전리에서 탑평리에 이르는 거리는 남북 2.1㎞, 동서 1.6㎞나 되며 비교적 넓은 곳이다.

인근 누암리 고분군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모두 38기의 신라고분이 발견된바 있다. 지표조사에서는 봉토 직경이 11m 안팎인 대형 무덤 40기를 포함하여 모두 271기의 고분이 추가로 확인됐다. 인근 마을 하구암리에도 400기가 넘는 고분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축조연대를 비롯하여 무덤의 양식과 유물의 출토양상이 모두 누암리와 거의 같은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탑평리 일대가 신라 전 시기 중원경의 치소(治所)로서 기능을 했는지는 좀 더 확대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탑평리 일대가 넓다고는 하나 신라 부도에 걸맞는 인구를 포용하기에는 면적이 좁다. 남한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유역으로 잦은 수해 위험이 상존하며 장미산성까지는 거리가 있어 소경 인구의 보호 안전에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자리의 물색이 필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충주시 어림동 유적과
남산성


문무왕은 고구려 정벌 이후 원을 보호하기 위해 큰 공역(工役)을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국원성의 축조다. 기록을 보면 ‘문무왕은 13년(673) 국원성을 축조하게 되며 성의 크기는 2592보(步)’였다는 것이다.

충북지역 문화재 연구에 큰 공이 있는 장준식(충북문화재 연구원장) 교수는 국원성 축조에 관해 ‘고구려를 정복한 5년 후의 일이었으나 당시에는 대당(對唐) 투쟁에서 국원경 성민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678년 신라와 당은 매초성(경기도 연천)에서 20만 대군이 격돌하는 대(大)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안을 감안하면 문무왕의 국원성 축조는 당을 겨냥한 것이기에 견고한 석성(石城)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현재 충주 남산에 축조된 남산성이 이 시기 축조된 성으로 가장 유력시 된다. 남산성은 현재 전장 1.2㎞로서 문무왕 시기 축조했다는 국원성의 크기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임병태 교수는 한 논문에서 신라 오소경(五小京) 운영에 관해 서라벌 왕경 모방설을 제기하고 있다. 즉 평지에는 토성에서 거주하다 적들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올라가 피신하는 ‘청야전술’격이었다는 것이다. 국원경성의 운영도 문무왕대에 이르러 남산성 인근으로 성민들을 옮기고 견고한 성을 축조, 방어성으로의 이용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예는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된 서원소경(西原小京, 청주)에서도 나타난다. 즉 서원경성의 초치(初置) 위치는 방어와 취락의 요지로 평가되는 상당산성으로 비정되며, 후에는 청주읍성지역인 평지로 내려와 상당산성과 우암산성을 방어성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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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에서 발견된 신라 토기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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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규수 태재부 시에 있는 대야성과 그 밑 관청 건물지(좌). 충주 안림동 지역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문무왕이 남산성을 성민보호용으로 쌓았다면 당시 많은 주민은 어디서 살았을까. 국원경 초치장소로 상정되는 탑평리 일대라면 거리가 너무 멀다. 대림산성도 주변에 많은 주민이 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남산성에서 가까운 평지는 어디일까. 충주시 어림동 일대는 남산성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많은 주민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충주시의 중심인 충주읍성의 동쪽 대지로 계명산과 남산성이 동남을 방어하고 서쪽으로는 달천과 남한강이 합류, 자연적인 해자(垓字)를 이루는 가장 완벽한 요지인 것이다. 어림동에서는 지난 74년경 고 신라와당이 지금은 고인이 된 충주공대 김용주 학장이 찾아 필자에게 보여준 적이 있으며, 주변에서 많은 고 신라, 통일신라, 고려시대 와당과 토기편이 수습된바 있다. 당시 건물지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대형의 연화문 대좌가1기 있었다. 더 주목되는 것은 현 대원고등학교 북편 어림동길에서 확인된 긴 토루(土壘) 벽이다.

토루는 약 6~7m 높이로 외벽은 삭토(削土)한 흑적이 보이고 안으로는 내저(內低)하여 축조한 토성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토루는 주변에서 운
반이 가능한 강자갈을 사용하여 흙을 섞어 다진판축(版築)한 형태로 고대 토성 축조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토루 윗면은 언제부터
인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안림동 일대 긴 토루는 항공사진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며 장방형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 고대 신라와당이 찾아진 지역을 중심으로 유적을 발굴하면 고대 민가유적과 기타 유적이 찾아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유적 서편 호암지(虎岩池) 주변 지역에서 지난해 일부 토성의 흔적이 찾아져 어림동유적과 연계된 중원경의 나성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만약 어림동 유적이 신라중원경 토성지(土城址)일 경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보존 된 소경성지이며 충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중원경성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가장 확실한 자료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다. 이 일대는 과거 호림동일대와 더불어 택지개발이 추진되어왔던 곳인데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아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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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남산성 (제공 충주시청) 




가야세력의 본거지
사량은 어디


충주 주덕(周德)은 ‘임나가라(任那加良)’ 유적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여지승람>과 <문헌비고>에 ‘충주는 임나국’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충주가 임나국의 고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충주에 왜 생뚱맞게 임나국의 이름이 나오는 것인가.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역사의 해묵은 논쟁이지만 충주에서 임나국의 기록이 보이는 것은 흥미롭다. 주덕에서는 지금도 요도천(堯度川) 주변에서 철기를 제조하고 남은 슬러지가 많이 발견된다. 바로 고려시대 야철지 유적인 다인철소가 있던 유적이며 신라 문장가 강수 (强首) 전에 나오는 부곡(釜曲)의 대장장이 딸과도 연관 되는 지역이다.

중원경 사량(沙梁) 출신인 강수는 통일대업을 완수하는 데 공헌을 한 신라제일의 문장가였다. 그가 왕 앞에 나가 문무왕의 질문에 대답하는 말 가운데 ‘신은 본래 임나가량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국원경 사람이 왜 자신이 임나가량인이라고 했을까. 여기에 국원 고대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주덕 야철지는 가야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이들이 언제 경상도지역에서 이주했는지는 상세하지 않다. 진흥왕의 북벌 당시 이주했다는 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백제와 가야의 연합 시 이주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성왕 시기에도 백제는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와 전쟁을 치른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진흥왕대 불쑥 가야 악사 우륵(于勒)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하림궁(충주 탑평리 사지로 비정)에서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감흥을 받아 그를 국원에 안치하고 제자들을 시켜 가야금을 장려하는 것이다. 우륵은 본래 충주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남쪽 가야에서 이주한 세력이었을까. 가야금을 어깨에 메고 가야 전사들의 대오에서 국원으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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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리 석조예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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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니면 원평리에 있는 신라 욕돌역 추정 옛 절터의 석조불상과 석탑
 



강수가 문무왕 앞에서 밝힌 ‘사량’은 아직 고고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요도천 북편 앞마을 이름이 ‘사락리’이다. 사락리와 사량은 음이 비슷하여 주목된다. 그런데 대단히 중요한 것은 문무왕이 668년 10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포로 7000명을 데리고 충주에 이르러 욕돌역(褥突驛)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는 사실이다. 욕돌역은 지금의 주덕 신니면 원평리로 추정되고 있다. 원평리에는 옛 절터가 남아 있으며 고려 초기 조성으로 보이는 석조입상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절터 주변에서는 신라시대 와편도 찾아지고 있다.

문무왕은 이 역에서 국원경 사신 대아찬 용정이 마련한 잔치에서 가야소년 능안(能晏)의 가야무를 보게 된다. 능안이 가야무를 잘 춰서인지 문무왕은 가까이 불러 금잔에 술을 담아 하사하고 폐백(幣帛)을 주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문무왕이 가야무를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몸속에 가야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을까. 문무왕의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동생이며 왕은 어린 시절 궁중에서 어머니로부터 가야무를 보고 자란지도 모른다.

‘사락리’ 마을은 용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앞마을이다. 부곡(釜谷. ‘金谷’과 한문이 비슷함)에 살았던 강수와 연인의 로맨스도 사락리라면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신라 육부의 하나였던 사량부 사람들은 성에서 떨어진 주덕 사락리에서 살았던 것인가. 진흥왕대 국원경으로 이주했던 사량리 가야 사람들은 이미 이주하여 살았던 임나가라에서 터전을 마련했는지 모른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확대된 조사를 해야 할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