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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힘찬 기상

중부내륙까지


고구려와당 특색과
남한지역 출토 유물에 관하여


이재준 역사연구가, 칼럼니스트



프롤로그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넓은 국토와 강대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원전 37년. 만주 지안(集安)에서 건국한 주몽은 당시 흩어진 압록강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북부여와 대제국인 한나라와 대항하였다. 고구려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는 압록, 두만, 흑룡강에 살고 있는 유목민족인 말갈(靺鞨)을 흡수, 군사들을 무장시켰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 기록이나 삼국사기에도 말갈은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고 돼 있다. 별종이란 이민족이 아닌 고구려 계라는 뜻이다.

오랜 유목생활에 길들여진 말갈족은 야성(野性)이 강했으며 전투를 좋아했다. 무구(武具)를 갖춘 말갈기병은 용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초기 고구려
기병은 약 1만 명에 달했으나 점차 수가 늘어 광개토대왕이 친히 남정할 때는 5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여러 곳을 진격하면서 위세를 보였다. 이 시기 북방의 여러 나라와 남쪽의 백제, 신라는 숨을 죽이고 고구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만주 지안 시기 고구려는 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왕도 지안 국내성(國內城)을 대도시로 조영했다. 궁전과 사당 가옥과 고분을 축조하여 동아시아에
서 최대의 강국 면모를 갖추었다. 당시 건축물에 사용됐던 와전류(瓦塼類)는 삼국 중 가장 크고 방대한 양이며 수준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과 아들 장수왕 시기,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넘어 금강 깊숙이 내려왔으며 경상도 안동 심지어 경주, 가야 지역까지 내려왔
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경주 호우총(壺衧塚)에서 발굴된 청동제 ‘호우’의 명문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광개토왕의 하사품인가, 아니면 제사에 쓰
는 향로인가. 이 유물도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 세력은 남하하면서 여러 곳에 건축물을 조영했다. 군사시설인 성곽, 보루나 혹은 가람(伽藍)을 조영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고구려 유적에 대
한 관심과 조사로 남한 지역 유적에서는 다수의 고구려 유지가 찾아졌으며 여기에서 과거 만주나 평양지역에서만 찾아지던 와당(瓦當)이 발견됐다.

70년대 말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절터에서 전 단국대박물관 정영호 박사에 의해 적색의 고구려 와당(도판 1~2)이 찾아져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
와당은 당시 백제계니 신라계니 하여 논쟁이 되었지만 최근 필자에 의해 만주 지안에서 동형의 와당이 확인(도판 3 참고. 서울 박성수 소장)되면서
당시 정 박사의 혜안을 가늠하게 되었다. 이 와당이 발견된 주변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국보 제205호)가 발견됐으며 인근의 사적 제100호 장
미산성은 고구려 식으로 확인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충주 고구려비는 충주시 가금면(可金面) 용전리(龍田里) 입석(立石)부락 입구에 있으며, 크기는 높이가 2.03m, 너비가 0.55m이다. 1979년 4월에 충주의 문화재 애호가 모임인 예성동호회가 입석(立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제보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高句麗)의 비(碑)이다.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은 충주 고구려비 건립 단계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을 알려주어 당시 양국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후 고구려 구토인 한강변과 한탄강에 산재한 여러 곳의 성지에서는 잇달아 와당 출토가 있었다. 남한지역에서의 고구려 와당의 출현은 매우 흥분되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구도인 지안 국내성과 평양지역이 마음대로 갈수 없는 땅이기에 더 그렇다.

   
고구려 와당의 특색


고구려 와당은 초기 수도 ‘지안’ 국내성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경작으로 소량 수습되던 고구려 와당은 도시개발 과정에서 상당한 양이 출토되어
민간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이 와당이 한국으로 반입됐으며 현재 많은 종류가 조사되고 있다.

박성수(컬렉터. 서울 은평구 불광동 거주) 씨는 이 시기 많은 양의 와당을 수장하였으며, 이 가운데 불교 전래 이전에 만들어진 와당들이 주목되고 있다. 반신반조(半身半鳥. 도판 4), 와문(蛙紋. 도판5), 삼족오(三足烏. 도판6), 권운문(卷雲紋. 도판7), 인면문(人面紋. 도판 8), 임부문(姙婦紋. 도판
9), 쌍염유어문(雙冉遺魚紋. 도판10) 등이 그것이다. 반신반조와 쌍염유어문은 중국 고대의 박물지인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을 수 있는 상상의 동물
이라서 매우 주목된다.

다산신앙을 보여주는 임부문 등은 모두 불교 이전의 민간신앙을 가늠할 수 있는 진귀한 것들이다. (도판 참고)이 ‘임부문’은 평양성 고구려 왕경 유
적에서 수습되어 북한유물 서울 나들이 전시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상상의 동물이며 고구려 상징으로 회자되는 삼족오 와당이다. 삼족오는 다리가 세 개인 새로 평양 중화군 진파리 고분에서 출토, 고구려 금제관식(金製冠飾)에 나오는 것이 유일하다. 설화에 등장하는 삼족오는 태양에 사는 새다. 왜 고구려인들이 태양에 산다는 새를 기와에 새겨 건축물의 마구리를 덮은 것일까.

고구려 건국 설화를 보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주몽을 낳아 나라를 건국했다고 돼 있다. 주몽은 스스로 천제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광개토대왕
비에도 이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그들은 기와에 삼족오를 새겨 넣어 천제가 거처하는 궁전임을 긍지로 삼은 것은 아닐까.

불교 전래 이후 와당은 대개 연화문(蓮花紋. 도판 11)과 귀면(鬼面. 도판 12),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 도판13), 불상문(佛像紋. 도판14~15)으로 발전한다. 고구려의 불교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명으로 순도(順道)가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가져왔고, 374년 동진의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와 불법을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391) 때는 영(令)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하였으며 광개토대왕 때인 392년에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조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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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9. 임부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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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6. 삼족오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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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4. (반신반조)뇌신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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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6. 장락사지 출토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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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9-1. 괴산문광사지 출토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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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0. 괴산도원리 사지 출토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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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1. 괴산 도원리 사지 출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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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연꽃 문양 수막새는 막새 면을 선각으로 6내지 8구획으로 나누어 연꽃잎을 각각 장식했다. 반구형(半球形)의 돌기된 자방(子房)을 배치한 단
판 양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6세기 중반부터는 보상화, 인동, 귀면 등의 새로운 시문 단위가 채용됨과 동시에 연꽃 문양도 단판 이외에 세판,
중판, 혼판 등의 여러 양식들이 나타나 다채롭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성수 씨가 소장한 귀면을 보면 여러 종류로 나타나며 시기별로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귀면은 흡사 사람의 모양이다(도판 참고). 그러나
이것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모습은 보다 험악해지고 정제된다. 고구려 귀면은 중국 귀면과 비교된다. 해학적인 중국의 귀면에 비해 더욱 사실적이
며 힘찬 모습이다. 전 이화여대 박물관장 고미술학자 강우방 교수는 귀면을 용면(龍面)으로 해석했으며 그 편년을 새롭게 연구하여 주목되고 있다.


적색을 좋아한 고구려인들

고구려 와당은 대개 적(赤) 색깔을 띠고 있다. 왜 그들이 적색을 좋아한 것일까. 적색은 화마(火魔)와 사악(邪惡)함을 쫓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
다. 또 웅장한 것을 숭상한 고구려인들이 궁전을 화사하게 꾸미기 위해 적색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적색의 기와는 소성도(燒成度)를 낮게 하여 만들면 되지만 검게 구워진 기와에는 붉은 색을 칠해 사용했다. 출토된 고구려 기와 가운데는 모래가 많이 섞인 적색을 띤 것이 많지만 일부 기와에 주칠(朱漆)을 한 것이 확인된다. 이는 평양에서 발견된 일부 고구려 벽화에서도 찾아진다.

당초 지안의 고구려 왕성은 붉은색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도시였을게다.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와당


74년쯤 충주시 탑평리 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을 시발로 장락사지(長樂寺址. 충북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에서도 고구려 와당(도판 16)이 출토된 사례가 있다. 그리고 한강유역 아차산 홍련봉 보루 발굴에서도 늦은 시기의 연화문와당(도판17)이 찾아져 시선을 모았다. 이어 연천 임진강변 호로고루 성터(사적 467호)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적색와당(도판 18)이 찾아졌다.

탑평리 출토 와당(도판 참고)은 6엽의 연판을 사용하였으며 대개 8엽을 사용한 백제 와당과 비교된다. 연판은 후육(厚肉)하고 끝은 반전(反轉)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큰 자방이 돌기되어 있다. 주연(周緣)은 소문대로 삼국시대 와당의 전형을 보여준다. 만주 지안 국내성 왕궁터에서 찾아진 와당(도판참고)은 이 와당보다 작은 형태이나 연판과 자방 등 모양이 너무 흡사하여 탑평리 와당의 국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홍련봉 출토 와당(도판참고)은 각진 형태의 연판문을 보여주고 있으며 연판은 또 선조(線條)로 구획하여 평양 출토 와당의 유행을 따르고 있다. 4
엽의 주연판문 사이로 뾰족한 4엽의 간판(間瓣)을 배치하여 비교적 날카로운 인상이다. 이 같은 형식의 고구려 와당이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도판 19 참고) 임진강변 호로고루 성터에서 찾아진 와당(도판참고)은 6엽의 연판을 돌기시켰으며 사이에 세모꼴의 간판을 배치한 전형적인 고구려 적색 와당이다. 주연부는 결실되었으나 소문대여을 것으로 보이며 이 와당으로 호로고루성의 건축물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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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9.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고구려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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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7.
서울 아치산 홍련봉 출토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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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8.
호로고로 성터에서 발굴된 적색의 와당
 



괴산 출토 고구려계 와당


충북 괴산군은 고구려 시기 잉근내(仍斤乃)라고 불렸다. 국원(충주지역)을 장악한 고구려가 남진을 계속하면서 속리산과 접경인 괴산군 일대를 확
보한 것으로 보인다. 위기를 느낀 신라는 상주를 넘어 청천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조우하게 된다(494년. 백제 동성왕 16년. 신라 소지 마립간
16년. 고구려 문자명왕 3년). 그런데 신라는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신라의 구원 요청에 백제 동성왕이 3천 군사를 파견하자 고구려가 견아성 포위를 풀었기 때문이다.


괴산군은 신라 진흥왕의 충주 점령 시기 이전 약 140년간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진흥왕은 고구려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다시 견아성을 넘어 괴산
지역을 공격한 것 같으며 결국 괴산 일대의 영토를 자국에 편입하기에 이른다. 7세기 들어 빼앗긴 남방의 영토 회복을 염원한 고구려는 군사를 동원, 한강 유역 탈환 전쟁을 벌인다. 이 시기 영양왕의 사위 온달은 ‘계립령 이서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비장한 의지로 출전했다. 온달의 고구려 군은 아차성에서 전사했으며 고구려의 구토회복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괴산군 문광면사지와 청천면 무릉도원리 옛 사지에서도 고구려 양식을 닮은 와당(도판 19-1)이 출토돼 주목되었다. 문광면 사지 출토 와당은 청색계통으로 주연(周緣)을 상실하였으나 삼국기 와당에 나타나는 무늬 없는 것으로 보이며, 연판을 선조(線條)로 구획하여 판단을 뾰족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청천 도원리 사지 출토 와당(도판 20~21 참고)은 뾰족한 기하학적무늬를 중첩으로 배치한 이형의 와당으로 연판은 고구려 식이다. 그러나 주연을 연주문대(聯珠紋帶)로 돌려 시기는 통일신라계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이 일대는 고구려 세력이 오래 잔존했던 것으로 나라가 멸망했어도 그 미(美)의식이 그대로 계승 반영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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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고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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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 탑평리 출토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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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2. 탑평리 출토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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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3. 지안 출토 고구려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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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5. 와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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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7. 권운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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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8. 인면문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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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0. 염유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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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1. 고구려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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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2. 괴면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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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3. 인동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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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4. 불상문 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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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5. 불상문 와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