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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청양 칠갑산

왕도 부여 진산 칠악사. 복국운동 거점 주류성인가
보물창고인 장곡사,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뤄져야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전 충북도문화재 위원 사진 박선혜 사진제공 청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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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호 출렁다리 2009년 만들어진 청양의 명물이다. 총 길이 20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다. 다리 한가운데 청양의 특산물
구기자와 고추를 형상화한 높이 16m의 주탑이 있다.
 



청양 칠갑산(높이 561m)은 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그 웅장한 산세와 청정함이 한국의 명산 가운데 으뜸의 반열이다. 왜 칠갑이란 이름으로 불려온 것일까. 만물생성의 근원인 칠(七-月火水木金土日)과 새싹을 상징한다는 갑(甲)이 어울려 칠갑산이 됐다는 풍수설과 일곱 장수가 나올 것이라 하여 칠갑이란 이름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백제의 진산, 충청도 정한(情恨) 물씬


칠갑산은 백제시대 왕성 사비의 정북방으로 진산(鎭山)을 삼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주병선의 유명한 대중가요 ‘칠갑산’이 먼저 와 닿는다. 순박한 농민의 정한이 충청도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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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성에서 바라 본 청양 시내 전경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청양군 정산 땅은 청양의 관문이며 백제 때는 두량윤성(豆良尹城)이라고 불렸다. 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정산현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칠갑산은 현 서쪽 16리에 있으며 옛성의 터가 있는데 자비성이라 부른다(산천조). 고성(古城)이 칠갑산에 있는데 본래는 도솔성·자비성이었다(성지조).’

두솔성은 도솔성의 이음(異音)이며 ‘도솔’은 ‘도솔천’에서 나온 말로 도솔천은 불교의 이상 세계를 말하는 것인가.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매우 주목되는 것이 있다.


‘법왕 원년(599) 겨울 12월에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 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법왕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중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큰 가뭄이 들어 왕이 칠악사(漆岳寺)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다. 여름 5월에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법(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칠악사란 어느 산을 가리키는 것일까. 칠악사가 바로 칠갑산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청의 ‘칠악사를 찾아서’라는 글을 보면 ‘칠악의 칠(漆)자가 강희자전에 칠(七)자와 같은 자로 나오고, 악(岳)자 또한 처음 시(始)자와 같은 자로서 처음의 뜻이 있는 갑(甲)자와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칠갑산은 왕성 사비도성의 북(玄武) 자리로 이 일대 산 중에는 으뜸이면서 왕이 순행하기에도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칠갑산은 백제의 최후 왕성 주류성인가

660년 백제 수도 부여와 공주가 나당연합군에게 점령당한 후 유민들은 극렬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여러 성에 모여 일본에 가 있던 부여 풍(豊)을 귀국시키고 백제 회복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당시 가장 중심에 선 곳이 바로 주류성(周留城), 임존성(任存城)이었다. 주류성은 풍왕을 중심으로 한 백제 복국군들의 최고 항전지이며 이성이 함락됨으로써 복국의 의지를 접게 되는 역사의 주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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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칠갑산의 산세
 





임존성은 지금의 예산 대흥으로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만 주류성은 비정되는 곳이 많아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충남 서천 한산(이병도 설), 전북 부안(전영래설), 홍성설, 연기설, 청양 칠갑산설 등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조에 백제 복국운동의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 3년(663) 5월 백제의 옛 장수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세우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인궤(仁軌)에게 검교(檢校)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로 삼은 조칙(詔勅)을 내려 이전의 도독(都督)을 맡았던 왕문도(王文度)의 무리와 우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싸울 때마다 진영을 허물어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음이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이미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으며, 배반하고 도망한 자들도 불러서 세력이 자못 늘어났다. 인궤는 유인원과 함께 합쳐서 잠시 갑옷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바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조칙을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보내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金庾信) 등 28명의 장군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 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는데,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서 전투의 공을 따져 상을 차별하여 주고 크게 죄수를 풀어주었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 있는 당 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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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우산성에 있는 팔각정(청룡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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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에서 바라본 청룡정
 




일본서기 기록에도 주류성은 산간의 험지

일본서기 천지(天智) 원년조에 ‘주유(州柔)는 험지에 있고 장기간 주둔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좋은 지형이나 복신은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청양 칠갑산을 주류성으로 비정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기록이다.

칠갑산은 산이 중첩된 험지로 방어하기엔 좋은 곳이나 수도로 삼기에는 적합하지가 않다, 그래서 풍왕은 중신들과 상의하여 피성으로 일시 이도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피성은 평지이긴 하나 적 신라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칠갑산을 주류성으로 본다면 피성은 어느 곳으로 상정될까. 필자는 칠갑산과 가까운 청양읍내에 있는 백제 치소 ‘우산성(237m)’이 아닐까 상정해 본다. 우산(牛山)은 ‘비산(雨山)’으로 읽을 수도 있어 된 발음으로 ‘피성’이라고 불릴 수 있다.

청양읍내에 자리 잡은 우산성은 지천이 자연적 해자(垓字)를 이루며 그 규모가 웅장하고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난중의 임시수도가 될 만한 곳이다. 특히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 토기편과 와편이 산란한다. 풍왕은 일시로 피성으로 옮겼지만 강한 나당연합군에게 정복당할 우려가 있어 다시 주류성으로 회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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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성 정상에는 백제시대 석축산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일부 국문학자들은 주류성의 음운변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즉 주류성→두류성→두루성→두솔성→도솔성의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두솔성의 솔(率)자는 발음이 ‘율’ 내지 ‘루’로도 읽힌다는 사실이다. 즉 최초 두솔성은 두루성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 한자 발음을 솔로 읽어 두솔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국문학자 지헌영 박사는 한 논문에서 주(周)를 우리말 두루, 두류로 해석하며 청양 정산의 두량윤성을 주목한바 있다. 두솔 혹은 두류로 불리었던 것이 한자로 기록되면서 주류성이 된 것으로 필자는 본다.

청양 칠갑산과 매우 가까운 부여군 은산면 별신당에는 도침과 복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별신제 설화에는 백제 유장 복신(福信)이 등장한다. 이는 두솔성이 복신과 풍왕의 근거지였던 마지막 3년 왕도 주류성임을 뒷받침하는 일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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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성에 남아 있는 백제시대 성벽
 



두솔성 안에 있는 폐사 도림사지

칠갑산 두솔성 안에는 도림사지(道林寺址)가 있다. 도림이란 이름은 불가의 이상세계인 ‘도리천(忉利天)’에서 나온 것일 게다. 절터는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사면의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고려시대에 조성된 3층 석탑이 현존하고 있으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사찰의 창건연대를 두고 백제시대와 고려시대 창건설로 나뉘고 있다.

도림사지는 1996년 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됐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산현 불우조(定山縣 佛于條)에 ‘도림묘봉사 구칠토갑산(道林妙峯寺 俱在七甲山)’이라 하여 조선 전기까지도 칠갑산에 장곡사를 비롯한 도림사, 묘봉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림사지는 조선 중기까지 향화를 이어오다가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73년 지표조사에서 ‘도림(道林)’이란 명문 기와를 수습하여 이곳이 도림사임이 확인되었다. 절터 여러 곳에서 산란하는 기와편 가운데는 백제 것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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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청사남도 청양군 대치면(大峙面) 칠갑산(七甲山)에 있는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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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사미륵불괘불탱(長谷寺彌勒佛掛佛幀) 국보 제300호.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
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일곱 개의 명당 세계문화유산 장곡사

칠갑산의 자랑 고찰 장곡사(長谷寺)는 일곱 개의 명당이 숨어 있다는 칠갑산과 지천구곡이 감싸 안는 곳에 자리한다. 두 개의 국보, 네 개의 보물을 간직한 사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도 손색이 없다. 왜 통일신라 칠갑산에 이처럼 훌륭한 도량이 세워진 것일까. 백제 멸망과 전사들의 한을 위무하듯 부처의 얼굴에선 자비가 넘친다.

장곡사(長谷寺)는 850년(문성왕 12)에 보조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대웅전이 2개 있는 특이한 가람이다.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上大雄殿)은 마루를 8판 연화문 전돌을 사용했으며,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4호)을 안치하고 있다. 보물 제181호인 하대웅전(下大雄殿)에는 고려 시대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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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사 대웅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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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갑산 거북이 예로부터 거북이는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의 동물로 널리 그려지고 있으며,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이 지혜로 연결돼 지혜로운 동물로도 여겨진다. 또한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특성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연결하는 신의 사자로 인식되는가 하면, 재물과 복을 갖게 하는 영물로 상징돼 왔다.
 




칠갑산 거북이의 전설

‘옛날 백제시대 이 지역에 어느 선비가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곧고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이른 나이에 관직에 올라 인정을 베풀어 주위의 덕망을 한 몸에 받았다. 부러울 데가 없어 보이는 그에게도 한 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집안 대대로 명석하여 일찍
이 벼슬길에 오른 이들이 한 결 같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등져 그도 응당 그리될 것이라는 불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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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화 청양군수
 




어느 날 선비는 평소 소나무 향이 좋고 산세가 좋아 자주 넘나들던 칠갑산에 오르던 중 잠시 잠에 들었다. 꿈에 그의 몸집보다 큰 거북이 한 마리가 앞에 나타나 두 개의 큰 알을 낳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장수(長壽)의 상징인 거북이의 알 낳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여 “삼천세(三千歲) 수명의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거북이가 장수(長壽)하는 것이 부럽다”고 말하니 거북이가 말하기를 “저의 삼천세(三千歲) 수명을 주인님께 드리옵니다.”라고 말하고는 그를 등에 태웠다.’

잠시 후 잠에서 깬 선비는 꿈이 생시와 같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가 마치 알을 낳는 거북이의 형상과 같아 깜짝 놀랐다. 기이한 일이라 여긴 선비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정성스레 본인과 가족의 무병장수를 빌었고 그 덕분인지 그의 자식들 또한 고위관직에 올랐으며 선비도 오래 오래 장수(長壽)하며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갑산 황금 복(福)거북이 조형물이 세워진 이곳은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는 영구포란형(靈龜抱卵形)의 지세(地勢)로 불리고 있고, 2002년 4월과 2013년 7월에는 이 앞의 하천(지천)에서 황금자라가 발견돼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황금자라가 살고 있으니 복(福)이 들어 올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예로부터 황금자라는 신성하고 복(福)을 불러주는 동물로 알려져 왔다. 현재 2013년에 발견한 황금자라는 충청남도 내수면 시험장에 보존되어 있으며 황우석 박사를 통한 복제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청양 전통문화 발굴에 앞장서는 이석화 청양군수

이석화 청양군수의 칠갑산 명소화 의지와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은 남다르다. 청양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관광매력 요소를 제공하기 위해 칠갑산을 중심으로 장곡사 등 천년의 백제시대 유적과 개발 중인 천장호와 칠갑호 등 관광자원을 벨트화하기 위한 작업을 한창 진행 중에 있다.

또한 이 군수는 최근 대치면 주정리 노인회관 건물을 주목, 고건축 전문교수를 초빙해 지역의 원로들과 함께 노인회관 내 목부재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 군수는 “관련 고문헌과 고지도 등 사료를 통해 심도 있는 고증 작업을 추진할 것”이라며 “청양읍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구도심 활성화와 문화적 존재 가치를 불어 넣는 아주 중요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