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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악성 우륵 유적

민족의 정한 토해내는 청아한 가야음


진흥왕 하림궁, 탑평리 사지 추정 우륵 탄금대 남아

1500년 충주 가야금 유적 세계문화유산 지정 돼야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전 충북도문화재 위원 사진 박선혜 사진제공 충주시청



01.jpg탄금대와 충주
 




천 수백 년 청아한 소리를 토해내는 가야금. 민족의 슬픔과 정한을 고이 간직한 신비의 선율이며 가야의 혼이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가야왕 가실(嘉實)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 ‘가얏고’라고도 불린다. 재료는 오동나무이며 12개 현은 질긴 명주실을 쓴다.


전통적인 가야금은 풍류가야금(일명 법금:法琴)이라 했다. 금의 끝부분이 양의 귀 같이 삐죽 나와 있다고 하여 양이두(羊耳頭)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 백제의 유적에서 출토된 고대 가야금의 모양도 모두 양이두다. 민속악에 사용하는 산조가야금의 끝부분은 새의 꼬리처럼 생겨 봉미(鳳尾)라고 불려왔다.




가야금은 신라 진흥왕대 악사 우륵(于勒)에 의해 가치를 찾는다. 그 역사적 장소가 바로 옛 신라 중원경(中原京) 충주 땅. 가야인 우륵은 어떻게 중원경에 살았으며 그는 누구를 만나 가야금을 중흥시킨 것일까.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보면 우륵은 왕이 새로 개척 한 국원 땅(中原)을 순행할 당시(6세기 중반)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진흥왕은 낭성(琅城)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잘 탄다는 소리를 듣고 즉시 우륵을 궁으로 불렀다. 우륵은 임시로 마련 된 가궁 하림궁(河臨宮) 어전에서 가야금을 뜯었다. 가야금 소리를 들었던 진흥왕은 감동했다. 슬프면서도 경쾌하고 빠르면서도 차분한 소리에 왕은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 신하들이 가야금은 망국의 소리라고 하여 장려할 것이 못된다고 간언했다. 그러나 진흥왕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아름답고 슬픈 음악이다. 진중의 피로를 모두 씻을 수 있었다.”

진흥왕은 우륵을 중원에 살도록 하고 그에게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우륵은 진흥왕의 비호를 받고 제자 이문 등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하필 12곡인가. 우륵은 자신의 고국 가야를 그리워하여 그 안에 망향의 슬픔을 간직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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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당전경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勿) ▲하기물(下奇勿)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등이며, 이들 곡이름은 대부분 당시의 군·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우륵은 중원에서 살면서 진흥왕의 비호를 받았다. 예술가에 대한 특전이었다. 그는 대내마(大奈麻) 계고(階古)와 법지(法知) 그리고 대사(大舍) 만덕(萬德) 등 세 사람에게 각각 가야금은 물론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그 후 진흥왕에 의하여 가야금곡이 궁중음악이 되고, 하림조(河臨調)·눈죽조(嫩竹調)의 2조(調)가 생겨 모두 185곡의 가야금곡이 남게 되었다.

낭성에 살았던 가야 사람 우륵

우륵은 중원경 어디에서 살다 진흥왕의 부름을 받은 것일까. 그는 처음 낙동강변에서 이주해 온 가야집단에 묻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충주에서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고 신라인들을 이주시켰다. 조령 하늘재를 넘으면 바로 한강으로 통할 수 있는 이 지역은 신라의 북방공략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요충이었다.

그러면 가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곳은 어디였을까. 필자는 문무왕대 가야인 강수와 대장장이 딸의 러브스토리가 어린 사량부 부곡, 지금의 주덕(周德) 금곡(金谷)이 아니었을까 상정해 본다. 당시 가야인들은 철기를 잘 다루는 대장장이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최일선에서 신라군과 가야군의 무구 조달을 담당했을 게다.

주덕 금곡은 살미면의 인근지역으로 ‘살미’를 ‘낭성’으로 비정하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주덕은 훗날 고려시기 다인철소(多仁鐵所)라고 하여 많은 제철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지금도 주덕지역의 밭을 답사하면 많은 슬러지들을 찾을 수 있다.

훗날 고구려를 정복하고 왕경으로 귀환했던 문무왕도 가야세력이 살던 중원경 욕돌역(褥突驛)에서 하루를 유숙한다. 이때 중원경 사신 용장(龍長)이 가야무동을 시켜 왕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게 했다. 이 위로연에서 빼 놓을 수 없었던 것이 가야금이었을 게다. 문무왕은 가야무동의 춤과 노래를 듣고 감흥에 젖어 술과 고기를 하사하기도 했다.

문무왕이 묵었던 욕돌력은 지금 어디일까. 일부 학자들은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 옛 유적을 역지(驛址)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 지역은 육로로 이천과 한양을 가기 위한 첩경으로 옛날에도 매우 중요한 역원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진흥왕의 하림궁은 어디인가

진흥왕이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탄주했던 하림궁. 강에 임했던 가궁은 어디일까. 전 충청대학 장준식 교수는 논문을 통해 하림궁의 위치를 지금의 가금면 탑평리 사지로 비정했다. 진흥왕 시기 고구려 세력이 살고 있던 이 지역에서는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고 절터에서는 고구려 계와 진흥왕 시기의 연화문막새가 많이 출토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변에 있는 삼국기 통일신라시기 고분군은 이곳이 당시 치소(治所)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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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
 





절터는 바로 남한강 변에 임하여 있으며 진흥왕은 이곳에서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탄주케 했다는 설이 매우 타당하다. 신라통일 시대 이곳 절에는 가장 웅장한 7층 석탑을 조영하여 위용을 과시했다. 일설에는 중원에 왕기가 서려 그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탑을 조영했다는 속설이 전한다.

또 하나 하림궁의 위치로 비정되는 것은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彈琴臺)다. 탄금대는 우륵이 살던 곳으로 전해 내려오며 정상에는 토성이 존재해 있다. 토성은 탄금대의 동북쪽 가장 높은 지점에 판축 기법으로 축조돼 있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탄금대 토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불규칙한 타원형이라고 돼 있다. 동서 길이 150m, 남북 너비 100m 정도의 작은 성이다. 전체 둘레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는 남한강변의 북쪽 절벽지대를 포함하
여 약 415~420m로 조사됐다.

2002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에서 토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무문토기를 비롯한 돌칼·돌도끼 등의 선사시대 유물은 물론 백제 토기편들을 다량으로 확인했다. 특히 이곳에서는 주거지에서 용해로 또는 단야로와 관련된 송풍관편과 슬래그 등이 함께 수습되어 공방시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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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일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토기 파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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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정
 




이곳에서 40여 점에 이르는 철정(鐵鋌)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학술보고서는 신라 고구려계의 토기는 수습하지 못했다고 돼 있다. 가야인들이 거처하던 곳이었으므로 가야토기의 편린은 찾지 못했던 것인가.

탄금대 주변의 우륵의 설화

금휴포(琴休浦)는 탄금대 아래의 나루터를 가리키며 우륵이 제자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가 쉬던 곳이라고 한다. 가금면 창동리 창골은 탄금대 건너 마을로 우륵이 탄금하던 때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청금대(聽琴臺)라 불린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신입(申砬)장군의 군대가 왜적에게 크게 패한 뼈아픈 전적지이기도 하다. 신입은 부하 장수들이 계립령과 조령에 진을 치고 왜적을 막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일대 일로 맞서는 승부수를 택한다. 그는 평원에서 야인들과 접전하여 용맹을 떨친 전과가 있었으므로 이런 작전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전진에 수 백 마리 황소들의 뿔에 관솔불을 붙여 조선군을 공격했다. 신입의 군사들은 돌진해 오는 황소들을 막을 방법이 없어 그만 진지가 무너지고 궤멸했다. 일본군의 조총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참패한 것이다. 신입은 탄금대로 올라가 북향재배하고 절벽에서 떨어져 자결하고만 것이다.

탄금대 주변의 국악운동

45년 역사를 지닌 우륵문화제는 전국 6대 명품 문화제 반열에 올라있다. 특이한 것은 악성 우륵 외에도 신라명필 김생, 대문장가 강수, 북벌의 효장 임경업 장군, 신입 장군 등 다섯 명현의 얼과 뜻을 기린다는 점이다.



1971년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충주지부 설립과 함께 처음 제1회 우륵문화제(제1회 때의 명칭은 우륵예술제)가 열렸으며 매년 9월경 개최되고 있다. 행사 내용은 향토 음악회,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명현 추모제 우륵문화제 성공기원제, 거리시화전, 향토음식 경연대회 등이며 불꽃놀이, 음악, 무용, 국악 공연, 전통혼례, 풍물놀이도 열린다. 고려 몽골침입 때 충주성에서 관노를 데리고 이를 격퇴한 김윤후 장군 추모제도 열린다.

충주의 국악운동은 (사)한국국악협회 충주지부가 열정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1973년에 설립된 국악협회 충주지부는 목계별신제, 우륵문화제, 충주세계무술축제 등 지역행사에 적극 참여해 왔으며, 찾아가는 문화활동 지원사업 공연 등 재능기부에도 힘쓰고 있다.

충주시립우륵국악단(忠州市立于勒國樂團) 활동도 두드러진다. 1988년 2월 28일 충주시립가야금연주단으로 창단됐으며 현재 지휘자 1명, 단무장 1명 수석상임단원 5명, 상임단원 24명, 비상임 단원 10명이 활동하고 있다. 단장은 부시장이 맡고 지휘자 조원행과 상임단원 30명, 비상임 10명 등 충주시립우륵국악단은 총 41명으로 구성되었다.

2002년경에는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지는 퓨전 음악의 장르가 연주되기도 했다. 또 충주시의 지원으로 안정된 연습실과 공연장인 우륵당이 확보되면서 상임 단원이 31명까지 이르게 되었다.

매년 정통 및 퓨전 국악 등 시민 중심 정기연주회 2회, 충주시민 자긍심 고취 특별기획 연주회 2회, 문화사각지대 해소 공연 4회, 도민순회공연 및 행사공연 30회, 분기별 상설공연 8회 등 연간 50~60회 공연을 하고 있으며, 2008년 5월에는 뉴욕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또한 문화교실을 운영해 국악 보급 운동에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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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지정의 꿈

얼마 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위원회는 세계 5개국의 줄다리기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한국의 대표적 줄다리기는 목계별신제다. 목계줄다리기는 지름 1.5m, 무게 10t, 길이 150m의 대형 줄을 수백 명의 참가자가 함께 당기고 즐기는 대표 대동놀이다.

충주시 엄정면 목계마을은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마을이 성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가흥창(嘉興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흥창은 조선시대 조창(租倉)으로 세조연간에 설치되어 근세 개항 전까지 존속했다. 가흥창에 수납된 세곡은 남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 용산창까지 운송되었다.

별신제는 마을과 한강조운의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제로 보통 3~4년을 주기로 사월초파일을 전후한 2~3일 동안 영신굿-오신굿-송신굿 순으로 굿판을 벌였다.

‘2015 목계별신제’는 지난해 4월 24~25일까지 2일간 엄정면 목계리 일원에서 열렸다. 첫날에는 민속놀이 한마당과 댓목 시연, 향토가요제가 열렸으며 그 이튿날엔 별신굿과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동·서편 줄다리기를 비롯해 목계뱃소리 시연, 전국줄다리기대회 등이 펼쳐졌다.

목계줄다리기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힘입어 악성 우륵유적에 대한 지정이 지역의 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충주에는 우륵과 관련 있는 하림궁추정의 탑평리 사지, 충주 고구려비, 장미산성, 누암리 고분군과 우륵이 제자들과 탄주하며 살았던 탄금대 유적 토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충주유적이 충분한 역사성과 연면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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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별신제
 



조길형 충주시장 인터뷰
중원문화 전통잇는 한국의 중심도시로 육성



08.jpg조길형 충주시장은 “충주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이어온 중원문화의 중심이며 중원(中原)이라는 옛 지명처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는 데 시정의 최우선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조 시장은 또 “충주지역은 충북의 어느 도시보다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며 “국보 제205호 충주고구려비, 국보 제6호인 탑평리7층석탑과 탄금대 토성과 연계된 우륵 유적의 세계문화유산지정 추진에 적극동의하면서 행정력을 집중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최근 ‘중원문화권 관광정책위원회’를 구성, 위촉장을 수여하고 본격적인 문화시정 운영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충주부시장을 위원장으로 관광 관련 학계를 비롯해 도·시의원, 관광공사 및 연구원, 중앙언론사, 여행전문업체 등의 대표 등 모두 19명으로 구성됐으며, 시와 중원문화체육관광진흥재단이 함께 관리 운영하게 된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넘쳐나는 중국 요우커의 충주지역 유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원은 명칭부터 중국의 대명사격으로 주변에 많은 역사유적과 관광자원이 많아 요우커들이 선호할 곳이라는 것. 특히 조 시장은 “충주에는 우륵문화제와 국악협회, 국악단을 위시한 각급 학교의 국악 열풍이 어느 곳보다 대단하다”며 “국악의 성지다운 시책도 아울러 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유치, 관광시설 유치, 농가소득 향상이라는 시정 3대 핵심 과제를 착실히 수행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도 지속적으로 확충하겠다”고 덧붙였다.

조 시장은 평소 외유내강하며 업무를 착실하게 추진하는 성실파다. 시 산하 공무원들의 창의적 업무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자 ‘자신을 이용하라’고 할 정도로 열정적인 자세를 주문하기도 했다. 조 시장의 친화력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외지인을 맞이할 때는 22만 충주시민이 함께하는 친절운동도 펼치고 있어 충주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