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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궁 만월대 출토 ‘고려 금속활자’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한 세기 앞서


“남북 공동 발굴조사 통해 얻은 첫 성과”

글 박선혜 사진제공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지난 2015년 11월 14일, 고려의 정궁이 있었던 개성 만월대에서 금속활자 1점이 발견됐다. 고려 금속활자가 확실하다면 이는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한 세기 앞선 활자다. 그래서 고려 금속활자의 발견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가치가 크며, 금속활자 자체만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쉽지 않은 남북 교류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이번 발굴조사는 시작부터 그 의미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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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통일 왕조’ 고려 500년의 역사가 묻힌 곳

북한 개성 송악산(489m) 남쪽 기슭에 있는 개성 만월대는 500년간 통일 왕조를 이룩한 고려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다. 태조 왕건은 나라를 세운 이듬해인 919년에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의 고려 정궁(正宮) 만월대(滿月臺)를 세웠다.

만월대는 약 38만 평(125만㎡) 규모로 50만 평에 달하는 황성 옛터에 자리했으며, 이 중에서 왕이 머물렀던 궁성은 약 12만 평(39만㎡)을 차지했다. 만월대의 대문인 신봉문 뒤로 창합문이, 그 뒤로 33개 돌계단을 오르면 회경전·장화전·원덕전이 줄지어 나란히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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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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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터에 남은 고려 왕궁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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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만월대 궁내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는데, 회경문은 2층 정문에 좌우로 솟을대문(좌우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올려세운 대문으로, 권위를 상징함)을 뒀고, 왕은 창합문 마당에서 올리는 조서(詔書)를 회경전에서 받았다고 한다. 왕의 권위가 그만큼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

만월대는 1361년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에 의해 모두 불에 타 없어졌으나, 8.15 광복 후 북한의 복구·정비로 현재(터와 돌 구조물, 4좌 돌계단)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2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다.

가장 오래된 ‘고려 금속활자’의 발견

개성 만월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개성 역사 유적 지구’에 속해 있다. 만월대에 대한 제7차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지난해 11월 30일 종료됐다. 우리나라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발굴단이 공동으로 수행한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발굴조사’는 민관 협력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남북 공동 발굴조사팀은 이번 7차 발굴조사를 통해 금속활자 1점을 추가로 발견하는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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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로 오르는 돌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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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에서 발굴된 유물 편을 맞추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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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터에 남은 고려 왕궁 유적
 



북한 개성에서의 금속활자 발견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956년에 북한이 6.25 전쟁 중 파괴된 개성 만월대 유적을 보수·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봉문 터 서쪽 300m 지점에서 금속활자 1점(方角頁 방각혈, 이마 전)을 발견했다. 이 금속활자는 현재 평양 조선중앙 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는 남북 공동 발굴조사 중에 ‘처음’ 나온 것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7차 발굴조사 대상 지역은 북측 고고학계에서 추가 조사 필요성을 제기한 근거에 따라 선정됐다.

사연인즉, 90년대 말에 북측 관계자가 만월대 지역 관리를 하다가 만월대 서쪽 지역에서 작은 금속편을 발견했는데 당시에는 금속활자와의 연관성에 주목하지 못하고, 만월대를 끼고 흐르는 광명천에 버린 사실이다.

남북 공동 발굴조사팀은 북측에서 1차로 찾은 발견 지점과 이러한 정황 등을 종합해 지난 2015년 6월 초부터 해당 지역 표토(겉흙) 아래 20~30㎝ 지점에서 파낸 흙을 채로 쳐서 유물들을 거르고 선별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조사팀은 11월 중순까지 발굴 작업을 벌여 바둑돌, 철갑옷 편, 금제 유물 편 등 작은 유물들을 다수 찾아냈지만 금속활자는 찾지 못했다. 그러다 조사 기간 막바지인 11월 14일 오전에 금속활자 1점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조사 기간 마지막까지 금속활자를 발굴하고자 했던 남북 공동 조사팀의 간절한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조사팀은 초기 보존처리와 실측 작업 등을 진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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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 현장
 




올해 진행된 발굴조사는 금속활자 1점 추가 발견이라는 성과도 거뒀지만, 조사 기간 6개월로 장기화하면서 남북 간 더욱 값진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7~2014년까지 진행된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는 짧은 조사 기간 등의 한계로 금속활자 발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발굴조사 기간 연장과 더불어 조사 인력도 증원돼 ‘금속활자 전담조사팀’도 꾸려졌다. 북측은 흙 체질과 유물 선별을, 남측은 굴착기 굴착과 출토 유물 선별 자문 등 지원 역할을 맡았다.

고려 금속활자의 가치… ‘공식 확인 단 2자뿐’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성과 브리핑 자료에 따르면 전문가 검토 결과,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는 여러 특징상 고려 활자로 확인됐다. 크기는 가로 1.36㎝, 세로 1.3㎝, 높이 0.6㎝이며 글자 면을 제외한 몸체의 두께는 0.16㎝이다. 사진상으로 ‘嫥(전일할 전)’의 형태와 유사해 보이는데, 우방 아래쪽의 자획이 ‘方(방)’ 자로도 보여 확실한 검토가 수행돼야 하는 상황이다.

또한 협의회는 시기의 하한(下限)을 만월대가 소실된 1361년 이전으로 설정, 향후 남북공동 연구를 심화할 계획이다.

현재 공식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 1자(方角頁 방각혈), 국립중앙박물관 1자(山+復 복)로 단 2자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것은 과거 발굴된 것보다 비교적 정교하고 매우 잘 쓴 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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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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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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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에서 발굴된 유물 편
 



협의회는 “서체는 1956년 만월대에서 출토된 활자와도 다르고, 증도가자와도 다르다”며 “증도가자나 직지는 불경 인쇄를 위해 사찰에서 만든 활자로 볼 수 있는데, 발굴된 활자는 국가가 주도해 만든 최고 수준의 활자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북측은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가 고려대장경체와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고려 금속활자는 세계 최고 구텐베르크 활자에 한 세기 앞서는 대단히 중요한 민족 유산으로서 이번 발굴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며 “개성 만월대에서 발굴조사 중에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은 유물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고려 활자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 주는 세계적인 민족유산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출토된 글자가 단 2자에 머물러 있어 연구 조사에 큰 한계였다.

협의회는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가 관련 학계의 활발한 연구로 활자 특징, 연대 등에 대한 부분이 규명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남북 공동 발굴조사는 2016년에도 추가 진행될 예정이다. 지속 조사로 금속활자를 추가 발굴하고, 북측 협력 만월대 발굴사업을 확대 발전시키면서 남북 간 ‘문화 통로’를 탄탄하게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