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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다카시마에 묻힌 진실’

방치된 조선인 희생자 공양탑(供養塔)

글 박선혜 사진 서경덕 교수 제공, 유튜브·MBC 무한도전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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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에 강제 동원된 어린 조선인 소년들이 좁은 갱도에서 벽을 긁어 쓴 글
 





역사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숨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그것 역시 ‘역사(歷史)’다. 역사는 사전적으로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으로 정의한다. 역사가 곧 사실인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1880.11.7~1936.2.21)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몰랐다면 알면 되고, 잊었다면 다시 기억하면 될 것이다.

일본에 강제로 주권을 침탈당했던 지난 근대한국사엔 많은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여전히 드러난 것보다 묻혀 있는 사실이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6월 일본은 섬의 모양이 마치 군함과 같아 ‘군함도’로도 불리는 하시마섬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인정받은 하시마섬이지만, 한국인에게 아픈 상처를 남긴 곳이다. 한국인이라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일본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부인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환호 속에 가려진 하시마 탄광의 진실은 무엇일까. 조선인 강제징용 그리고 탄광 강제노역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공양탑(供養塔)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사실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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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마 공양탑
 





하시마섬은 1940년대 일본 탄광도시로 호황을 누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정반대로 나뉜 삶이 공존했다. 섬의 호화아파트 고층부에는 일본인들이, 가장 낮은 어두운 지하와 저층부에는 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살았다.

또 지상학교 운동장에는 일본 소년들이 뛰어 놀고, 같은 시각 어두컴컴한 지하 1000m 해저 탄광에는 15~16세 조선인 소년들이 최고 기온 섭씨 45도의 갱도에서 허리도 펴지 못한 채 매일 매일 굶주림과 싸우며 석탄을 캐는 고된 작업을 했다. 어린 조선인 소년들은 좁은 갱도에 들어가기에 딱 맞았다.

어린 소년들은 안전모에 전구를 끼우고 끈을 달아서 배터리를 짊어지고 일을 했다. 그 장비를 합숙소 사무소에 갖다 줘야 식권을 받을 수 있었다. 작업 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식권을 주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해내야 했던 작업이 힘들어 목숨 걸고 탈출하고 싶어도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 있는 곳에서 탈출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탄광도시 하시마섬을 ‘지옥섬’ ‘감옥섬’이라고도 부른다.


위 내용은 지난 9월 12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편을 통해 전파를 탔다. 당시 방송에서 한국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방송인 하하는 일본의 하시마섬(군함도)과 다카시마 공양탑을 찾아갔다.

파도가 거세 입도할 수 있는 날을 손에 꼽는 하시마섬에는 두 번째 방문에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시마섬과 거리가 떨어진 다카시마는 나가사키 항구에서 30분여 간 배를 타고 들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 이곳 역시 과거에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가 탄광을 운영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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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교수와 하하가 여기 저기 둘러보고 찾아도 다카시마에 있다던 탄광 강제징용 조선인 희생자들의 공양탑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제작진과 스텝들이 우여곡절 끝에 주민에게 수소문해 위치를 파악, 잘 정돈된 일본인 공동묘지 옆으로 입구라 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발견했다.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들어가 수풀 사이를 헤쳐 길도 없는 곳을 발길 닿는 대로 한참을 따라 가니 공양탑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방송이 나간 후 서 교수는 네티즌들에게 많은 연락을 받았다. 대부분이 공양탑을 방문하고 싶다는 것.

서 교수는 “방송에 나왔던 것처럼 공양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허리를 90도로 꺾고 지나가야만 하는 좁은 길들로만 돼 있다”며 “주변 정리를 좀 한다면 충분히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서 교수는 유캔스타트와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알리고, 모아진 후원금으로는 공양탑 찾아가는 길 재정비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일본은 계속적으로 강제징용에 대한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등재를 위해 강제징용 사실을 알릴 정보센터 설립 등을 약속했는데 아직도 이행하고 있지 않다”며 “이러한 일본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방송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공양탑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묻혀 긴 세월을 외롭게 지내온 강제징용자 분들께도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길은 네티즌들의 후원 모금으로 지난 10월 중순에 재정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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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마 석탄박물관 입구 연표. 1939~1945년까지의 조선인 강제징용 내용이 없다
 




방치된 ‘공양탑’과 불태워진 ‘위패’

하시마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다카시마라는 곳에는 1998년 미쓰비시 광업 주식회사가 세운 ‘공양탑’이 있다. 탄광에서 사고로 죽은 노동자들을 위해 세운 무(無)연고자 묘지다.

서 교수에 따르면 하시마가 1974년 폐광하며 무인도가 되자 무연고자 유골을 이곳에 합치게 됐고, 1986년 다카시마도 폐광을 하게 되자 이곳에 묻힌 유골을 분골해서 인근의 절 ‘킨쇼지(금송사, 金松寺)’에 일부 모시고, 나머지 유골은 그대로 지금의 공양탑 자리에 매장했다.

또 각 유골에는 사망자의 이름·출신·사망원인이 적힌 위패가 있었는데 옮기는 과정에서 위패를 불태워 버렸고, 그래서 유골이 누구의 것이고 어떤 이유로 죽게 됐는지를 알 수 없다.

이후 남겨진 사망자 명부에서 가족의 이름을 발견한 후손들이 미쓰비시에 유골 송환을 요구했지만, 미쓰비시는 이를 거부했고 유골은 아직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전국에 흩어진 50여 가족이 ‘하시마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를 결성해 30여년 가까이 미쓰비시와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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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시마 공양탑 유캔스타트 펀딩 사이트 화면 지난 10월 13일에 18,548,000원으로 목표금액 10,000,000을 초과 달성하며 프로젝트
펀딩이 마감됐다. 사진은 펀딩 마감 3일 전 상황.
 




서 교수는 “일본이 숨기고 싶어 하는 역사적 이유 때문인지 그나마 조선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공양탑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안타까워 했다.

한편 독일은 촐페라인(Zollverein) 탄광에 대해 나치의 전쟁 수행을 위해 전쟁 포로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던 사실을 정확히 명시해서 주변국 어떤 나라도 유네스코 등재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 다카시마섬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석탄박물관 입구 연표에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이 빠져 있다.

하시마섬에 묻힌 진실 그리고 다카시마섬에 방치된 하시마 탄광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 공양탑은 우리가 다시는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역사다. 또 일본은 역사를 말하기 전에 ‘진실’부터 말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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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하시마섬의 진실’ 영상 일본인 관광객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