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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라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글 백은영 사진 김응용


전주서 지난 8월 29일, 역사 기억하기 위한 행사 열려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한 故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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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잃은 날. 우리는 그날을 경술년에 나라를 잃은 수치를 당했다 하여 ‘경술국치’라 부른다. 일제의 폭력과 강압으로 진행된, 결코 ‘합의’된 적 없던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잃은 그 날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수치스러운 일이니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역사에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걸어온 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좋은 것을 기억하고 싶어 하고, 잊고 싶은 기억은 드러내기를 꺼려한다. 개인의 삶에 있어 기억의 취사선택까지 간섭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뒤흔들만한 사건이었다면, 설사 그 기억이 뼛속까지 저려올 정도로 아프더라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아픔을 공감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최초의 한국 연극 <귀향(歸鄕)>.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지역문화 발전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극단 명태가 무대에 올린 <귀향>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룬 연극이다. 작년 12월에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라는 제목으로 관객을 만났고, 이번에 광복 70년을 맞아 광복절 무렵 정기공연으로 관객을 찾았다.

지난 1997년 전주에서 창단한 극단 명태는 지역 내 공연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을 뿐아니라,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전국 순회공연도 이어오고 있는 예술단체로 실험적인 작품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 연극 <귀향>도 어쩌면 밖으로 끌어내기 어려웠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드러냄으로써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기획됐다고 볼 수 있다. 최경성 연출가가 “광복 70년을 맞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었다”고 제작의도를 전한 것처럼, 연극은 일본군‘위안부’의 실태뿐 아니라 피해 할머니 개개인의 인권문제 또한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런 <귀향>이 정기공연 후 약 1주일 만이자 국치일인 지난 8월 29일 다시 한 번 특별무대에 올랐다.

이날 무대에 오른 <귀향>이 여느 공연과 다르게 유독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무대 위에서 진행된 故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주 유일여고 ‘유일희망나비’ 동아리 학생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쓴 책 <날아라나비>의 출판기념회가 열려 그 의미를 더했다. 이날 연극은 <날아라 나비> 출간을 기념해 올린 특별공연이지만, 이날 열린 행사들이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해 진행된 만큼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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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유일여고 ‘유일희망나비’ 동아리 학생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쓴 책 <날아라 나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에 위치한 ‘아하아트홀’에서 진행된 이날 행사는 전주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는 데 또한 의미를 둘 수 있다. 전국에  ‘평화의 소녀상’이 많이 세워지고 있지만, 정작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기리는 ‘기림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뜻 있고 의식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최초로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를 제작, 이날 행사를 갖고 공개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평화비’라 부르고 싶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 공개 증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故 김학순 할머니. 여자로 태어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말 ‘순결’ 그리고 ‘정절’. 평균 나이 열여섯의 꽃다운 소녀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군에게 강제 연행돼 일본군들의 성노예 피해자가 됐다.

어린 나이에 겪기 힘든, 아니 여자로서 견디기 어려웠을 그 모진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고 광복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그들에게 돌아온 건 ‘화냥년’이란 모진 말들뿐이었다. ‘화냥년’이란 고려시대 원나라의 요구에 의해 고려 처녀들이 공녀로 원나라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려(고향)로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환향녀(還鄕女, 고향에 돌아왔다)’에서 변형된 말로 ‘역사적 비극’이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숨을 부지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강요에 의해 원치 않던 수모를 당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고국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한창 아름답게 피어날 꽃다운 소녀들이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돌아왔으나 입을 꼭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고향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외면받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이를 악 물고 살아온 그 모진 세월, 많은 시간이 흘러도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가 없는 일본 정부에게 그리고 과거사 청산의 진척이 보이지 않는 우리 정부에게 진실을 말해주기 위해 기꺼이 고통스런 자신의 과거를 들춰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학순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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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자원활동가 김판수 선생은 지난 2013년부터 전주 한옥마을에서 <일본군 강제연행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처음 세상에 공개했을 때만 하더라도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떠들고 다니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어야만 했던 이들. 꽃이 피기도 전에, 혹은 꽃이 아름답게 피자마자 처참하게 떨어져 짓밟혔던 소녀들.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일본 정부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받는 그날이 바로 그네들이 영원히 지지 않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날이 되지 않을까?

지난 2013년부터 전주 한옥마을에서 <일본군 강제연행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 1억인 서명> 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자원활동가 김판수 선생은 전 세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져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 평화의 상징으로 세워지는 ‘평화의 소녀상’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성사시키기도 했던 김판수 선생이 이번에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 제작을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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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 공개 증언자 故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 제작을 제안한 김판수 선생이 서명운동의 의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선생이 정대협 활동을 하면서 입기 시작한 노란조끼를 입은 지도 벌써 11년째다.

김판수 선생은 김학순 할머니 기림비와 관련해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가장 원초적인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다”며 “한국은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과거를 청산하자고 하고, 일본은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청산을 안 하려고 한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일(정대협 활동 및 서명운동)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며 “그럴 때면 저는 ‘피해자가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에게 일본이 억만금을 주고 와서 절을 백 번을 한다고 한들 그분들이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소한 그분들이 받았던 고난과 상처, 수모를 같이 기억해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공개 증언한 故 김학순 할머니. 그를 기억하는 ‘김학순기림비’는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한 후손들의 마음이자, 그분들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소망인 것이다. 또한 다시는 이 땅 가운데 이러한 불행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평화’가 도래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함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학순할머니 기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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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할머니 기림비 맨 위에는 할머니의 얼굴이 조각돼 있다. 평생 한(恨) 서린 삶을 살았고, 공개 증언 이후에는 투사와도 같았던 삶을 살았지만, 기림비에서는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국가의 무관심과 이웃의 외면으로 어두운 그늘 속에서 살던 할머니가 “내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던 현실. 1991년 8월 14일 외친 그 한마디는 지금의 수요정기집회를 이끄는 계기가 됐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외면했던 정부와 국민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이 어록은 기림비에 새겨져 후손 대대로 회자되며 기억될 것이다.

비문에는 할머니의 어록 외에도 “김학순 님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로 고초를 겪으셨고 우리는 수난의 역사 산 증인으로 님의 아픔을 길이 기억합니다”라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다. 기림비 제작은 ‘봄숲’ 최김춘근 작가가 맡았으며, 생전 할머니의 온화한 모습을 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김학순 기림비’는 총 3기가 만들어져 현재 전주 유일여고와 서울에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모셔졌으며, 남은 한 기는 전주 한옥마을 서명 운동 현장에 세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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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나비> 출판기념회에서 ‘유일희망나비’ 동아리 학생들과 지도교사(앞줄 왼쪽), 김판수 선생(앞줄 가운데) 그리고 기림비를 제작한 ‘봄숲’ 최김춘근 작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