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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光復의 의미를 되새겨보다


글 박선혜


“光復, 빛을 회복하다”


‘光復’, 빛 ‘광’ 회복할 ‘복’으로 조합된 이 단어는 ‘빛을 회복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아가 ‘국권을 회복하다’는 의미도 된다. 또 국어사전에서는 명사로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이란 뜻이다. 적어도 이 말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둘로 분단된 땅, 한반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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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제1지대(한국광복군동지회)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을 잃은 조선의 백성들은 식민지 통치 아래 억압과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일제 강점기는 암흑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 백성에겐 ‘광복’이 절실했다.

일본에 의해 결정적으로 ‘강제병합’된 때는 1910년이다. 하지만 이미 16년 전인 1894년 부터 일본은 강압적으로 ‘개화정책’을 요구했고, 이에 항거하는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했다. 이러한 의병 활동은 3차에 걸쳐 이어졌고, 1910년에 이르러 한계점에 도달하자 몇 몇 세력이 간도·연해주 등지로 거점을 옮겨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원치 않았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고, 조선 백성은 자주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쳤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나름의 방식으로 항일운동에 함께했다. 여기에는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는 항일정신이 뒷받침됐다.

몇몇 주요 항일단체 활동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강제병합 직후에는 만주에 있던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중심으로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조직됐다. 이를 기반으로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설립됐으며, 항일정신을 높이고 조국광복을 위한 기지 구실을 다했다. 그러나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 등으로 학교는 약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20년 가을 폐교됐다.

같은 시기에 김좌진(金佐鎭)도 간도 일대에서 1600명 정도의 독립군(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을 양성하고 있었다. 1920년 10월, 김좌진·나중소(羅仲昭)가 지휘하던 독립군과 일본군이 10여 차례에 걸쳐 싸운 이 전투는 항일독립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로 역사에 기록 된 ‘청산리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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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 만세 시위 모습
 

이 전투로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해 1200여 명의 일본군이 사살됐으며, 독립군은 60명의 전사자를 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반격으로 조선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민간인 3000여 명이 죽고, 2500여 호의 민가가 방화됐으며, 30여 개의 학교가 잿더미가 됐다.

이 밖에도 자주독립 국가를 위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성격으로 수많은 투쟁이 계속 됐다. 동시에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쌓는 일도 병행됐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4월 10일에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헌장’이 선포됐다. 그리고 이틀 후인 13일에 대한민국의 첫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이 정부는 국내외 11개 지방에서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각 대표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실질적인 구성원이었으므로 ‘국민대표정권’이라는 요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도 24명으로 구성된 전국 13도 대표자의 이름으로 ‘국민대회취지서’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했다.

이처럼 약 35년의 일제강점 기간에는 다양한 형태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까지 항일투 쟁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질병과 가난, 강제 노동,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가족을 잃은 조선 백성들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식민지 아래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에 광복이 찾아 왔다. 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백성들이 큰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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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선언의 3거두(앞줄 왼쪽부터 장졔스, 루스벨트, 처칠. 처칠 우측은 장졔스의 부인 쑹메이링)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은 이날을 기리고자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광복’은 1943년 11월 22~26일에 열린 ‘카이로 회담’의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에 따라 이뤄졌다. 이어 1943년 12월 2~7일에 두 번째 회담이 진행됐다.

‘카이로 선언’ 주요 내용

①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② 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③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④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타이완·펑후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힘으로 지배한)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⑤ <특별조항>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합의를 하였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진정한 광복(光復)의 의미를 다시 상기해 본다. 한반도는 아직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고, 언제든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휴전 상태다. 지구촌에는 여전히 빈곤한 나라가 많고, 지금도 테러 등의 위험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진정한 광복의 그 날을 고대하며 불굴의 의지로, 항일정신으로, 참고 이겨냈던 때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며, 세계 평화가 도래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