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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무관심으로
정체성 잃은 ‘독립문’


글 백은영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옛말에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공자가 아들 리(鯉)에게 “너는 주남(南), 소남(南)의 시를 공부했느냐? 사람이 이것을 읽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것과 같아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말에서 유래됐다. 주남과 소남은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그 내용이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대한 것이다. 즉 이를 공부하면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에서 벗어난다(면면장免面牆)”는 의미로 시간이 흐르면서 “알아야 면장(面牆 또는 面墻)한다”는 말로 불리게 됐다. 다시 말해 제대로 알아야지만 우매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참으로 이치에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어설프게 알았다간 외려 잘못된 지식을 전달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역사를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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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4월호에서도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이번호에 다룰 영은문(迎恩門)과 독립문을 찍은 몇 장의 사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다. 우리네 역사와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마치 사실인 것 마냥 전달해도 그것이 잘못 됐음을 꼬집는 이도 드물다.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이 와 닿는 대목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한 것처럼,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위력은 크다. 이에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定說)처럼 받아들여지는 풍조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인터넷 백과사전(두산)이나 독립문 현장 안내판에는 영은문을 없앤 터(영은문 안내판), 또는 영은문 자리(독립문 안내판)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표기돼 있으나 사진을 보면, 독립문은 영은문이 있던 터에서 50m 가량 떨어진 앞쪽에 지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독립문 자리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사실 확인하지도 않고 계속 가져다 쓰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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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무악재를 바라보고 건립된 영은문(迎恩門)은 중국황제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대주의 정치의 표상이었다. 중국이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 가는 유일한 육로가 무악재였던 만큼 영은문은 중국사신을 성대히 맞이하기 위해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해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불렀으며, 영은문은 헐리게 됐다. 지금도 영은문을 자세히 보면 청일전쟁 당시 일제가 불 질렀을 때의 흔적(그을음)이 남아있다. 현재는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화강석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영은문 주초는 1896년(고종 33) 독립문 공사 때까지는 제자리(무악재에서 들어오는 것을 기준으로 독립문보다 뒤쪽)에 있었으나 1934년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진다. 그러던 것이 1979년 성산대로 개설로 독립문과 함께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현재의 위치(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 내)로 옮겨졌다. 영은문 주초(迎恩門 柱礎)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3호로 지정돼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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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 맞기 전의 독립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1896년(건양 1) 독립협회가 한국의 영구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성금을 모아 세운 건축물이다. 프랑스 파리의 드골(에투알)광장 중앙에 있는 석조 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했다.

독립문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것(반청反淸)으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상징이자 표징이었다. 영은문보다 앞에 세워진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쪽에는 한문으로 독립문이 새겨졌고, 반대로 한양에서 다시 외부로 나가는 쪽에는 한글로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알리던 이 독립문이 성산대로 개설로 인해 197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무악재를 바라보며 한양으로 들어오는 이방인들, 특히 중국사신에게 위엄함을 자랑했던 그 면모는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는 형국이 돼버렸다. 독립문이 왜 영은문보다 앞에 세워져야 했는지, 그 방향이 갖는 의미도 모른 채 문화재를 함부로 옮긴 것은 분명 역사에 대한 무지와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온것일 것이다. 그뿐 아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6.25전쟁 당시,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에 총탄 맞은 흔적까지도 시멘트로 메워 그날의 흔적을 지우기까지 했다. 비록 아픈 역사이기는 하지만 후세에게 역사의 산 현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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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 맞은 후의 독립문

다른 한 장의 사진과 비교했을 때 사진 찍은 위치나 구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만으로도 훨씬 뒤에 찍힌 것을 알 수 있다. 한글로 ‘독립문’이라 새겨진 현판이 보이고, 그 앞에 영은문 주초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성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뒤편으로 인왕산 자락이 보이며, 왼쪽 옆으로는 전차궤도(전차선)가 지나가고 있고 그 뒤편으로 2층짜리 건물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 건물은 다른 사진에서도 보이는 바, 서로 다른 시기에 찍은 사진이지만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그리고 왼쪽 건물이 한 화면에 들어오게 찍은 것은 아마도 당시 서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전선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받아 전차가 다녔다는 것과 독립문 주변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전선들이 산만하게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문 양쪽으로 전차선이 놓인 까닭도 있지만 조금만 신중했더라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나타내는 독립문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지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

세 장의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은문을 헐은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 아닌, 외려 그보다 앞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을 제일 먼저 맞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그 자리에서 묵묵하면서 위엄 있게 외쳤던 ‘독립문’. 언제쯤 그 이름대로 참된 평가를 받고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사진들이다.